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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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희에게 의미심장한 문자를 받은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멍한 상태로 집에 돌아온 나는 하염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 걱정 없이 시험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런 사태가 발생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또다시 저번에 냉전 분위기가 될까봐 굉장히 조바심이 났다. 재희가 처음 가희에게 고백한 뒤 벌어졌던 그 때처럼 우리 넷의 사이가 나빠진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답답한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슬슬 누가 격하게 보고 싶어졌는데, 아니나다를까,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만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계속 걱정만 하고 있었더니 머리가 아팠었는데, 신기하게도 우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 두통이 눈녹듯이 사라져버렸다. 시험은 어땠냐며 물어보는 우주의 질문에 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대답했다.
"뭐 그럭저럭 본 것 같아. 넌 어때?"
생각해보니 재희 때문에 우주도 학교에 버리고 왔고, 은주들과 노는 것도 패스했다. 그런데 그런 선택의 결과가 가희의 분노와 재희 커플의 위기라니. 잘못 선택해도 한참 잘못 선택해버렸다.
아니지 계속 이런 생각만 하다간 내가 우울해지고 말겠어 다른 생각 해야지...
[윤하야, 저녁때라도 같이 놀까? 아깐 굉장히 바빴었나 본데...]
"음... 그러면 한 4시쯤 만나자, 어때?"
재희와 가희 찾는것도 중요하다면 중요하겠지만 사실 아까 바람맞힌 애들에게도 미안했기 때문에 난 우주가 만나자는 말에 바로 OK했다. 으 애들도 만나야 하고 재희랑 가희도 찾아야하고 첩첩산중이다 정말.
[그나저나 오늘 하루종일 가희가 너희를 주시하고 있던데... 뭔일 있어?]
아... 이미 가희가 우리를 계속 보고 있었다면 은주가 문자를 해줄 당시 가희는 이미 우리를 미행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역시 우주, 답답하긴 해도 믿음직스러운 녀석이라니까. 너가 이야기해 준 덕분에 아까 일이 터진 연유가 대충은 이해가 된다 짜식.
"글쎄...? 여튼 이따 4시에 멀티플렉스 앞에서 보자~."
[알았어, 준비하고 있을게!]
흠... 아니다 역시 우주와 만나기보다는 역시 지금 재희 커플을 찾아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보고 싶은 내 마음이 더 강해. 정확히 말하면 재희 때문이지만 나도 그 문제에 일조를 했으니 이 위기에 처한 커플을 구해내는 게 중요할 테니까.
'어디로 갔을까. 재희가 갈만한 데는 대충 짐작이 가긴 하는데...'
통화를 마치고 나서 4시까시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기 때문에, 난 내 본능이 이끄는 대로 재희와 가희를 찾아 학교 근처의 번화가를 정처없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사람에 대한 단서를 찾기도 전에 크나큰 위기가 다시 찾아오고 말았다.
"어? 윤하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무시하고 모른 척 지나가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느끼자, 자연스레 발걸음이 빨라졌다. 허나 젠장, 내가 두려워하는 그 존재는 내 빠른 걸음보다 더 엄청난 속도로 내 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안돼... 달려오지마!
"윤~하~야~!"
"푸헉!!"
시원하고 강력한 백 허그가 내 온몸을 휘감자, 일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결국 은주에게 잡히고 말았다...
"으... 은주야 제발... 힘들어-!!"
내가 거의 생명이 꺼져가는 듯 한 목소리로 허우적거리자 어느새 나타난 다혜와 나연이가 은주를 힘들게 내 등에서 떼어냈다. 계속해서 은주가 내게 달라붙으려 바둥거렸으나 다혜가 지켜준 덕분에 압사의 위기는 벗어날 수 있었다.
젠장할, 이놈의 몸은 왜 이리도 인기가 폭발인건지. 안에 있는 사람이 힘들 정도로 여기저기서 난리구만! 몸이 바뀐 직후에는 가희에게 시달렸고, 요즘에는 신흥세력 은주에게 시달리고... 물론 여성에게 백허그를 당하는게 기분 나쁘진 않다만, 은주의 경우는 얘기가 좀 달랐다. 이전에도 여러 번 서술했다시피, 얘 포옹은 너무 강력해서 내가 죽을 것 같거든!
"두 번째로 보네 윤하야... 은주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거든? 노래방 갔다가 노래가 잘 안되가지고 완전 분노 상태야!"
"우에에~ 젠장!"
괴성을 지르는 은주를 보며 난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은주의 분노가 포옹했을 때의 힘과 방금 그 우는 소리 한 마디만으로 내게 전달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재희와 볼일은 끝난거야? 혼자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냥 지나칠 수 만은 없을 것 같았다. 어쩌겠으랴, 그녀도 소중한 친구인 것을. 그래, 나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불쌍한 소녀 한 명을 구제하는 셈 치자!
"어-응. 그래서 집으로 가던 길이었어! 같이 놀까?"
결국 난 어쩔 수 없이 가려던 길 멈추고 은주의 스트레스를 풀어줘야 할 처지에 놓여 버렸다. 아... 이러다가 재희와 가희는 언제 찾고, 우주는 또 언제 만난담.
'그렇다고 우주를 따로 만나기로 했다고 대놓고 이야기 할 수도 없고...'
내가 항창 고민하고 있는데 다혜가 옆에서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은주를 토닥이고 나서 다혜는 내 쪽으로 돌아서더니 귓속말로 나즈막이 말했다.
"고마워 윤하야, 놀아주기로 해서. 너 아니었으면 은주가 우릴 압사시켰을거야..."
내가 '이 불쌍한 아이들..'이란 표정을 지으며 허탈하게 웃자 나연이가 내 등을 토닥였다. 에라 모르겠다, 애들이랑 놀다 보면 어딘가 재희랑 가희가 있겠지?
"가자 가자~ 일단 배부터 좀 채울까?"
과연 내 운이 어디까지 통할 지 시험해 볼 요량으로, 난 모든 수색작업을 중단하고 일단 은주 일행과 놀기로 결심했다. 에잇, 시험도 끝났는데 나만 불안해가지구 안절부절하고 있을 수많은 없잖아? 그래 이렇게 된 거 나라도 혼자 기분 풀어놓고 이따가 재희를 만나서 이야기하던가 해야지 뭐.
'아차, 4시에 우주를 만나기로 한 건 어쩌지...'
문득 우주와 약속했던 것이 떠오른 나는 어떻게든 이 쪽도 해결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딱히 떠오르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라서 어떻게든 이 방법이 우주에게 통하길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우주도 불러내서 은주들과 함께 같이 노는 것이었다. 우주가 나 외의 다른 여자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할 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별다른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바로 우주에게 문자를 날렸다.
[우주양! 오늘 좀 놀랄만한 게스트들이 같이 있는데 상관 없지?]
우주가 어떤 반응을 보일 지 약간 걱정스러웠지만, 바로 온 답장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왜 걔들밖에 없을거라고 생각하니 우주야...
[우즁★]
[어.. 그래? 물론 상관은 없지! 시험 끝난 날인데 여럿이 놀아야 더 재밌지. 혹시 재희랑 가희?]
미안하다, 일단 재희와 가희는 아니다만... 뭐 일단은 누군지 알려주는 것보다 이따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게 낫겠지.
[답장]
[아니, 걔들은 아닌데... 여튼 재밌을꺼야! 4시에 보자!]
그 뒤 우주의 약간 당황한 듯한 답장을 받고 나서야 난 모든 약속을 정리했다는 안도감에 휩싸였다. 물론 재희, 가희의 문제가 남았지만 그건 오늘 남은 시간 안에 해결해 보기로 하고 조금 흥을 내야겠다 생각했다.
"날도 더운데 팥빙수나 한 사발 하자구~!"
"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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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게 흥을 내려던 것도 얼마 못 간게 흠이라면 흠일까.
"어라? 저거 재희랑 가희 아냐?"
우주까지 합세해 한창 달리고 있는데 하필이면 다같이 있을 때 두 사람을 발견해 버린 것이었다! 젠장, 이런 상황이 반 아이들에게 알려지면 큰일이다. 깨소금이 쏟아지던 두 사람의 불화라니, 누가봐도 이건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아닌가?
물론 은주를 포함한 내 친구들이 절대 입이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모른 척 잡아떼도 언젠가는 새어나가게 되기 마련. 입단속을 철통같이 한다고 해고,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분위기가 좀 심상치 않은 것 같은걸...?"
작가이기 때문에 분위기를 너무나도 빨리 읽어버린 다혜가 날 보며 말했다. 마치 그 말에 반응이라도 한 듯 모두가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눈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시간 전 가희의 비슷한 표정을 보고 문자했던 한 사람이 날 주시하며 물었다.
"아까 가희가... 많이 화났었던거 설마 윤하 너 때문이었어?"
은주의 질문이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꽃혔다.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방금 한 마디로 인해 마음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져 버렸다.
"아니... 그, 그게 말야...!"
아까 그 상황은 어찌 설명할 것이며, 무슨 말로 변명을 해야 할 것인가. 분명 바보가 아닌 이상 재희와 내가 지나가고, 화난 가희가 지나가며 우리의 행방을 물었다면 뻔한 상황이었다. 바로 '나로 인한 사랑 싸움'이 주제라는걸!
어찌해야 하나 생각할 여유도 없이, 정신 못 차리는 내게 세번째 콤보가 들이닥쳤다.
"-!! 모두 숙여!!!"
============================ 작품 후기 ============================
+14.07.09 수정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