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6. 시험과, 시험>
"끄응..."
첫날 두 과목의 답안지를 받아든 나는 한숨부터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틀리지도 않을 문제들을 잔뜩 틀려놔서 실수로 틀렸다고 변명하기도 그랬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일요일에 꿨던 그 꿈 때문이었다. 윤하의 시점에서 꿨던 꿈이었고, 내가 당사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꿈의 여파는 엄청났다. 일어났더니 베게 주변이 흥건하지를 않나, 손이 부들부들 떨리지를 않나, 심지어는 그날 저녁때까지 아무것도 먹지도 못했다.
"괜찮아 윤하야? 오늘따라 안좋아보여 좀..."
우주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에게 물어왔지만, 그래도 꿈 얘기는 할수가 없었다. 아직 재희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던 꿈 얘기를 우주한테 함부로 했다간, 우리 둘의 몸이 바뀌었다는 사실까지 들키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난 최대한 다른 사람들이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않았으면 하고,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최대한 평소처럼, 아무일 없었던 듯이.
"괜찮아 괜찮아! 어제 밤에 배가 좀 아파가지구... 그래서 그런거야."
그러나 역시 맘이 편치 않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자연스럽게 내 맘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따라가게 될 수 밖에 없었다.
"뭐야, 그럼 배는 괜찮아? 병원이라도 가 봐야 하는거 아니구?"
물론 이 녀석은 너무나 신경써서 탈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니 그리고 난 생리 핑계를 댄건데 이녀석은 탈나서 아픈걸로 알아들었나보네.
"됐어! 무슨 병원이야. 지금은 멀쩡하기만 한데."
병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아마 재희한테 말했으면 정신과나 최면술사에게 데려가지 않았을까 싶다. 이유는... 알아서 생각하기 바란다...
"저기 우주야 있지..."
어떻게든 빨리 마음의 안식을 찾고 싶었던 난 우주에게 재촉할 수 밖에 없었다. 좀더 늦어졌다간 재희 녀석이 금세 따라와서 집으로 끌고 갈 테니까 말이다.
"오늘 너네 집에서 공부할까?!"
하교할 준비를 하던 우주는 그 말에 놀라면서도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이지!"
*
이때까지도 난 내가 우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몰랐던 것 같다. 물론 '소꿉친구'라는 배경이 늘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떨 때는 내가 마치 사랑에 빠진 여자가 된 것 같았고, 어떨 땐 정말 친한 불알친구와 노는 기분이었으며, 어떨 땐 일국의 공주가 된 것 같은 느낌이 하루에도 수시로 교차됬다.
'그래봤자 내가 우주를 생각하는 마음에 변화가 없다면 달라질 건 없겠지만 말이지..'
솔직히 말해 세 경우가 모두 나에겐 즐거운 일이었지만, 딱히 어느 한 쪽에 몰리는 일도 없었다. 나의 태도가 좀 바뀐다면 나와 우주 사이의 관계가 빠르게 진척되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친구같은 애인이라는 존재는, 그만큼 존재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존재할 경우 천생연분이라는 소릴 들을 정도로 죽이 잘 맞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난 내 태도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왜냐고? 소꿉 친구가 이성 친구가 되었다곤 하지만, 여전히 친하게 지내는 것이 가능한 것도 내가 나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 안한 채로 우주와 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여자가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내가 아직 남자 애인을 받아들일 준비 역시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딩동]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며 걸어왔더니, 어느새 집앞이었다. 그런데... 초인종을 누르고 나서 시계를 보니 내가 까먹고 있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시간은 오후 10시, 시간도 시간대로 늦었고, 오후 쯤에 재희에게 전화가 무진장 왔던것도 기억이 났다.
'아. 맞다.'
지금 집에 들어가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눈앞이 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들어가면 가출하는거나 다름없는고로, 난 최대한 별 일 없기를 바라며 기도했다.
"여어... 서...윤...하..."
"흐이익?!"
엄마야! 문이 열리자마자 앞에 서서 날 노려보고 있는 건 다름아닌 재희였다. 잠깐, 너 엄청 화난 것 같은데... 그렇지?
"저기... 잠깐 재희야, 말로 하자 말로."
마치 흥분한 미노타우루스 마냥 씩씩거리고 있는 재희의 모습을 보자니, 콧구멍에서 김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 무서운 광경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던 나는 문과 녀석의 팔 사이로 잽싸게 빠져나가려고 돌파를 시도했다.
'좋았어 탈출 성고-'
"-뀨헥!"
그러나 무사히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허리를 녀석에게 잡혀버리고 말았다. 마치 레슬링 기술의 하나처럼 어깨 위에 들쳐메진 나는 바둥거리며 벗어나려고 힘썼지만 녀석은 내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더니 힘을 쪽 빼버렸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래? 너 오늘 잘 걸렸다 아주!"
"아하하하하항! 으허헣!"
너무나 간지러워서 웃음이 터져버린 나는 속절없이 녀석의 어깨 위에 메쳐진 뒤 끌려가 방의 침대 위에 퉁하고 던져졌다. 그대로 침대에 엎어진 날 바라보며 재희가 말했다.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 담긴 것이 안그래도 지금 꽤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 왜 전화 안 받아?! 내가 몇번을 전화한 줄 알기나 해? 내가 임마 너-"
"17번..."
아, 이 전화 횟수는 딱히 기억하고 싶어서 기억한 것은 아니다. 공부하는데 자꾸 진동이 와서 집중이 안되는 바람에 자동응답을 켜놓고 공부했었는데, 끝나고 나니 기록된 전화 횟수가 17번이었기 때문에 딱 기억에 남아버린 것이다.
"... 뭐, 아무튼! 늦게 들어올거면 어머니한테라도 전화하던가. 걱정하시잖아!"
"미안! 그건 내가 잘못했어, 진짜."
빠직. 재희의 머리에서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잠깐, 이런 소리는 안나야 정상 아닌가? 야 너 머리에서 이상한 소리 났-
"너 그럼 내 전화 안받은건 잘했다는 얘기야?!"
버럭 소리지르는 재희의 성화가 무서워 난 무심결에 얼굴을 막으려고 팔을 방패삼아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 틀린말 안했잖아?! 네 전화는 안받아도 상관 없는거 아냐?, 니가 무슨 내 남편도 아니고 말이야. 아니지 혹여 남편이라고 해도 의부증이 아닌 이상 그렇게는 전화 안하겠다.
아무튼 그렇게 20분동안 나에게 또 하던 얘기를 계속했는데, 마지막에 녀석이 한 말중에 가장 중요한 몇마디가 있었다. 진부한 말 중에 이런 중요한 얘기가 나오면 놓치지 않는 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암튼 너때문에 전화하다가 가희한테 혼났다구. 알았어?"
이자식, 니가 그렇게 나한테 자꾸 전화하고 귀찮게 하니까 가희가 짜증이 날 만도 하지! 어떤 여자가 데이트중인데 다른 여자한테 수도없이 전화해대면 좋다고 하겠다!
"가희가 뭐라고 했는데?"
"나한테 왜그러냐고 그러더라. 요즘 좀 수상하대... 내가 뭘 했다구!"
나한테 전화했지 넌. 그리고 날 귀찮게 했고. 잠깐, 그런데 재희의 그 말을 들어보니 뭔가 수상했다. 가희처럼 눈치 빠른애가 그정도 말을 할 정도였으면, 재희의 심경에 뭔가 변화가 있었다는 건데, 왜 스스로 눈치를 못 채고 있는거냐 너?
"날 그렇게 귀찮게 하니까 당연히 나라도 그러겠다..."
"뭐?"
그런데 나름 눈치 빠를거라고 생각했던 재희가 의외로 이런데는 무신경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게 원래 여자였던 녀석이 여자를 더 모르는 거지.
"아무튼 너, 가희 앞에서 나한테 귀찮게 하거나 전화한다거나 해서 내 일로 가희가 신경쓰지 않도록 해 임마."
"어, 으응."
마지막엔 어째 내가 역으로 재희에게 설교하는 꼴이 되었지만, 어찌됬든 재희에게 꼭 해주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지금 가희가 재희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기 때문에, 재희가 앞으로 계속 엇나간 모습을 보인다면 둘 사이가 어떻게 될 지는 안봐도 뻔했다.
'내가 어떻게 너희 둘을 이어줬는데, 이런식으로 헤어져버리면 곤란하지.'
힘들게 재희를 포기하고 가희에게 양보까지 했는데, 이 녀석들이 이런 문제로 싸우게 되는 건 나로써도 원치 않는 상황이었다. 난 두번 세번 재희에게 거듭 경고하면서도, '가희가 널 의심하고 있다고'라는 말은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 말 했을 때의 '도대체 뭐 때문에?!'라고 할 재희의 반응이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나 공부할거니까, 너도 내일 시험 준비나 해."
그렇게 사태는 다행히도 일단락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재희와 가희의 관계는 며칠 뒤 더욱 악화되고 만다.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것도 나 때문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