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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28화 (28/188)

28화

내가 윤하의 과거 기억을 보는 듯한 이상한 꿈을 또 꾼건 그로부터 며칠 안 지나서였다. 정신없이 기말고사 준비하느라 저번 꿈을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다시 꿈을 꾸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꿈에 막상 돌입했을 때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안그래도 익숙한 우리 집이 배경이라서 그런지 더더욱 헷갈렸던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어린 윤하의 시점이었는데, 그 때문에 깜빡 티비 보다가 잠든 것으로 착각할 뻔 했다.

조금 지켜보고 있자니, 저번 꿈에 이어지는 기억이었다두번째 꾸는 꿈이라 그런지 저번에 꿈꿀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들도 이번에 많이 알아챌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지금 이 상황이 윤하가 어머니를 잃고 난 뒤라는 것이었다.

"야."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했더니, 어린시절의 나였다.

"티비만 보지말고 나랑 놀자."

"..."

어린시절의 내가 저렇게 여자에게 서슴없이 다가가는 걸 보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내 기억으로만 봐도 중학교 때부터는 눈이 쓸데없이 높아지는 바람에 여자애들에게 관심을 거의 안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튼 내가 그렇게 살갑게 다가가주는것과 대조되게, 윤하의 반응은 냉담했다. 잠깐 고개를 돌려서 날 바라보더니 다시 티비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리는게 아닌가! 크윽, 2년 전 나였다면 이런 꼴은 그냥 못 넘어갔을텐데.

"윤하야, 윤하야."

어째서인지 그 도도하고 눈높은 내가 윤하에게 빌빌대고 있다는 사실에 열이 받았지만, 곧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저번 꿈에 이어 생각해보니 첫눈에 반한 것도 17살 때가 아니라 10년 전인 7살 때라는 결론이 나왔고, 그렇기 때문에 어린시절의 내가 윤하에게 저렇게 매달리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짜식. 어렸을 때부터 이상형을 알아봤구만.'

갑자기 스스로가 기특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7살의 내가 윤하에게 매달리는 모습도 바보같아 보이지가 않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리 가."

그러나 어째서인지 내가 계속 놀자고 해도 윤하는 계속 거부하며 받아주질 않았다. 계속 놀자고 하는 나도 참 대단했지만, 그걸 계속 싫다고 가라고 거부하는 윤하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몇분을 실랑이했을까, 결국 윤하가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냈다.

"가라니깐!"

어지간히 짜증이 났는지 윤하는 내 가슴팍을 팍 쳐서 어린 나를 밀어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어린 내가 날아감과 동시에 나까지 뒤로 날아가버렸다.

"우왓?!"

말도 안 되지만 그대로 난 지금 내가 있는 방까지 날아왔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침이었다. 하하.. 뭐 이런 허무한 꿈이 다 있어.

정신 차리고 부엌에서 찬물 한잔 하고 나니 기분이 좀 언짢았다. 그 이유인 즉 꿈이 끝날 때 쯤 윤하가 날 밀쳐낸 것 때문이었다.

"이 나쁜 기집애 같으니라고. 어릴때도 성격 드러운 건 여전했구만?"

내가 이렇게 밀쳐질 정도로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잖아?

*

다음 날도 난 여지없이 우주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저번주말에 우주 집에서 공부하기로 하긴 했지만, 역시 막상 가서 하려고 하니 부담이 되서 도서관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후 하루도 빼먹은 적이 없는 도서관 공부는 우주와 함께여서 그런지 딱딱하지만은 않고 즐거웠다.

"그래서 여기는 이 등비수열의 합공식을 써서 풀어내면-"

"오호... 그렇구나."

그리고 의외로 이 조합이 공부하는데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솔직히 난 혼자 공부해도 별 문제 없이 좋은 성적을 받아오는 편이긴 했으나, 우주와 함께 하니까 그 시간이 몇배는 단축되고 있는게 몸소 느껴졌다.

물론 내가 우주와 몰래 도서관에 가려고 집에서 빠져나올때마다 재희에게 엄청나게 둘러대야 하긴 했으나, 그정도는 재희를 피해다닐 수만 있다면 감수할 수 있는 문제였다.

아니 그런데 나 뭐랄까 우주에게 매달리는 꼴이 되어 버린게... 약간 꼴사나우려나? 아냐 친군데 뭘, 힘들때 함께 해주는게 친구지 암!

"고마워 우주야. 오늘도 덕분에 평소의 배는 했네."

"별말씀을! 덕분에 나도 시간은 많이 남았는데 거의다 해버렸어. 후후."

음하하하, 친구와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시험공부도 배에 가까운 속도로 끝내고! 이 어찌 일석이조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찍 끝낸 만큼 나에겐 더 많은 자유시간이 생기지!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우주와 헤어진 뒤 집에 돌아왔는데, 이게 웬걸. 대문앞에서 누군가가 잔뜩 열받은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어이, 서윤하.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가...?"

잠깐, 재희 너가 왜 거기 서있는거야. 뭐야 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 설마 너?!

"도서관에 같이 간건 은주가 아니었고 말이지."

미행한거냐! 누가보면 내가 불륜이라도 저지른 줄 알겠네.

"아아? 아니, 무슨, 무슨소리야!"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난 변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만 재희에게 목덜미를 붇잡히고 말았다.

"따라와. 안되겠다 정말."

"야? 야! 이거 놔!!"

그대로 집으로 질질 끌려간 나는 또 이전과 비슷한 말들을 듣지 않으면 안 됐다. 정말이지 재희 이 녀석은 내게 이러지 않으면 입에 가시라도 돋나... 어떻게 매번 똑같은 소리만 하는지 원. 뭐 같은 소리 매번 하는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만.

그렇다고 또 저번처럼 방문을 잠그고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또 신경은 써줄텐데, 그러면 녀석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를 대하기가 참 껄끄러워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 때문에 중도(中道)의 길을 걷는다는것도 쉽지많은 않은게, 재희녀석은 거의 가희와 있는 일이 잦고, 나는 우주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4명이 모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난 사실 재희가 가희와 헤어지기 전까지 절대 다같이 몰려다니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고로, 내일부터는 우리집에서 다같이 공부하자. 어때?"

그러나 이 한재희라는 인물은 기어코 그 일을 현실로 옮기는게 아닌가! 솔직히 요즘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네명이 따로 노는듯한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억지로 불러모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뭐, 생각해보니까 요즘 좀 소원했던 것 같긴 하네. 난 찬성."

그래도 우주녀석이 어느정도 재희의 저기압을 눈치챈 듯 재희의 제안에 냉큼 승락을 했다.

'눈치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던 녀석이 장족의 발전을 했는걸.'

가희 역시 그동안 내가 좀 보고싶었는지 가볍게 승락했기 때문에, 나도 따라서 승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재희 페이스에 끌려다니는게 좋지는 않았지만... 내가 만약 도망만 다닌다면 우주 입장도 좀 난처해질 것 같았기에, 일단은 녀석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한 것이다.

"그럼, 나도 찬성."

순조롭게 공부 그룹이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희의 표정은 탐탁치 않아보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일단 찬성을 해서 그런지 녀석은 그나마 좀 안심하는 듯 했다.

"좋았어, 내일부터 시험때까지 열심히 해보자구."

이왕 이렇게 된 거 난 한가지 결심을 했다. 같이 공부하게 된 김에 재희의 학습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서 예전 성적을 회복할 수 있도록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하는 수 없지. 그거라도 목표로 잡고 하면 그나마 거슬리는 기분이라도 없애버릴 수 있겠지.'

난 재희녀석을 바라보며 무언의 경고 메시지를 날렸다. 녀석이 째려보고 있는 날 바라보곤 '얘가 왜 이래'라는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아마 내 경고를 이해하진 못한 것 같다. 난 화이팅을 하기 위해 앞으로 손을 뻗었다.

"자, 힘내자, 며칠 안남았어!"

"아자!"

그렇게 급조된 공부 파티는 안타깝게도 내 생각처럼 만만하게 굴러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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