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시간은 늦었기 때문에 친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난 뒤, 어느정도 기운을 회복한 나는 신나게 문자 러쉬를 하고 있었다. 특히 오늘 방문해준 친구들과 조금이라도 더 친해지려고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긴 해도 가장 많이 주고받은 건 한명 뿐이었다.
[우즁★]
[아직도 열 좀 나나봐? 내일 내가 바래다줄까 그럼?]
상대는 바로 우주. 보내기만 하면 칼같이 오는 답장에 답장하느라 바빴지만, 우주와 문자로 수다떠는 것은 꽤나 재밌었다. 특히 그동안 힘들었던 거라던지 재희 뒷담화라던지 오늘 학교 가서 말했어야 할것들을 지금 전부 문자에 쏘아보내고 있었던 중이었다.
[답장]
[아냐 괜찮아. 내일이면 별문제없이 등교할 수 있을것 같아. 깜짝 감기기운만 오고 가는 그런느낌?]
지금시간은 오후 11시 반. 함께 문자하던 은주와 다혜, 나연이는 모두 졸리다고 자러 갔고 남은 사람은 우주뿐이었다. 밤이되면 사람이 감성적이 된다고 했던가, 우리는 서로를 챙겨주느라 바빠지고 있었다.
[우즁★]
[에이, 그래도 아까 짚어봤을때 열이 많이 나던데. 벌써 그렇게 가라앉았다구? 괜찮으니까 나랑 같이가자]
우주 녀석이 자꾸만 나를 바래다주려고 고집을 부리는 탓에, 재희가 또 날뛸까봐 걱정이 되서 오지 말라고 설득하려고 애썻으나 이녀석도 재희를 닮아가는지 고집불통이었다. 어떻게 된게 내 근처 남자들은 이렇게 하나같이 말을 안 듣는지 원.
[답장]
[됐대두!! 진짜진짜진짜 안와도 돼!]
그러나 내가 답장을 보내기가 무섭게 녀석은 서운하다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내비쳤다. 크읏.. 니가 그런다고 내가 넘어갈 것 같아!
[우즁★]
[진짜, 너무하다. 내일 나랑 같이 등교하던가, 앞으로 나 안보던가 둘중 하나 선택해]
이런 극단적인 놈을 봤나. 이런식으로 날 시험에 들게 하면 내가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하니. 아니면 내가 너한테 안좋은 소리 못 할걸 아니까 일부러 그러는거냐 혹시.
[답장]
[워워! 아니야 아니야! 알았으니까 내일 와!]
하는 수 없이 우주의 아침 등교 시간 방문을 허락하고 나서 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내일 아침에 재희에게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지, 생각해내지 않으면 분명 난 아침에 탈탈 털릴게 분명했으니까.
[우즁★]
[쌩큐! 내일아침에 내가 진짜 상전처럼 모시고 갈게!]
어이, 어이 안돼 상전이라니?! 아픈 몸이니까 그정도 대우받아도 싫진 않긴 한데... 내일 또 재희에게 내가 어떻게 시달리기를 바라는 거니 너...
[답장]
[됐어 얘는! 언능 자, 시간 많이 늦었다. 굿나잇!]
아마도 우주녀석이라면 이 문자에 100% 답장을 보낼 게 분명했지만, 난 신경쓰지 않고 바로 잠들기로 했다.
[지이이잉]
역시나.
*
그 다음날 아침, 예상치 못한 우주의 등장에 재희는 심기가 좀 불편해보였다. 아침부터 찌푸린 재희의 표정을 보자니 나도 기분이 꿀꿀하긴 했으나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주의 고집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을.
재희는 집앞에서 우주를 보자마자 나에게 귓속말로 소근소근 말했는데, 그 내용이 참 가관이었다.
"너... 무슨 말을 했길래 우주가 여기까지 온 거야?!"
무슨 말을 하긴요, 우주가 스스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허허.
그 날 이후 우주는 우리집에 좀더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내가 아프다는 핑계로 병문안을 게속해서 오는가 하면, 아침마다 우리 집 앞으로 와서 나를 부축해주고, 하교후에도 집에 갈때까지 에스코트 해주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재희는 점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솔직히 난 그닥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우주랑 뭐하고 놀든간에 나와 우주 문제지 재희 문제는 아니니깐. 그러나 나와는 다르게 재희 녀석은 내가 자기 몸으로 우주랑 알콩달콩 노는게 마음에 안들었는지 계속해서 딴지를 걸어댔다.
하지만 녀석이 그러면 그럴수록 난 더욱더 반발심이 강해져서 우주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왜냐, 자기는 신나서 가희와 내 몸으로 멋대로 놀고 있는 주제에 왜 난 못놀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여자 몸을 가지고 있는 입장이니까 좀더 주의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내가 뭐 우주한테 몸을 맡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지킬거 잘 지키고 있는 상황인데.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건 바뀐지 벌써 몇달이 지났으니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어떻게 하면 윤하의 몸으로 좀더 잘 살아갈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있을 때였으니 말 다했지.
그렇기 때문에 갈수록 윤하 몸에 적응하던 나는 재희의 간섭이 싫었던 것이고, 어떻게 하면 녀석과 거리를 둘 수 있을까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난 확실하게 서로 바뀐 몸만 알아서 잘 간수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안녕하세요~?"
며칠 뒤 재희에게 시달리기 싫었던 나는 주말을 좀더 편하게 보내기 위해 우주의 집을 방문했다. 물론 여러 번 들리긴 했었지만, 부모님이 계신 주말에 들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뵈는 우주의 부모님인데다가, 윤하 몸으로 뵙는건 첨이라서 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여나 실수라도 했다간 큰일나니까 최대한 입단속을 하는게 목표였다.
"어라? 안계신가..? 너 데리러 나갈 때만 해도 분명히 계셨는데."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들어서면서 인기척을 살폈지만, 어째서인지 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서 거실로 들어섰는데, 난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엇, 또 여기서 이렇게 주무시고 계시네..."
이게 웬일. 우주 부모님이 거실에서 이불 하나를 덮고 새근새근 주무시고 계신 게 아닌가. 재희일 때 자주 봤던 광경이지만, 윤하가 되고 나서 근 1년만에 보는 상황이라 뭔가 감회가 새로웠다. 그나저나 이분들, 키는 다 우주만큼 크신데... 자는모습은 참 귀여웠다. 물론 우주도 잘때는 귀여운 걸 보면 유전은 유전인가보다.
우주네 부모님이 거실에서 주무시는 통에 DS3는 못했지만, 그래도 조용히 차를 마시며 부엌에서 시험 공부를 하며 수다를 나누는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몇시간이 지났을까, 저녁때가 되서야 우주 부모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얘는... 봤으면 좀 깨우지 윤하도 데려다 놓고는 그냥 보고 있니..."
거실에 자리잡아서 DS3를 꺼내는데 아주머니가 부끄러우셨는지 우주의 등을 팡 치며 말씀하셨다. 재희일 때 왔을때는 아무렇지도 않으셨는데, 내가 여자라서 그런지 많이 부끄러워하셨다. 잠깐, 그런데 왜 부끄러워하시는거지? 혹시 날 우주의 여자친구라고 착각하신 건가?!
"뭐 어때서 그러시지... 흐뭇한데. 그렇지 윤하야?"
"으응, 그러니까."
그런데 어째 부엌으로 가시면서 나를 보시더니 빙긋 웃으시는게... 어쩐지 나의 걱정이 현실로 다가온 듯 했다. 게다가 부엌에서 우주 아버지랑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자꾸 나를 힐끔힐끔 보시는게, 내가 생각한게 맞다는 확신을 마구마구 주고 있었다.
그렇게 재희의 스트레스 없이 우주 집에서 저녁까지 먹었는데, 확실히 집에 있는 것보다 몇 배는 마음이 편한게 느껴질 정도였다. 엄마 아빠껜 죄송하지만... 이게 다 재희 때문이다.
귀가하려고 현관을 나서는데, 우주 어머니가 부랴부랴 달려오셔서는 내게 귓속말로 속닥이셨다. 마침 우주는 내게 줄 케잌을 가지러 가고 없었다.
"우주랑 늘 친하게 지내줘서 고맙구나. 친구라고는 재희밖에 없던 애가 요즘들어 여자앨 집에 데려오질 않나, 많이 변한것 같아. 우주한테 물어보니까 윤하 네 덕이라고 하던데..."
아 제 덕 말씀이신가요? 이상하네요 전 그저 힘들때 우주에게 몇 번 기대고 요새 좀 같이 놀아줬을 뿐인데 우주가 갑자기 성격이 바뀌더니 애가 이상해졌어요. 전 진짜, 정말로 우주에게 맹세코 어떤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답니다 어머니.
아... 우주가 오해할만한 짓은 좀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여튼, 앞으로도 우리 우주 잘 부탁한다? 담에 또 봐."
그 말을 남기시고는 우주 어머니는 우주의 눈치를 살피시더니 몰래 안방으로 쏙 들어가버리셨는데, 그 눈치를 살피시는 모습이 귀여우셨다.
바로 우주가 달려와서 케잌을 전해주고는, '엄마가 무슨 이상한 말 안했냐'며 물어봤지만 난 여자대 여자로써 아무 말 안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별일 없었다고 단언하자, 우주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더니 조용히 내게 말했다.
"혹시.. 우리집에서 기말고사 공부 같이 할 생각 없어 윤하야?"
공부? 아! 그러고보니 재희녀석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어때? 엄마아빠한테 얘기했더니 대찬성하시던데. 무슨 꿍꿍이속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런 제안에 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재희 녀석도 공부하라고 말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집에서 재희에게 스트레스 받으며 하긴 싫었던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내일부터 당장 하지 뭐. 안그래도 도서관에 자리도 없고 하니까."
내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거실쪽에서 이상한 시선이 느껴졌고, 재빨리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뭔가 조금 꺼림칙한 기분...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