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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26화 (26/188)

26화

그나저나 내가 분명 방문을 잠궈놓고 열어 준 적이 없는데, 어째서 이녀석은 자연스럽게 방안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

"왜 멋대로 들어오고 난리야?"

그래서, 이유없이 이런 시비조에 짜증섞인 말을 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뭐 사실 내가 이렇게 재희에게 까칠하게 된 이유는 직접적으로 테마파크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지만... 지금 내 머리를 강타하는 두통 또한 그 이유중 하나였다.

"뭐?"

그런 식으로 나에게서 짜증 섞인 말만 나가다 보니, 돌아오는 재희의 반응도 까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너가 안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밖까지 들리더라! 그래서 들어왔다 왜?"

그래도 녀석 말을 들어보니 나름 내가 걱정되서 스페어 키로 문을 열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 바람에 괜시리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뻔 했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재희의 만행을 떠올리며 괜시리 마음 약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어휴. 안되겠네, 이런 몸으로 오늘 등교는 무리겠어."

엄마가 바로 달려오셔서 날 간호하셨는데, 열이 펄펄 난다고 안절부절하셨다. 재희녀석은 날 엄마에게 맡기고는 바로 등교해버려서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곧 시험이라서 수업 빠지면-"

"안돼."

곧 닥쳐올 1학기 기말고사를 위해 수업을 빼먹으면 안좋다는 핑계로 어떻게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안 따라줘서 1차적으로 무리였고, 2차적으로 엄마가 강력하게 제지하셔서 더더욱 무리였다.

젠장, 지금까지 아무런 잔병도 걸리지 않았던 윤하의 몸이 처음으로 무겁게 느껴졌다. 가장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졌던 곳은 머리였는데, 몸을 뒤척이며 기지개를 켜 봐도 머리가 아프니까 몸까지 뻐근한게 여간 짜증만 났다.

[뾰로롱]

입을 쩍 벌리고 눈을 퀭하게 뜬 채로 침대에 누워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데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발신자 : 나쁜놈]

[지각할까봐 급하게 가긴 했는데 몸은 좀 괜찮냐? 몸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그렇게 열이나냐? 난 그런적 한번도 없었는데]

아무래도 등교하는 도중에 보낸 모양이었다. 이 근원 없는 짜증때문에 답장해주기도 싫었지만, 아침에 그렇게 까탈스럽게 구는 와중에도 날 챙겨주려고 했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라서 최대한 감정이 안 실린 문자를 쓰려고 노력했다.

[답장]

[몰라. 지금 머리가 너무 아파서 공중에 붕 떠있는 느낌이야. 완전 짜증 지대로야]

그런데 계속해서 짜증을 부리는 나에게 돌아오는 재희의 반응은 정말 예상외였다. 그동안은 계속해서 나에게 성질만 내고 까칠하게 굴던 녀석이, 내가 짜증을 내고 있는데 마음써주는 듯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발신자 : 나쁜놈]

[헹- 그래가지고 기말고사나 제대로 볼 수 있겠냐. 문잠궈놓고 방콕 하니까 그렇게 병이 나지]

물론 마음 써주는 거라고 해도 약간은 삐뚤어진 까칠함에 가려져 있지만 난 알아볼 수 있었다. 녀석이 지금 자기 성질 죽이고 최대한 신경써주고 있다는 것을.

[답장]

[흥 걱정 마셔! 시험 걱정은 없으니까. 그나저나 지각하는거...

그런 녀석의 마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답장을 쓰다가, 난 문득 뭔가 생각이 나서 황급히 문자를 지워버렸다. 분명 한 달 전에 다시 마음먹은건데 벌써 까먹어버린건가 하고 머리에 꿀밤을 꽁 때렸다.

'내가 신경써줘서 뭐할거야. 그놈은 머리속에 온통 가희뿐인데.'

그래도 녀석의 문자를 씹어버리기엔 좀 뭐했으므로 말을 좀 바꿔서 보내놓고 딱 끊기로 했다. 그래 역시 살짝 까칠하게 나가는 편이 상대하기 편하단 말이지.

[답장]

[내가 너냐? 너 중간고사때처럼 시험 망치기만 해봐, 나 잘거니까 문자 그만 보내고!]

그렇게 문자를 보내놓고 나니 뭔가 잊고 있었던게 떠올라버렸다.

"잠깐. 그러고보니 기말고사때 재희녀석 공부시켜야 하는데..."

물론 점수가 많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만, 늘 상위권이었던 내 점수를 재희가 평균 8점이상 깎아버린 탓에 부모님과의 마찰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좀 극성이기도 하셨던게, 성적을 보시고는 재희를 붙잡고 무슨일 있냐, 가희랑 문제 생겼냐 등등 꼬박 1시간동안이나 녀석을 괴롭히셨기 때문이었다.

뭐 그놈이 성적 떨어진게 가희랑 연애질 하느라 떨어진 것은 맞지만 애초에 중학교 때 그렇게 성적이 우수했던 놈이 저렇게 연애한다고 갑자기 떨어지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나야 뭐 여전히 잘하고 있으니, 저번과 비슷한 성적이 나와버리면 피곤해질 재희에게 기말고사 공부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던 건 내 쪽이었다. 뭐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저녁에 재희가 돌아오면 다시 물어보기로 했다.

'일단 자야지... 머리 너무 아프네.'

머리가 지끈거려 두통약 한 알을 집어삼킨 지 얼마 뒤, 난 곧 잠이 들었다.

*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문 밖에서 나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잠이 깬 나는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그래도 여전히 열이 좀 남아있었고, 남아있는 두통도 좀 있었기에 멀쩡한 상태라기보단 약한 감기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보니, 익숙한 사람이 여러명 앉아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은 늘 오던 3명 뿐만 아니라 추가적으로 여러 사람이 더 있었다.

"어? 윤하야 일어났구나!"

"엥?"

그 추가된 사람 중 한명은 나에게 달려와서 가볍게 포옹을 하더니 이마에 손을 짚어보더니 열이 많이 난다며 걱정스런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은주 너가 여기 왜 있어?!"

그녀는 바로 양은주. 육상대회에서 내가 대타로 뛰어준 것을 계기로 친해진 우리 반 클래스메이트 중 한명이었다. 물론 체육대회 때 급하게 친해진 탓에 거의 한달이 지났지만 제대로 놀아 본 기억은 그닥 없었다. 뭐 그래도 가끔 밥도 같이 먹고 매점도 같이 다니면서 친분을 쌓다 보니, 오늘 이렇게 우리 집으로 병문안까지 와 준 것 같다.

보아하니 은주 말고도 은주와 친한 두명의 친구들이 더 있었는데,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친한 아이들은 아니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한명은 연극부에서 정말로 재밌는 대본만 쓴다는 각본 담당인 방다혜, 다른 한명은 양식연구부의 최고 셰프라고 불릴 정도의 요리 전문가 이나연이었다.

"왜있긴, 친구 아프대서 병문안 왔는데. 서운하게 그러기야?"

"아, 아니 미안, 그런 뜻이 아니라..."

은주는 날 데리고 가더니 자신들이 앉아 있었던 테이블의 가운데 자리에 앉혀주었다. 그리고는 내 왼쪽에 딱 앉았는데 서있을 때도 그렇고 앉아있을 때도 그렇고... 큰 키가 많이 신경쓰였다. 무슨 남자애가 옆에 앉아 있는 기분이네 이거.

육상 스페셜리스트 은주를 소개하자면, 키는 174cm정도로 여자애들중에서는 상당히 큰 편에 속했다. 육상하는 소녀라서 그런지 온 몸 구석구석 숨은 골격근의 영향으로 굉장히 탄탄한 몸을 자랑했다. 게다가 단발머리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미소년같은 느낌을 풍기는 덕분에 여자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굉장히 많았는데, 개중에는 직접 찾아와서 편지나 먹을거리를 전해주고 가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여담으로는 힘이 우리 학교 여학생들중에는 Top 5안에 든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세다고...

"그나저나.. 은주야 무겁거든!"

"어머, 무거워?"

내 옆에 앉아서 내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고 기대고 있는 그녀 덕분에, 안그래도 몸이 비리비리한 상태인 나는 점점점 은주의 반대쪽으로 기울기 시작햇다.

참고로 이런 힘세고 멋진(?) 은주에게 좀 오해를 증폭시킬만한 버릇이 조금 있었으니,

"그래도 열이 펄펄 나서 찌푸린 표정의 윤하가 너무 귀여운걸!!"

바로- 음? 컥!... 으아... 잠깐, 잠깐!!! 은주야 숨막혀!!

"워, 워! 은주야 팔에 힘 풀어!"

가희와 우주가 말린 덕에 은주의 헤드락에서는 벗어났지만, 솔직히 말해서 정말 무시무시한 목조르기였다. 졸려본 사람만이 안다는 그녀의 헤드락은 그녀에게 호감이 있는 여학생은 물론 남학생들까지 겁먹게 만드는 유명한 기술이었으니까. 본인은 정말로 가볍게 안아주는 거라고 하지만 한번 걸리면 숨막히고 가슴이 답답한 굉장한 기술이다...

"드허... 죽는줄 알았다..."

간신히 은주를 떼어내고 나서 난 자리를 약간 왼쪽으로 옮겨 우주 쪽으로 앉았다. 왠지 이쪽으로 도망가지 않으면 또한번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은주가 가지말라는 듯한 눈빛을 마구마구 쏘아보냈지만 간신히 손으로 휘휘 쳐냈다.

'그나저나 은주 녀석... 왜이렇게 갑자기 들러붙는담!'

안그래도 머리가 조금 아팠는데, 뭔가 평소와는 다른 은주의 상대를 하자니 그것도 나름대로 힘들었다. 옛 기억을 얼추 더듬어보니 약간 이전의 가희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게 그거 나름대로 좀 불안하기도 했다.

"암튼 와줘서 너무 고마워. 다혜랑 나연이도."

일단 와줘서 고맙다는 말은 했어도 아직은 은주 친구들이랑 어색해서 쉽사리 말을 붙이지는 못하는 나와 달리, 재희녀석들은 내가 자고 있었던 그 잠깐 사이에 금방 친해진 모양이었다. 나도 학교가면 새로 사귄 친구들과 좀 친해져 봐야겠군...

여튼 병문안 와준 친구들 덕분에 저녁을 두통에서 좀 벗어나 편하게 보내고 나니 어느새 늦은 밤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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