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다음날 뭔가가 내 뺨을 간지르는 것 같은 느낌에 난 잠에서 깼다. 정신이 든 난 눈부터 번쩍 떴는데, 이 눈 앞으로 보이는 광경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 야, 야!"
"우왓! 자, 잘 잤어?"
뭐가 내 뺨을 건드리나 했더니, 우주가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가까운 거리에서. 내가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뒤로 슬금슬금 도망가자 우주 역시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침대 위로 올라와 슬금슬금 기어왔다.
"자, 잠깐 잠깐. 왜이래 너!"
지금까지 공주 대접을 해주긴 했다지만, 이런 예상치못한 접근이나 스킨십 같은 것은 없었기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던 나는 당황함에 얼굴이 붉어진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내 등이 벽에 딱 붙어서 더이상 뒤로 갈 공간이 없어지자, 우주도 더이상 다가오는 것을 멈추었다.
"미안. 자는 모습이 진짜 너무 예뻐서... 잠깐 정신 팔았더니 자연스럽게 손이."
녀석은 머쓱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러지마! 네가 부끄러워하는 모습 본적도 없는데... 귀엽다는 생각이 들잖아!
"아.. 암튼 어제 밤에 에어컨 고마워. 덕분에 시원하게 잤어."
나는 머리속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여자의 마음인 '쓰다듬고 싶어! 내 앞에 이 귀여운 녀석을 쓰다듬고 싶어!'를 간신히 짓누르며 일어났다. 이불을 개는 날 보며 우주는 방긋 웃어보이며 말했다.
"별 말씀을, 오히려 윤하 네 이불 덕분에 나도 감기 안 걸리고 잘 잤는걸."
그건 당연한 거지 요 녀석아. 그러게 누가 좀비처럼 거기서 에어컨리모컨을 손에 든 채로 자고 있으랬더냐.
'오랜만에 놀러온 우주 집인데... 역시 마음이 굉장히 편하군.'
뭔가 예전에 동성 친구일 때와는 다르게 묘한 감정들이 모락모락 피어나는게 느껴지긴 했으나, 난 죽어도 우주는 친구일 뿐이라는 생각 뿐이었으므로 오늘 아침의 이 해프닝도 크게 신경쓰진 않았다. 하지만 친해질수록 우주가 내게 보이는 호감이 점점 커진다는 사실을 난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억지로 무마시키려 했던 걸지도...
그런데 그날 집에 돌아가자, 예상치 못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윤하!!"
토요일 대낮부터 내 이름을 부르며 언성을 높이는 이가 누구인고 하니, 바로 재희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보던 난 녀석의 방문에 화들짝 놀랐다.
"너, 이리 따라와."
녀석은 날 질질질 끌고는 자기방으로 데려가 침대 위에 털썩 앉혔다. 그리고 문을 닫은 녀석은 내 앞에 딱하니 서서 날 째려보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생각이 있어? 너 도대체 어쩔 생각으로 우주네 집에서 자고 온 거야?!"
뭐 때문에 그런가 했더니, 이분은 지금 내가 우주 집에서 자고 온게 엄청나게 불만인 모양이다. 물론 우주 혼자 있는 집에서 놀다 왔지만 부모님께는 가족들 다 있다고 걱정 말라고 얘기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재희가 예상외의 엄청나게 고지식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뭐가 어때서? 거기 부모님들도 다 계셨고, 방도 따로 나눠서 잘 잤는데."
사실 같은 방에서 잤고 위험한 스킨십도 있었다는 건 숨기고 있었지만, 그게 이녀석이 이렇게 화를 낼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지는... 그도 그럴 것이 우주는 천상 늑대인 재희와는 다르게 이성적이고 사려깊은 남자이기 때문에, 절대 날 덮치치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일단 내 몸이고, 넌 여자인데 조심해야 될거 아냐!"
그렇게 따지면 넌 내 허락도 안 받고 내 몸에다가 멋대로 근육트레이닝 하고 있질 않나, 여자친구랑 러브러브 하고있지를 않나! 솔직히 난 최대한 이 윤하 몸에 나쁜 영향 안 미치도록 신경쓰고 있는데 말이지, 너가 더 심한거 아니냐 이거야.
"그럼, 넌 남자라서 조심 안해도 된다 이거야?!"
"지금 그 말 하는게 아니잖아!"
나도 순간 성질이 나서 소리지르며 맞받아치자, 녀석은 더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녀석의 말은 모순투성이었고 이기적이었다. 들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난 벌떡 일어나 녀석을 강하게 밀쳤다.
"시끄러워! 너한테는 그런 말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아!"
"와앗? 야! 너?!"
재희를 밀어 넘어트리고 나서 난 씩씩거리며 내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분노를 가득 담아 문을 세차게 '쾅!' 닫은 뒤 잠가버렸다. 밖에서 뒤따라온 재희가 당장 열라며 문을 계속 두드렸지만, 난 반응 하나 하지 않은 채 침대 위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녀석의 저 아니꼬운 태도 때문에 생긴 이 분노가 도무지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몸 바뀐지 몇달이나 지났고 돌아갈 수 있는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데 뭐 어쩌라고! 순전 지 생각밖에 안한다니까.'
그렇게 재희와 싸우고 나자 바로 생각나는건 우주의 얼굴이었다. 어떻게든 이 분노를 가라앉히고 싶었던 나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우주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
문을 잠근 채로 난 나가지 않았다. 물론 일요일에도 밤늦게 몰래 냉장고에 갔다올 때 빼고는 거의 방 안에 콕 박혀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재희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일요일에 재희는 한 6번 정도 문을 두드렸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아무 반응 없자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재희를 무시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기에, 난 학교에서 녀석과 어떻게 대화를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해야만 했다.
*
언제 잠든 지도 모른채 눈을 떴을 때, 내가 앉아 있는 곳은 내 방이 아니었다. 하나의 꿈이겠거니 하고 생각한 나는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라..? 차 안?'
앞좌석에서는 누군가가 운전을 하고 있었고, 난 뒷좌석에 앉아 곰인형 하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러나 시야가 어색한 것이 꼭 내 몸이 아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윤하야, 다왔다."
응? 잠깐 이 익숙한 목소리는...
"응."
차가 멈추자, 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몸이 저절로 움직이며 차에서 내렸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시야는 마치 어린아이의 몸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누구에 대한 꿈인지 생각하고 있는데, 앞좌석에서 내려서 돌아온 운전자가 다가오더니 내 손을 잡았다.
무심코 얼굴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아... 아저씨?!!'
나와 재희의 몸이 서로 바뀌게 만들고 외국으로 도망가버리신 아저씨가 꿈 속에 나타난 것이었다!
"여기 아빠 친구들이 살고 있어. 그러니까 아빠 외국 갔다 올 동안에 여기서 아저씨 아줌마랑 잘 지내고 있으면, 아빠가 다시 와서 우리 윤하 데리고 갈게. 알았지?"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익숙한 광경에 난 다시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봐도 내 앞에 있는 집은 우리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시점이 7살 때의 윤하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 너랑 같이 7살인 친구도 있으니까 사이좋게 지내야한다?"
"응..."
그 뒤 내가 본 것은 우리 부모님이었는데, 그 사이에 어린 시절의 나도 함께 있었다. 난 어린 시절의 윤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는데, 윤하가 바라보자 시선을 피하는 게, 꽤나 수줍었던 모양이다.
아니 잠깐 그런데 다 좋다 이거야. 왜 난 어릴적에 윤하를 본 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거지? 10년도 더 된 이야기긴 하지만, 집에 난데없이 모르는 여자애가 하나 와서 꽤 오랜 기간을 같이 살았었다면 분명 기억하고 있어야 정상일 텐데... 어째서 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고보니 처음 집에 찾아갔을 때 우리 부모님도 이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는데, 나만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잖아?
"잘 부탁한다 윤하야~."
"유나를 닮아서 진짜 예뻐졌네요. 애기일 때 보고 얼마만인지..."
그러고 나서 문득 내 뇌리를 스쳐간 생각이 있었다.
'윤하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윤하는 어릴 때 만난 것을 기억하고 나에게 접근해 아저씨가 우리 둘의 몸을 바꾸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윤하는 이렇게 바뀌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고, 실제로는 아저씨와 한패였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니 오한이 들었다.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 놈이 설마... 그랬을리가.'
나에게 가희의 일까지 솔직히 얘기해주었던 녀석이 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겠느냐고 생각하면서도 어째서인지 의구심은 자꾸만 내 마음을 좀먹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윤하야, 윤하야!"
'재희..?'
날 부르는 재희의 목소리에 난 문득 정신이 들었고, 꿈속 세계는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눈을 뜬 나의 앞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몸을 흔들고 있는 재희의 모습이 보였다.
"야, 너 괜찮아? 왜 그렇게 끙끙 앓고 그래?!"
힘들게 몸을 일으킨 뒤 재희를 바라보자 녀석은 안절부절하며 바쁘게 달려나가더니 체온계를 가지고 와서는 내 겨드랑이에 빠르게 꽂는게 아닌가.
"왜이렇게 열이 심하게 나지..."
이마에 손을 대 보더니 화들짝 놀라는 녀석의 모습에 꿈 속에서 들었던 의심은 순식간에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앓는 나를 챙기려고 드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어제 녀석의 행동이 떠오르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좀 일관성 있게 대하란 말이야...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