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5. 악몽, 그리고 삼각관계>
세상 여자들에게 공주 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냐고 물으면, 아마 대부분은 없다고 말할 것이다. 예로부터 공주는 전 세계 왕정국가의 권력자인 왕의 딸로 태어난 운 좋은 아가씨들의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의 금지옥엽같은 딸이라는 이유로 미녀이건 추녀이건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나라에 전란이나 큰 풍파가 닥치지 않는 한 진정한 아름다움과 여자다움, 우아함을 추구하며 뭇 여성들의 이상향이 되거나 때로는 놀림거리로 전락하기도 한다.
아무튼 장황하게 말했지만, 다시 말하면 공주 대접은 남자에게 너무나도 극진하게 대우받고 우대받는 편하면서 부담스러운 대접이라 이말씀.
"공주, 날 더운데 슬러시 한잔?"
문제는 내가 위에서 언급한 공주 대접을 요새 시도때도 없이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내 소꿉친구 나우주에게.
"난 딸기맛!"
4월에서 5월에서 넘어가던 그 때에, 간신히 가희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서부터 우주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상당히 많이 변했다. 무심하게 친구처럼 곁에 있던 관계였는데, 언제부턴가 호의적으로 대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 때문인지, 우주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많아지는 당연한 결과도 찾아왔다. 특히 그 행동의 변화의 정점을 찍은 것은 다름아닌 재희한테 바람맞고 우연히 커피숍에서 만난 직후였다.
"자, 내 하트를 갈아만든 슬러시."
그러나 그러한 행동엔 문제가 좀 있었다. 친구일 때는 전-혀 애교라고는 없었던 바로 그 나우주가 날 마치 자기 여자친구 대하듯 이상한 애교를 부리면서 극진히 대해줬기 때문이었다.
'제발.. 우주야 그런 농담은 삼가...'
물론 못보던 우주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게 재밌기도 했지만, 녀석의 그러한 농담들이 전부 나를 향해서 날아온다는 것이었다. 레이디 퍼스트나 매너를 중시하는 신사적 예의로 대우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면서도, 한편으론 농담으로 엄청난 부담을 주었다.
내가 만약 애초에 여자였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 본 적은 있다. 아마도 녀석의 극진한 대우에 마음을 뺏기고 사랑에 빠졌을 것이라는 게 내가 시뮬레이션 한 결과. 하지만 요새 들어 점점 어쩔 수 없이 여성스러워지곤 있으나 난 마음만은 긍지높은 사내아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의 이 끊임없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담담한 것이기도 했다.
"아 맞다. 혹시 오늘 우리집에서 놀기로 한거 허락 받았어?"
"아참. 그러고보니 그걸 잊고있었네, 바로 여쭤볼게."
공주 대접과 함께 우주 녀석의 집을 방문하는 횟수도 늘었다. 물론 한재희였을 때는 뻔질나게 들락날락했던 곳이 우주 집이지만, 요근래 윤하가 되고 나서는 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체육대회 끝나고 나서부터는 자연스럽게 귀가하다가 들리는 경우를 포함해 지금까지 최소 10번은 놀다왔다.
"네 아줌마, 윤하에요~."
그래도 이번 경우는 좀 특별하긴 했다. 여태까지는 늘상 한두 시간정도 있다 온 적이 고작이었지만, 내일이 놀토에다가 우주 부모님이 집을 비운다는 점을 십분 활용하여 밤에 영화도 보고 같이 DS3로 게임도 할 예정이었으니까. 하루 자고 올 거란 말씀!
"네! 네네. 음... 네 알았어요. 네... 헤~ 그럼..."
통화를 마치자 마자 우주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어때?"
사실 여자애 혼자 남자애 집에 간다는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리 부모님을 설득해야 하는데 한 말빨 하는 나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OK!"
내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자 우주가 기뻤는지 오른손을 뻗었다. 난 당연하다는 듯이 오른손을 내밀어 하이파이브 했다.
"자 그럼, 저녁에 먹을 것들 사러 가야지."
"공주의 특별 코스라니! 뭐든 맛있게 먹을게!"
예전과 달리 한층 수다스러워진 우주와 함께 시장으로 향하면서 난 입가에 미소가 그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나는 이것이 모두 우주에 대한 내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 채였다.
*
"와..."
영화가 끝났지만 난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본 영화인데다가, 꽤나 대작을 봐 버린 탓에 엄청난 스토리와 감동이 내 뇌리에 박혀 떠나지를 않았다.
"이거, 진짜 생각보다 정말 재밌었어."
"그러게. 하여간 인터넷 평점은 믿을게 못된다니까."
정신없이 영화만 보면서 달린지 4시간째, 어느새 시간은 이미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녁먹고 나서 두편의 영화를 봤는데 하나같이 끝내주는 것들이라서 그런지 너무 몰입한 모양이다.
"벌써 11시네. 혹시 배 안고파?"
"저녁을 그렇게 먹었는데... 배가고프네. 야식 먹고 싶은걸."
"만들까?"
우주는 잔에 담긴 주스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고? 지금 이건 기적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우주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내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알 길이 없겠지만, 이런식으로 센스있게 유행어로 반응을 해 올 애가 아니었는데... 정말 장족의 발전을 했구나 너.
난 정말로 자랑스럽고 뿌듯한 표정으로 우주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치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이 아니었나 싶다. 그 아들놈의 뒷모습이 얼마나 듬직했는지달려가서 안기고 싶은-
'-건 아니지, 아냐. 안그래도 호르몬이 날 괴롭히는데 이런 생각을 자꾸 하면 모성애가 강해지고 그러다가 진짜 여자가 되버릴지도.'
쓸데없는 생각을 날려버리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난 바삐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한시간 쯤 뒤 야식도 배불리 해치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DS3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내기 상품은 영화관에서 영화 보여주기 쿠폰이었는데, 영화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에게 이 상품은 폭풍과도 같은 전의를 불태우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우오오오오오오옷!!!"
"으와앗?!"
그날 우주는 나의 '청권(靑拳)'실력에 놀랐을 뿐더러 덤으로 영화 관람권도 5개나 잃게되었다. 짜식, 내가 그래도 아직 오락 실력은 죽지 않았단 말이지.
그렇게 영화 관람권을 잃고 나서 우주는 큰 좌절감에 빠졌는지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런 우주를 달래는 것 역시 내 몫이었기에, 난 냉장고에서 음료수 캔을 꺼내서 기운없이 소파에 걸터앉아 있는 우주에게 다가갔다.
"설마 여자한테 지고 실의에 빠져있는건 아니지?"
우주는 내가 다가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내가 뒤에서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눈을 동그랗게 뜬 녀석은 내가 건네주는 캔음료를 받아들고는 원샷했다.
"설마 그렇게 청권을 잘할줄은... 너무 과소평가했나봐."
"음하하하. 사실 내가 이래보여도 비디오게임에 흥미가 좀 있소이다. 우주 경?"
우주의 기운을 복돋아주며 녀석 옆에 앉아서 주스를 홀짝이던 나는 급격히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느끼고, 우주에게 말했다.
"아움. 그나저나 슬슬 자야겠다."
"그럴까?"
시계를 봤더니 벌써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쩐지 엄청 피곤하더라니만... 난 컵의 남은 주스를 한입에 털어넣고 거실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와 접시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내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DS3을 치우면서 우주가 아쉬운 듯 말했다.
"공주, 나중에 다시 도전해도 될까? 내가 정말 표가 아까워서 그런게 아니라 이정도의 상대를 처음 만나봐서 그래. 갑자기 승부욕이 마구마구 생기는거 있지."
짜식, 그래도 아쉽긴 했나보구나. 그래 얼마든지 덤벼라, 이 누님이 계속해서 상대해주지! 우주 너가 날 이기려면 아마 일년은 더 노력해야-
"내가 이상형이랑은 좀 다르지만... 어쩔 수 없지, 극복하는 수밖에."
-응? 난 순간적으로 지나간 우주의 혼잣말을 제대로 듣진 못했다. 하지만 혼잣말 치고는 나름 소리가 컸기 때문에 들렸던 단어들 때문에 난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우주야 방금 뭐라고..."
하지만 내가 뒤를 돌아봤을 때엔, 이미 우주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아마 자기 방으로 갔겠거니 생각하고, 난 설거지를 마저 하고 나서 미리 준비했던 파자마로 갈아입고 우주네 부모님이 부재중이신 안방으로 들어갔다.
"으아음~ 완전 피곤하다. 내일은 집에 가서 뭘 할까나..."
감촉이 부드러운 실크 이불을 사르륵 덮은 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앞을 바라본 나는 어둠속에서 뭔가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너무 놀라서 소리지를 뻔 했지만, 자세히 바라보니 그것의 정체는 다름아닌 우주였다.
"깜짝이야... 너 거기서 뭐해?"
아는 사람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방 안에 한창때의 소녀1과 소년1이 같이 있는 상황임을 이해한 나는 소녀1의 입장에서 굉장히 조심해야함을 감지했다.
그러나 내가 불렀는데도 한참동안이나 우주는 대답이 없이 방바닥에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나는 조심스레 이불에서 기어나와 우주에게 향했다.
"우주야..?"
알수없는 한기로 온몸에 오한이 이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 한기는 긴장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었고,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때문이었다.
"어라? 에어컨 바람?"
그 생각이 들자 내 눈에 우주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에어컨 리모컨이네.'
녀석, 피곤했지만 내가 시원하게 자길 바랬는지 내가 잘 방에 에어컨까지 틀고 정신을 놓은게 분명했다. 자기 몸도 못 가눌 정도로 피곤했으면 그냥 가서 자지.. 끝까지 공주 대접 해줘서 고맙긴 하지만.
"감기 걸리겠다 이 바보야."
옆방에서 우주의 이불과 베개를 가져와서 우주를 잘 눕힌 뒤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 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잘자. 오늘 너무 재밌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