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대략 1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메인 롤러코스터를 타고 나니, 겨우 놀이기구 하나 탔는데도 기다린 시간이 너무 길어 즐거우면서도 피곤함이 컸다.
이 놀이공원이 실내였기에 망정이지, 5월 중순인데도 뭔 날씨가 이렇게 푹푹 찌는지 이따 실외로 나갈 생각하니 벌써부터 땀이 흘렀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 다시 다음 놀이기구를 향해 걸어가는데 재희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줄 너무 길어어-!"
확실히, 내가 생각했던 여유로운 데이트와는 약간 거리가 먼 건 사실이었다. 좀더 여유롭고 재희와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는 그런 데이트를 원했었는데... 테마파크를 선택한 것이 실수였는지도 모르겠다. 놀이기구 하나 타는데 대기시간은 짧아야 30분이었고, 그런식으로 한 네댓개를 타고 나니 마치 행군이라도 하고온 마냥 다리가 무거웠다.
"배고파..."
어느덧 시간은 정오가 훌쩍 지난 오후 1시 경. 이제 메인이라고 부를 만한 놀이기구는 다 탔기 때문인지 슬슬 흥미가 떨어져 가는데, 재희가 배가 고프다며 벤치에 주저앉아버렸다.
"바보야, 일어나. 거기 앉아 있으면 어떻게 밥 먹으러 가려구."
내가 밥 얘기를 하기가 무섭게, 녀석은 벌떡 일어나서 내 앞에 서더니 저 멀리 보이는 식당가를 향해 앞장서는게 아닌가. 오늘따라 굉장히 단순함의 극치를 달리는 녀석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서 재희가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나에게 얘기했다. 오늘 아침의 그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녀석은 많이 편해진 듯 했다.
"그래도 이정도면 충분히 타지 않았어? 솔직히 말해서 여기에선 우리가 탄 것 말고는 그렇게 재밌다고 할 만한 건 없잖아."
"그렇지 뭐. 음... 그래도 여기저기 더 가보고 싶은데."
내가 아직 미련이 덜 가셨음을 안 재희는 기겁을 했다. 여기서 내가 한 마디만 더 했다간 바로 목표를 향해 따라가야만 하는 노예의 입장이다 보니, 내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급격히 또 말수가 줄기 시작했다.
"...어디?"
지금 보고 싶은건 딱 하나. 저녁에 있을 퍼레이드 뿐이었다. 앞으론 딱히 엄청 타고 싶은 어트랙션은 없었기에 대충 보이는대로 타고 게임장이나 들어가서 놀던가 하면서 저녁까지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별건 아니구. 저녁에 있을 퍼레이드 있잖아, 그거만 보고 가자."
말을 꺼내자마자 재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정색을 하면 내가 뭐가 되니, 그래서 나도 질수 없어서 네 눈을 노려보고 있지만.
"흠... 그... 있잖아."
내 노려보는 눈길에 부담을 느꼈는지 결국 한발 물러선 것은 재희였다. 다시 부탁조로 돌변한 재희의 말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쉽게 놔줄 수가 없단 말야, 오늘 하루는 내 소유니까. 그리고 네가 어딜 가고 싶어서 나에게 이렇게 애절하게 부탁하는지도 알고 있고.
"제발 5시 전에는 보내주라. 대신 다른 약속이라도 들어줄테니까... 부탁해!"
뭐 애초에 내 생각해서 따라온 건 아니란 건 알았지만, 스스로 약속해서 맺은 노예 관계였기에 나도 쿨하게 녀석을 보내주기엔 참으로 난처했다. 사랑으로는 보지 않기로 맹세한 사이나 다름없었으니 내가 안 보내주고 억지로 잡고 있는것도 나름대로 이상한 모양새긴 했다. 뭐 내가 그동안 했던 말들을 생각하면 쿨하게 보내주는게 맞긴 할지도...
하지만 내 마음속 한구석의 무언가가 자꾸만 재희를 놓아주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이전에 겪었던 그 어떤 감정과 비슷한 감정이 자꾸만 억누르는 나의 힘을 뚫고 올라오려고 했다. 어쩔수 없이 난 선택해야만 했다.
"안돼."
침착하게 숨을 고른 뒤 말했지만, 그 순간에 난 재희를 바로 보지 못했다. 그대로 뒤로 돌아선 나는 화장실을 향해 걸어가며 녀석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거기 그대로 앉아 있어. 나 배 아파서 화장실 좀 다녀올테니까."
배 아파서 화장실을 간다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난 녀석에게 갈거면 지금 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재희라면 대충 알아들으리라 생각하고 난 녀석에게 도망갈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응"
그리고 입으로 터져나오려는 가슴의 응어리를 힘겹게 두 손으로 막은 채로, 난 급히 화장실로 뛰어갔다. 두 손을 모두 입을 막는 데 써버린 탓에 눈물을 훔칠 손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렇게 보내주는게 맞다고 되뇌이고,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마지막 데이트로, 난 녀석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했으며, 다신 미련따윈 갖지 않을 것이라고.
*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재희는 없었다. 진즉에 가버렸는지, 녀석이 있었던 자리엔 온기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변기 커버 위에 앉아 펑펑 눈물을 흘린 게 10분. 슬픈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15분. 망가진 화장을 다시 고치는데 15분. 재희 녀석이 제발 갔기를 바라며 시간을 10분동안 끌었다. 50분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밖으로 나와 내가 뒤늦게 확인한 건 아까전에 도착한 문자 한 통이었다..
[발신자 : 도둑놈]
[윤하야, 진짜, 진짜진짜진짜미안한데, 내가 다음에 소원 하나 들어줄 테니까 오늘은 이걸로 좀 봐주라.. 이따봐!]
문자를 보자마자 피식 웃음이 났다. 바보같이 이제와서 사과하고 있는 녀석의 문자를 보니 웃음이 나왔나보다.
"차라리 지금까지처럼 말도 없이 가 버리지 왜 문자는 남기고 난리래."
웬지 모르게 짜증이 나서 바로 문자를 삭제해버렸다. 그리고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있었던 재희 녀석의 이름을 그 즉시 바꿔버렸다.
[나쁜놈]
"그래. 네 이미지에는 도둑놈보단 이게 맞지.. 넌 이제부터 나쁜놈이다."
내가 지어놓고도 약간 우스웠다. 하지만 내가 여자라는 가정하에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의 녀석의 행동만 보자면 100% 굉장히 나쁜놈은 분명했다.
멍한 상태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생각을 하며 왔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집 근처 역에 내려서 지상으로 올라오니, 이미 하늘은 꽤 어두워져 있었다.
'기분이 꿀꿀해서 그런가... 커피생각나네.'
뭔가 찜찜한 기분에 난 자연스럽게 커피를 찾게 되었고, 무심결에 우주와 자주 갔었던 그 동네 커피숍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도 그 앞에서 지금 이 순간 너무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어라? 윤하야!"
우주였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우주가 떡하니 커피숍으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텔레파시라도 통했던 것인지, 운명의 장난으로 만나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쩐일이야..?"
"그러는 너야말로. 여긴 나랑 재희말고는 아무도 안 오는 곳인데.. 어떻게 찾아왔어?"
"아니, 여기 원래-"
지금 내가 윤하라는 사실을 순간 잊고 있었던 나는 무심결에 '자주 왔던 곳'이라고 우주에게 말해버릴 뻔 했다. 큰 실수를 저지를 뻔한 나는 멍한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
"원래?"
"아아, 아니. 원래 오던 곳이 오늘 문 닫아가지구... 어떻게 정처없이 해매다 보니 이리로 오게됬네. 하하하."
우주는 내가 이 커피숍에 오게 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했는지 정말 기뻐했다. 뭐랄까, 자신이 알고 있던 비밀 장소를 친한 친구에게 소개시켜주는 기분? 그런걸 느꼈던 모양이다.
"여기 애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엄청 좋아. 앞으로 가끔 같이 올래?"
그리고 녀석은 자기가 데이트 신청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나에게 말했다. 임마, 내가 남자가 아닌 이상 그건 데이트 신청이라고!
"흠.. 그럴까?"
하지만, 난 우주의 이 초대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반가웠다. 재희에게 버려진 서윤하는 우주에게 기대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사실... 내가 가던 커피숍이 아예 문 닫아서 어디로 가야될 지 모르고 있었거든. 마침 새로 찾던 중이니 잘 됐다."
자연스럽게 우주와 대부분의 행동을 함께 하게 되어버리면서 자연스럽게 우주의 초대에 응하게 되었다. 뭐, 돌이켜보면 재희가 가희와 노는 통에 난 몇달 전부터 우주랑 노는 일이 잦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 그럼 기념으로, 오늘 내가 커피 쏠게. 골라봐."
"정말?! 그럼 캬라멜라떼!"
앗차, 자연스럽게 양손으로 우주의 손을 잡아버렸군. 하지만 뭐 어때, 날 지켜주는 나의 수호천사 같은 나의 영원한 소꿉친구 우주에게 이건 자연스러운 행동인걸.
이왕 이렇게 된거, 재희와의 관계는 이제 완전 안녕이다. 오늘도 내 마음 한구석의 미연 때문에 당해버렸지만, 이제 깨끗히 못 박고 포기하기로 완전히 마음을 먹었다. 그를 아끼는 만큼, 나는 그의 행복을 빌며 포기하는 것이라고.
'사랑하니까 포기했다. 그렇지?'
나에게 씨익 웃어보이는 우주의 웃음에 화답하여, 나 역시 얼굴에 방그레 미소가 번졌다.
<4.사랑하니까, 포기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