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돌아온 토요일, 재희는 체육대회의 종료와 함께 얻은 근육통으로 인해 오전 10시가 되도록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수, 목, 금... 3일이나 넘게 회복의 기간이 지났다만, 이녀석 뭔가 엄살이 굉장히 심해졌다.
"야~ 한재희~"
생각해보니 이건 참 이례적인 일이었다. 언제나 주말만 되면 이 의욕이 흘러 넘치던 한재희는 새벽 6시부터 벌떡 일어나 조깅이며 아침 체조며 오전 운동이란 운동은 모두 섭렵하고 나서, 9시에 간신히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하품하고 있을 나와 마주치는게 정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한재희가 이불 속에서 나올 생각을 하질 않고 있었다.
여유롭게 부엌에서 직접 구운 토스트에 잼을 바르며 나는 거듭 재희를 불렀다. 녀석을 위해 구워 둔 토스트가 차갑게 식어가는게 아까웠을 뿐더러, 녀석은 나에게 지켜야 할 약속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재희는 들은 척도 안하고 기척도 내지 않았다.
결국 내가 재희의 방으로 가서 녀석의 옆구리에 만화책 보고 배운 지건(육식)을 마구 꽂아대자 녀석은 꿈틀꿈틀 이불에서 기어나왔다.
"끄으- 아파!!"
재희는 엄청난 근육통이 몰려왔는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훗, 그렇다고 마음 약해질 내가 아니었기에 난 거듭 지건을 날리기 시작했다. 녀석은 힘들게 허리를 돌려가며 내 지건을 피하려 노력했지만 근육통에 휩싸인 몸으로는 무리였는지, 나중에는 부디 선처해달라고 온몸을 내게 바치는(?)듯한 자세를 보였다.
"미안, 미안!! 미안해. 그니까 제발 그만 찔러! 너무 아파!!"
끝내 무릎을 꿇으며 나에게 사정사정하는 녀석. 그래 진즉에 이런 모습을 보였어야지 이눔아. 난 그제서야 정색하던 표정을 풀고 녀석에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이제 나에게 복종할 마음이 조금 생겼어? 주말 노예 한재희."
"... 끙."
재희는 머리를 북북 긁더니 올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직접 약속한 것이라 이제와서 되돌릴 수도 없는 아주 강력한 노예계약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물론 구두로만 되있던 약속이긴 했지만, 재희도 그때 억지부린게 미안해서인지 이제와서 잡아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잠깐. 일단 좀 씻고 와서 하면 안될까? 머리가 너무 가려워."
뜬금없는 부탁이었지만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으로 흔쾌히 재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녀석은 재빨리 나를 방에서 내보내더니 속옷과 수건을 챙겨서는 화장실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러나 화장실의 문이 닫힘과 동시에 밀려오는 알수없는 불안감에 난 5분만에 화장실 문 앞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번, 두번, 세번. 이내 5번까지 두드리고 나서도 반응이 없자 난 바로 문고리를 비틀었다. 벌컥 하고 힘없이 열리는 문과, 열려있는 화장실의 바깥창을 보며 난 한숨을 쉬었다. 바구니에는 방금 주인을 잃은 속옷과 수건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세상에... 한재희!!!!"
*
그로부터 4시간 뒤 우주의 집에서 기적적으로 재희를 다시 붙잡은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폭풍설교를 시작했다. 꿀먹은 벙어리마냥 나의 잔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던 재희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이 녀석이 쿨하게 노예의 운명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는 이미 시간을 꽤나 잡아먹은 상태라 어쩔수없이 마지막 칼을 빼들 수 밖에 없었다.
"너, 만약 약속 지키지 않으면 나에게 노예계약했다는 사실을 가희에게 말해버리는 수가 있어!"
역시 효과는 끝내줬다. 이 단순한 재희 녀석은 가희 관련된 것으로 협박하면 얼마든지 이용해먹을 수 있는데, 단지 착한 내가 봐주고 있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비굴한 표정으로 나에게 매달리는 재희를 바라보며 '바로 이거지!'하는 생각과 함께 난 바로 여왕님 모드로 돌변했다.
"그래, 그래야지. 이제 좀 내 말 들을 마음이 생겼어?"
"하아... 맘대로 해. 도망다니는 것도 이제 지친다."
실컷 4시간도 넘게 도망치다가 잡힌 녀석이 하는 말 하고는. 이렇게 잡혀서 약속을 들어줄 거였으면 뭣하러 도망갔었니. 뭐 여튼, 일단 잡힌데다가 약점까지 덤으로 잡혔으니까 재희를 오늘내일 부리는 데에 어려움은 이제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까 집에서 보내고..."
간단히 노예처럼 부리며 이틀간을 보낼 거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고생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난 재희가 약속했던 체육대회의 그 날 부터 쭈욱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포기한 지 오래였지만 내 마음 한 구석의 윤하의 잔재가 남아서인지 녀석의 의중을 떠보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내일은 잠실 테마파크에 가는거야."
그래서 생각한 게 미련처럼 남아버린 윤하의 잔재를 없애버리기 위한 마지막 데이트.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이면 나도 그녀를 깔끔하게 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기에 떠오른 발상이었다.
"싫어! 아무리 내가 노예계약을 했다 해도 내일은 안된다구!!"
그러나 그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녀석은 노발대발하며 반발하기 시작했다. 노예주제에 원하는것도 많고 따지는것도 많고 하기싫은 것도 엄청나게 많다니까!
"어째서? 너 분명 네 입으로 맘대로 부리라고 해 놓고서 이제와서 딴소리지?"
나도 이쯤 되니 슬슬 열이 받았다. 남자가 되가지고 자기가 한 말은 끝까지 지켜야 될 거 아니냐 이거다! 설마 원래 여자였다고 지키기 싫다는건 아니지? 암튼 넌 세치 혀로 구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지금, 천냥빛은 못 갚을 망정.
"하지만... 난 집에서만 시킬 줄 알고 말한거지! 밖으로 나가는 것 까지는 생각 못했단말야!"
또 변명, 진절머리가 난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 변명 듣는것도 지겹다."
재희는 살짝 놀랐는지 뒤로 주춤 하더니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고, 나는 쉴 틈 없이 재희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내일 밤 24시까지는 무조건 내 말에 따르기로 약속해. 안그러면 나 아까 말한대로 진짜 가희한테 전부 일러버릴거야!"
"자..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는 해줘야-."
끝끝내 어떻게는 무마시키려는 녀석의 말을 어떻게든 귓등으로 흘려버린 뒤, 난 자연스럽게 재희에게 명령했다.
"자, 재희야. 일단 버스킹라빈스 가서 아이스크림 좀 사올래?"
"잠깐, 잠깐만!"
난 메모지에다가 목록을 써서 재희에게 넘겨준 뒤, 유유히 거실을 빠져나와 내 방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재희는 어쩔 줄 몰라하며 내 뒤를 졸졸 쫓아와서는 나에게 사정사정해가며 부탁하기 시작했다.
"제발. 내일 말고 내일 모레면 시키는 거 뭐든 다 할테니까, 제발 내일 테마파크만은 좀 취소해주면 안될까? 부탁해..."
솔직히 말해서 난 이녀석이 취소해달라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뻔하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약속이 있어서 테마파크를 못 간다면 당연히 한 사람밖에 없지 않겠는가.
'가희.'
하지만 늘상 양보했던 나지만 이번만은 양보 안할거야. 나에게 있어 이 데이트는 윤하를 포기하기위한 최후의 보루였으니까.
"... 안돼. 이번만은 양보못해.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꼭 준비해!!"
그 말을 끝으로 난 내 방에서 재희를 쫓아냈다.
*
다음날, 입이 완전히 튀어나온 재희는 그래도 꾸역꾸역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난 드디어 녀석을 굴복시켰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 준비 끝. 어서 가자!"
"... 기둘려. 아직 다 안 끝났다고."
완전 저기압인 재희를 끌고 나온 나는,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며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워 보려고 애썼다. 그래도 마지막 데이트인데... 이렇게 꽁해가지고서 끝낼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어둡던 재희도, 내가 계속 밝은 쪽으로 유도하니 어느샌가 마음을 고쳐먹은 듯 약간은 얼굴색이 바뀌어 있었다.
"이왕 나온거 즐겁게 놀다 가야지, 안그래? 그리고 내가 어제 딱히 시킨 것도 없었잖아?"
녀석은 여전히 내 말에 대꾸는 하지 않고 있었으나,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는 성의는 보여주었다. 영원히 말도 안할 줄 알았더니, 테마파크에 도착할 즈음엔 가벼운 대화도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들게 재희를 끌고 도착한 테마파크는 일요일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사람으로 가득했다. 매표소부터 길게 늘어진 줄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놀이기구 대기열로 여기저기 뻗어 있었다.
"오전시간인데 왜이리 많아..!"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간신히 뚫고 온 매표소를 지나 멍하니니 서있는데, 재희가 내 팔을 잡아 이끌었다.
"바보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어, 엉."
난 몸에 힘을 풀고 가볍게 녀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