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그 말을 듣는 순간 녀석에게 다시 역으로 질문해 주고 싶었다. '내가 저번에 너 포기했다고 말한거 못 들었냐'고. 맘대로 부린다, 다시 말해서 주말 노예권을 주겠다는 이야기인데, 만약 내가 이 얘기를 너희 둘 포기하기 전에 들었다면 얼씨구나 하고 신나서 쓰려고 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그 날 완전히 포기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분명 재희를 포기한다고 말했는데, 어째서 재희는 다시금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걸까. 눈치껏 생각해보면 내가 도출해 낼 수 있는 결론은 달랑 한 개, 재희가 내가 아직 자기를 바라본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자식이 나한테 어장관리까지 할 생각을 하고 있는건가?'
난 곧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이런 무리수를 던져서까지 그녀석이 필사적으로 승부에 집착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어디, 내가 이 파격적인 모습으로 우리 학교에 큰 파장을 한 번 일으켜 주겠어. 나 한다면 한다는 여자야!
"선생님, 여기 왔어요."
뭐랄까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르겠으나, 재희가 데려온 날 위아래로 훑어보시던 담당 선생님은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셨다. 당사자인 내가 당황했던 걸 생각하면 뭐 이정도야 당황하는 축에도 못 끼겠지만 그래도 곤란했던 것만은 분명했다.
"윤하가 은주 대신 뛰는거니?"
"네. 시간없다고 해서 바삐 왔어요."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근처에 있던 선생님들께 의견을 여쭈어보신 다음 이런저런 얘길 나누신 뒤 나에게 다시 물어보셨다.
"설마 그 옷 입고 뛰려는거니? 흠.. 물론 시간이 없긴 하다만."
저도 정말 이 꼴로 뛰는 건 원하지 않았습니다만, 이 옆의 승부 집착증 멍청이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저도 이제 어떻게 되든지 상관 안하려구요. 하하하하...
"네.. 뭐 속바지 입어서 괜찮을거에요!"
내 확고한 대답에 선생님도 더이상 말릴 생각이 없어보이셨다. 우리 담임선생님도 근처의 선생님들 사이에 함께 계셨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날 보시며 처음엔 놀란 표졍이셨이잠 이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시더니 웃어보이셨다. 은주 대신 뛰어줘서 고맙다는 말 대신으로 하신 거겠지.
"그럼 윤하야, 화이팅! 우리반의 승리가 네 어깨에 달렸다."
재희는 오로지 우승밖에 안 보이는지 내 어깨에 손을 턱 얹고서는 기운을 복돋아주었다. 짜식아, 이래서야 기운이 안날래야 안날수가 있겠니, 열심히 할테니까 걱정 말고!
"걱정마, 난 이 몸만 믿고 달리는거니까."
녀석은 그 말을 듣더니 한번 씨익 웃어보이고는 다시 우리 반 자리로 달려갔다. 날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응원해 줄 지 기대하겠으.
난 천천히 몸을 푼 뒤 담당자에게 설명을 대강 듣고 우리 반임을 알리는 '1-2'가 적힌 작은 조끼를 입었다. 나를 포함해 4명의 우리 반 아이들과 화이팅을 한 번 한 뒤, 인솔자를 따라 내가 달려야 할 마지막 주자 구간으로 걸어가서 조용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다른 잡념에 방해받지 않게 정신을 집중하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이 몸을 최적화해서 달릴 수 있을지 명상하기 시작했다. 곧 첫번째 주자가 출발 라인에 섰고, 출발도 하기 전에 운동장을 빙 둘러싼 전교생들로부터 응원의 함성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그 순간만은 다른 세계에 가 있었다. 오로지 달릴 생각과, 주말에 재희를 어떻게 하면 최대한 괴롭힐 수 있을지 고민중이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재희에게 당한 걸 어떻게 복수해 줄지 생각해보니 웃음이 나면서 자연스레 긴장이 풀렸다. 후훗, 각오하거라 한재희.
- 팡! -
시작을 알리는 화약소리가 들려오고, 주변의 함성소리도 더더욱 높아져만 가기 시작했다. 계주는 학년별로 순위를 끊기 때문에 지금 달리고 있는 아이들은 1학년 10개반에 속한 총 10명의 아이들 중 절반인 5명 뿐이었다. 10명 중 3명만이 시간 순서로 순위에 들게 되기 때문에 굉장히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머지 친구들의 호흡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계주를 준비하던 애들 중 나 말고는 계속 연습하면서 호흡을 맞춰왔기 때문에 애들이나 나나, 가장 걱정되는 건 역시 나의 막판 스퍼트였다.
조금이라도 더 잘 달리기 위해서 하던 명상은, 두번째 주자가 세번째 주자에게 바톤을 넘겨줄 때 끝이 났다. 이제 200m 뒤면 내가 받아서 달려야 될 때가 다가온다. 어떻게 하면 빠른 터치를 하고 총알처럼 튀어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던 나는 반대쪽 레인을 보면서 터치법을 눈여겨 봤다.
터치하는 법이 완벽히 머릿속에 그려 질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반의 세번째 주자인 하경이가 나를 향해 달려오는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나는 어느정도 하경이 쪽으로 걸어간 뒤, 천천히 달리기에 시동을 걸었다. 우리반의 현재 순위는 3위, 그러나 선두 그룹인 3명이 모두 근거리에 위치해 있어 언제든지 역전은 가능했다.
머리속에서 계속 그리던 완벽한 바톤 터치를 하기 위해서, 나는 부드럽게 왼손을 하경이 쪽으로 뻗었고, 뒤를 바라보며 조금씩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윤하야! 뛰어!"
하경이가 온 힘을 다해서 뛰어와 나에게 바톤 터치를 해 주며 소리쳤다. 바톤을 받음과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이 날 짓눌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느낌에 풀이 죽거나 기가 죽어야 할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오로지 골을 바라보며 내 앞에서 달리고 있는 2명을 제끼는 것 뿐이었다.
"하아아아앗!!"
이 지경쯤 되니까 처음 주자들 모인 곳으로 걸어나갔을 때의 부끄러움은 온데간데 없고, 난 세렝게티 초원의 한 마리 치타처럼 골문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뭐 이런 몸이 다 있어?!
바람에 치마가 펄럭이는게 느껴졌다. 나의 엄청난 집중력 때문인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광활한 벌판에서 달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학생들의 응원소리, 새 소리, 차 소리 등등...모든 소리가 허공에서 흩날렸다.
그러다가 결승점이 눈앞에 다가오자, 나의 감각은 현실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나를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내 귀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서윤하! 서윤하!"
"윤하야 달려!!"
"조금 만 더!!"
하지만 그 40명이 넘는 목소리 중에서도 내 귀에 날아와 꽂히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직접 고개를 돌려 확인할 겨를이 없어 추측할 뿐이지만-
"공주!! 골이 눈앞이오!!"
-누군지 확실했다. 푸핫.
그 말 때문에 결승점에 다 와서 실수를 저지를 뻔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1등으로 골인에 성공했다. 골인과 동시에 지켜보던 반 아이들이 우르르르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선두엔 소리지르며 달려오는 재희가 있었다.
"1등이다!!"
이 몸을 믿고, 부끄러움을 감내하고 뛴 덕분에 난 1등이라는 결과물을 받아들고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숨이 차서 아직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나는 겨우겨우 숨을 고른 뒤 외쳤다.
"이겼다!!"
반 아이들이 날 들쳐메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고 근처에서 우승한 치어걸을 찍으러 온 교내신문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들렸다. 우승했다는 사실만이 내 머리속에 가득이라, 반 친구들 모두를 얼싸안고 폴짝 폴짝 뛰었다.
"흠, 흠. 윤하야, 잠깐만."
"응? 흐억!"
어머나 세상에, 난 마지막에 내가 안고 있던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황급히 뒤로 빠졌다. 나를 공주라고 부르는 요상한 소꿉친구 우주였다.
"미, 미안. 너무 신나서 그만..."
이 때의 반 아이들 표정을 묘사하자면... '그럼 그렇지~'였다. 마치 내가 우주에게 달려가서 안긴 게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들을 짓고 있어서 난 당황하고 말았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재희와 가희가 나를 보며 킥킥대는 게 보였다. 이 녀석들... 우주를 몰래 나한테 밀어붙인게 너희들이구나! 난 황급히 우주에게 사과하고 나서 두 사람에게 분노한 호랑이처럼 달려갔다.
"너희드을!!"
"우앗, 왜이래?!"
내가 달려들어 재희에게 정권지르기를 날리려는 걸 가희가 웃으면서 말렸고, 반 아이들도 그 모습을 보며 다같이 웃어댔다.
우리반은 대부분 종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우리를 추격해오는 1학년 5반을 8점 차로 따돌리며 학년 우승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아쉽게도 전학년 반별 점수에서는 15점 정도가 뒤져서 3위에 그쳤지만, 모두들 잘했다며 서로를 격려해주는 좋은 분위기에서 체육대회는 끝이 났다.
그날 저녁 담임선생님을 포함한 1학년 2반의 단합대회가 있었고, 은주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특히 부상으로 못 나가게 된 은주는 덕분에 잘 끝나서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나에게 예쁜 머리끈을 선물해주었는데, 나는 또 하나의 절친한 친구가 생긴 것에 즐거운 마음으로 자주 머리에 달아두기로 했다.
그리고 체육대회를 마무리하며 그날 밤 집에 돌아온 나는, 재희에게 미~리 선전포고를 했다. 최대한 누님 포스를 풍기는 야릇하고 시크한 표정으로 말이다.
"재희야, 이번 주 주말... 각오하렴?!"
"?!"
그날 밤 재희는 악몽을 꿨는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가슴에 얼굴을 대고 자고 있었다. 난 비명을 지르며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간신히 마음을 추스리고 녀석을 깨워 방으로 돌려보냈다. 악몽이 그렇게 무서웠으면 차라리 엄마한테 가지, 내가 엄마 대용도 아니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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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08 수정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