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체육대회라 함은 포근한 날씨의 5월 중순에 하는, 학교의 모든 인원이 참가하는 연례 행사 중 입학식과, 학생회장 선거 다음으로 오는 커다란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체육대회를 그닥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귀찮다고 분위기를 망치려 드는 학생들이 다수인 이유도 실제로 제대로 참여하는 학생이 소수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자발적으로 체육대회 추진위원회로 나선 재희의 행동은 굉장히 좋은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하는 수 없이 녀석의 억지로 하게됬지만, 준비를 하면서 나도모르게 보람과 성취감을 느낀건 사실이었으니깐. 덕분에 우리 네 명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졌지만, 그 사이에 있었던 중간고사 공부 때문에 우리는 며칠씩 밤을 꼬박 샐 수 밖에 없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육대회 당일 교문을 들어선 우리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잦은 밤샘으로 인해 다크서클이 진하게 번졌지만, 현수막이며 천막이며 모두 우리들의 손길이 닿은 것들이라 그런지 바라보기만 해도 감동적이었다.
당일은 하늘이 도왔는지 날씨도 화창했다. 이제 남은 건, 우리가 준비한 이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놀고 즐기는 것 뿐이었다.
"다시!!! 아자! 아자! 1학년 2반! 가자! 가자! 이기자!!"
"이기자!!"
체육대회 개최를 알리는 개회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운동장은 온통 응원소리로 가득했다. 게다가 우리반은 체육대회 추진위원도 부족해서 응원단장까지 맡은 재희가 이끄는 단체 응원때문에 더더욱 시끌벅적했다. 정말, 재희녀석 지치지도 않고 어떻게 저렇게 팔팔한지. 저렇게는 남자였던 나도 하기 힘들 것 같다.
"어이 거기 뭐해?! 응원부단장으로써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아냐!"
뒤쪽의 그늘에 잠깐 앉아 여자애들과 수다떨면서 다른 반 응원을 구경하던 나는, 응원단장인 재희가 화를 버럭 내면서 나를 부르는 바람에 황급히 반 아이들의 앞에 재희와 나란히 섰다. 재희가 부단장 자리를 떠맡겨버린 통에 친구들조차도 날 쉬게 두질 않았다...
"아.. 알았어."
사실 부단장 자리는 원래 가희가 서기로 되어있었지만 재희가 절대 안된다고 한사코 거부하는 통에 결국 우리반 아이들이 나로 합의하에 바꾼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재희의 고집에 급우들이 두손 두발 다 들어서, 결국 마지막에 거부하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박자에 맞춰 양 손을 흔들면서 준비한 안무를 함께 했다. 하지만... 하면 할수록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움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많은 사람 앞에 나와서 응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등과 허리, 배 노출이 많고, 장식이 화려하게 달린 치어걸 의상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래 이 옷 때문이야 옷!!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그래! 누가 본다고."
지금 너 포함해서 날 볼수있는 전교의 모든 남학생들이요, 이 화상아. 이 자식은 오로지 가희 때문에 이런 부끄러운 일을 나에게 떠밀어 버린게 분명했다. 반 친구들은 내가 치어걸 의상을 입었을 때의 모습 역시 기대되서 가희가 안되면 날 넣자고 했겠지만, 재희는 아니다. 이 녀석은 가희가 이 옷을 입고 모든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게 싫었던 것이다.
"1학년 2반 화이팅!!"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난 안무 끝에 화이팅이라고 소리지르자마자 후다다닥 뛰어 우주의 옆자리로 도망쳤다. 들어갈 때 재희가 '야, 어디가! 나 이제 달리기 하러 가야된단말야!' 하고 버럭 화를 내는걸 들었지만, 무시하고 녀석의 시야에서 숨어버렸다. 숨어봤자 치어걸 의상 때문에 곧바로 눈에 띄었겠지만, 재희도 미안했는지 억지로 끌고나오지는 못했다.
그렇게 계속 응원을 하다가 간신히 오후의 남는 시간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는데, 이거야 원, 봄낮의 따뜻한 날씨에다가 식곤증 때문인지 피곤했던 내 몸이 까딱까딱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이 스르르 감기고, 제대로 앉아서 몸을 가누지 못해 고개가 흔들거렸다. 그 모습을 우주 녀석이 보더니, 안쓰러웠는지 자기 어깨에 내 고개를 기대주었다.
'아... 잠온다...'
나의 이런 행동이 뭇 남학생들에게 우주를 경계하도록 만드는 지도 모른 채, 그렇게 녀석의 어깨를 빌려 선잠을 청했다.
그런데 30분이 채 되기도 전에, 정신줄 놓고 꿀같은 단잠을 자던 나를 누군가가 다급하게 깨우기 시작했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누가 부르나 확인하려는데, 내 머리위에 우주가 머리를 기대고 있었는지... 부딪쳐버렸다, 쿵.
"아야...."
"끙... 괜찮아 윤하야?"
우주는 그 와중에도 날 먼저 챙겼다. 내가 비비던 손을 머리에서 떼고 괜찮다고 세번을 말하고 나서야 녀석은 겨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우주를 앉히고 나서야 누군지 확인해보니, 재희였다.
"윤하야 지금 늦었어, 빨리 가야돼."
녀석은 아직 잠이 덜 깨 비몽사몽한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손목을 붙들고 허겁지겁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야, 얏, 왜이래?!"
난 잠도 덜 깼고, 뜬금없는 재희의 행동이 이해가 안가서 녀석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어이쿠, 이 녀석 운동해서 그런지 도무지 이 몸의 힘으로는 풀고 빠져나간다는게 절대 불가능했다. 그렇게 녀석에게 이끌려 운동장을 반쯤 지났을 때 깨달은게 하나 있었다.
'잠깐. 내 옷.'
으악! 난 몰라! 아까 응원하면서 입고 있던 옷 그대로라고-!
"재희야, 재희얏!"
순간적으로 힘을 줘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나는 가까스로 재희를 멈출 수 있었다. 그래봤자 이미 운동장의 절반 이상을 건너온지라, 학교의 모든 사람들이 날 봤을게 뻔했다.
"왜 가는지 알고좀 가자, 나 아직 옷도 이대로란 말야!"
"아유, 급한데 정말. 아무도 뭐라 안할테니까 일단 가자구!"
난 다시 내 손목을 잡으려던 녀석의 손을 뿌리치고, '너의 이런 행동이 참 기분 나쁘다'라는 표정을 지었다. 녀석은 그제서야 자기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바로 사과를 하는게 아닌가. 역시 이녀석 이런 부분은 쿨해서 참 좋다. 다시 가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난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너 은주 알지."
"응 알지. 우리 체육대회 준비하는동안 운동장에서 매일 봤잖아."
양은주, 우리 반의 육상 에이스인 소녀로 이번 체육대회 준비를 계기로 깊이 친해지게 된 클래스메이트 중 한명이었다. 특기는 육상과 관련된 모든 스포츠였는데, 축구를 좋아해서 우리반 남자아이들과 자주 어울려 축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애였다.
"은주가 어제 연습을 하다가 발목이 삐는 바람에 뛸 수가 없대. 그래서 너가 대신 뛰어야 될 것 같아."
뭬라고라. 어째서 육상의 육자도 모르는 나에게 달리기 계주를 시키려 하느냐 재희야.
"뭐? 하지만 나 달리기는 완전 젬ㅡ"
"그냥 뛰어. 뛰어보면 알 거야, 내 몸이 얼마나 달리기에 특화되어있는지."
아 그렇구나. 윤하 몸일때도 운동을 엄청 열심히 해서 다리가 탄탄히 다져진 상태이므로 뛰어도 아무 무리 없을거란 얘기인데...
"아니 그런데 말이지."
문제는 내 옷, 어떻할거냐곳! 설마 이거 입고 뛰라고?
"이 옷, 어떻게 하냐구.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와야하는데... 이대로 뛸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거추장스러워서 달리기 불편한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겠으나, 더 문제는 이 복장이 너무나도 눈에 띈다는 것이었다. 체육대회라도 구설수에 안오르고 조용히 지나가고 싶었는데 이대로라면 결국 내일 교내신문의 1면에 대서특필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1학년 2반! 빨리 와라!!"
그러나 재희와 실랑이를 하는 도중 담당관 선생님이 우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빨리 경기를 시작해야되는데 우리반 선수만 없으니 빨리 와서 준비하라는 뜻 같았다. 아 젠장 어떡한다, 이 옷을 입고 뛰었다간 지치기 전에 부끄러워 쓰러져 버리고 말텐데.
"... 어떻해 재희야?"
재희는 그 짧은 순간에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자신이 지금 이 옷을 입고 뛰었다면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보고 있었다. 난 제발 녀석에게서 사려깊은 대답이 나오기를 바랬다.
"어떻하긴."
그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게 잘못었다. 재희 녀석에게는 자비란 걸 기대하는게 아니었는데, 오히려 실망만 더 커져버린 셈이 됬다.
"뛰어야지, 우리 반의 우승을 위해서 당연한거 아니야?!"
아아... 그렇지. 우리반 응원단장인 이 바보녀석의 머리속엔 오늘 하루종일 이 체육대회 1등을 먹어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었다는 걸 감빡하고 있었다.
난 최대한 불쌍한 눈망울로 녀석을 뚫어져라 바라봤지만, 이놈은 내 눈동자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계속 눈을 돌리는 게 아닌가.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 어떻게 나같이 연약한 여자를 이런 위험한 곳에 버려 놓고 갈 수가 있어!
"부탁한다 윤하야. 너가 뜀으로써 우리반이 좀더 우승에 가까워 질 수 있어!"
쳇, 아무리 네가 그렇게 입에 발린 말을 해 봤자거든!
"... 우씨.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억지로 끌고 나온게 누군데 이젠 화가 나는지 나에게 이유없이 화를 내기 시작하려다가, 한번 꾹 참는게 보였다. 그러더니 녀석은 다시끔 나에게 협상안을 제시했다. 아주 뜬금없는 내용으로.
"주말에 날 맘대로 부릴 수 있게 해 줄게, 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