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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19화 (19/188)

19화

다행히도, 그녀는 내가 던진 교섭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약간 기쁜 듯이 내 말을 받아들이며 손을 내밀어 악수하던 나를 끌어당겨 살짝 안았다. 온 몸에 포근한 가희의 몸이 포개지는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굉장히 오랜만이다 이 느낌도.

"미안해 가희야. 앞으론 이런일 없게 하자."

"응, 당연하지. 전처럼 사랑하던 사이는 아니지만..."

그 말을 하더니 가희는 내 볼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갑작스러운 접근이어서 피할 겨를도 없었거니와, 다시 생각해보니 화해의 의미라는 생각이 들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엇보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기도 했고...

얼마나 교문에서 기다렸을까, 재희가 우주를 데리고 교문으로 걸어나왔다. 둘이서 무슨 볼일이 있다고 이렇게 오랜 시간 학교에서 안 나왔는지 모르겠다. 혹 비밀얘기라도 했으려나.

"재희야."

음반매장을 향해 걸어가던 중 난 조용히 재희를 살짝 끌어 소곤소곤 귓속말로 말했다. 가희에게는 말 못하겠지만, 재희에게만은 꼭 못을 박아둬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난 너 포기했다."

"...뭐?"

녀석은 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난 할 말을 계속했다.

"내 몸 안에 있는 서윤하를 사랑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구. 그러니까, 앞으로 두번째 부인이네 어쩌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남매처럼 대해달라는 뜻이야."

내 첫사랑에 대한 마음만은 꺾고 싶지 않았던 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나는 넓은 아량을 베푼다는 마음으로 쿨하게 윤하를 포기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포기함으로써 재희와 가희는 부담없는 연애를 하게 될 것이고, 나도 마음이 편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윤하를 포기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난 지난 열흘은 마음속에 앙금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있는 느낌이었다. 돌이켜보면 윤하와 마찰이 있었던 이유도 모두 그녀를 내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었으니까.

"그리고 가희한테 잘 해주고."

"당연한 걸, 너나 우주좀 잘 챙겨줘. 원래 친구면서 평소에도 그렇게 말을 안 했냐."

녀석도 나를 걱정해주는 건지 혼내는 건지 모를 말투로 나를 격려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원래 몸이 아닌지라 엄청 친한 척을 할 수가 없어서 우주랑 있을 때 대화를 많이 할 수는 없었다. 재희의 저 말엔 100% 수긍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챙겨주긴 잘 챙겨주고 배려해주고 있으니까 말이지. 차차 친밀도를 높여서 예전 친구사이처럼 돌아가는게 내 목표다.

"다왔다. CD부터 사고 점심 먹을까?"

그렇게 재희와 간단한 대화를 이어가며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난 주변을 둘러보고 편의점이 있는지 찾았다. 다행히 가까운 거리에 편의점이 있었고 황사먼지로 인해 목이 건조했던 나는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하고 편의점을 향해 걸어갔다.

이온음료 캔을 하나 골라 계산대에 올려놓고 지갑을 꺼내려는데, 좌측에서 다른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지갑을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나는 왼편에 서있는 의외의 인물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엥? 너 애들이랑 같이 들어갔던 거 아니었어?"

분명히 재희 커플과 같이 음반매장으로 들어간 줄로만 알았던 우주가 옆에 떡하니 서있었던 것이다. 이 녀석은 무슨 어쌔신도 아니고, 나를 소리도 없이 미행하고 있는거람.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보다 머리 한 개 위쪽 높은곳에 위치한 녀석을 바라보았다.

"주머니에서 뭐 없어진 거 없어?"

무슨소리니, 분명 내 교복 치마 주머니엔 지갑이 들어있...

"어? 없다?!"

자연스럽게 지갑을 찾던 내 손은 주머니 속에서 허공을 맴돌았다. 분명히 자리에 있어야 할 지갑이 없어졌던 것이었다. 주머니 속으로 손을 깊이 찔러넣어 보고서야 난 왜 지갑이 없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원인은 주머니에 난 구멍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조그만 구멍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커졌담.

주머니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우주를 봤다. 녀석은 손에 지갑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어디로보나 내 주머니에서 떨어진 게 분명했다.

"혹시.. 내거야?"

우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짜식, 이럴때라도 말 한마디 해주면 어디 덧나니. 아니면 마법이라도 보여준다고 하고 지갑을 스윽 보여주던가, 센스없게! ... 아니지 내가 왜 이걸 지금 우주에게 바라고 있담. 난 황급히 괜한 생각을 날려버리고 지갑을 건네받았다.

무뚝뚝하게 고맙다는 말을 한 뒤 난 음료수를 챙겨 우주 뒤를 따라 편의점을 나왔다. 앞에서 봤을 때도 녀석의 키는 컸지만, 뒤에서 따라가면서 등을 바라보니 더욱 커 보였다. 마치 벽이 하나 내 앞에 따라다니는 듯한 느낌이랄까? 앞이 하나도 안 보여서 우주의 발만 보고 따라 걷던 난 종종걸음으로 녀석의 오른편으로 나가 같이 걸었다.

음반매장에서 CD를 고르면서 난 우주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분명 늘상 답답하다고 말하고, 너무 과묵하다고 말하는 녀석이지만, 역시 말없이 챙겨주는 건 우주 뿐이었다. 이번일도 그런 것이, 편의점에서 당황할 뻔한 것을 우주 녀석이 일찌감치 지켜준 셈이었다. 혹시 전생에 수호천사 아니었을까?

점심을 먹고 나서 재희와 가희는 영화를 보겠다며 우리를 피해 도망을 가버렸는데, 웬지 두 사람이 가고 나자 우주의 표정이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워낙 겉으로 드러내지를 않는 성격이라서 그런지 우주의 속마음은 읽기가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언제나 나에게 우주는 호의적이었고,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도와주는 일이 잦았다.

그 상태는 5월 중순의 체육대회 전까지 계속됬는데, 체육대회 직전의 나는 거의 모든 일을 우주에게 기댄 채 지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상 여전히 반 여자애들이랑도 잘 어울려는 다녔지만, 재희와 가희가 짝을 이루어 다니다 보니 등하교길을 포함해 우주와 같이 다니는게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남들이 볼때는 우리 둘이 연인사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11년지기 친구사이로 서로 돕고 지내는 것일 뿐이었으니까 뭐.

일전에는 누가 사진 한장을 가져다 줬는데 그 사진때문에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전교에 루머가 퍼지기도 했었다. 뜬금없이 재희가 나서는 통에 우리 넷이 진행위원으로 참가하게 되어 체육대회를 준비하던 중에 찍힌 사진이었는데, 저녁노을이 지는 운동장을 배경으로 잔디에서 내가 우주의 무릎을 베고 자는 장면이었다. 당연하게도 사진이 퍼지자마자 큰 파장이 일어났고, 난 난데없는 스캔들에 몰려든 교내신문 기자들에게 신나게 해명을 해야했다. 아, 여담으로 그 사진은 전국 고등학교 사진전 인물사진 부문에서 최우수 다음인 우수상을 받았단다.

그 사건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엔 우리는 암묵적으로 하나의 커플로 인정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달리 말해서 내가 아무리 해명을 하고 다녀도 소용없다는 소리였다. 왜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지 이해가 안됬지만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내가 '내 소꿉친구야!'하고 혼자 생각하는게 다였다.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솔직히 대답해줘."

언젠가 한번 우주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녀석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공주."

저게 다냐고 물어본다면, 정말 저게 다였다. 이후 녀석은 무슨 질문에도 노 코멘트 해 버리고 열나게 작업만 했다. 내가 공주면, 자기는 신하라도 되나... 솔직히 요즘 나와 우주의 관계를 보면 공주와 신하가 맞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전에 내가 재희였을 때 우주와 지내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이건 나도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거라 어째서 그런 건지는 알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내가 우주를 애칭으로 부른다는 거였는데, 동성 친구일때는 절대 없었던 일이었다. 직접 단어를 적어보면 내가 봐도 오그라드는 말들인데... 평소에 어떻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건지 나도 신기했다.

"우즁~ 이제 뭐 남았엉~?"

어쩌면 여자가 되고 나서 반년이라는 세월을 지내다 보니 나에게 없던 애교가 생겨버린 것일런지도 모른다. 여자의 애교가 필수라고는 하지만... 설마 나까지 이렇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었다. '필시 이건 아저씨의 음모가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말끝에 'ㅇ'을 붙이며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웬지 이러다가 정체성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 남자처럼 하기 위해서 운동도 해보고 기합도 내 보고, 재희녀석 방에서 야한 잡지도 훔쳐 읽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난 너무나도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다 여성호르몬 때문이야!' 라고 툴툴대면서 매일 남자다워지려고 노력했지만 날이 갈 수록 자신도 모르게 모두에게 과거보다 더욱 매력적인 여성으로 각인되어갔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속의 혼란과 함께 5월의 절반이 지나갔고, 드디어 반 강제적으로 땀흘려 준비한 체육대회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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