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재희가 포기하지 않을거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포기할게.
"뭐?"
너희 사랑은 3년, 무려 천 일이 넘는 긴 시간동안 만들어져 왔던 거고, 내 사랑은 고작해야 이제 몇 달 된 풋내기 사랑이니까. 그러니까 내 이성적인 판단은 지금 이 선택이 맞다고 봐.
"난 널 놓아줄거야. 그러니까... 너도 재희에게 가서 네 생각을 똑바로 전해줘. 받아들일건지, 말건지."
그 말을 하는 내 말투는 담담했으며, 여느때보다 냉정했다. 당연한 반응이었을까? 가희가 어찌해야할지 몰라 안절부절하는 게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알수없는 애절함이 묻어나왔지만, 그녀에게 손을 내밀 순 없었다.
내가 손을 내미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놓이게 될 가희가 너무 처량해 질 테니깐.
"윤하야...?"
눈에 눈물이 고여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가희를 뒤로 한 채,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려 커피숍 밖으로 걸어나갔다. 길을 건너는 내 등으로 그녀의 아련한 시선이 날아와 힘없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나도 뒤돌아 그녀를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서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나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정말 나에게 하나 도움이 안 되는 옆방 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의아해 하는 녀석의 말은 가볍게 무시해버린 뒤, 난 내 할말만 딱 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왜냐,
"가희 노량진 에디아 커피숍에 있어. 빨리 와서 바래다줘."
오늘 벌린 판의 나머지는 재희가 할 일이었으니까.
*
그 일이 있은 후, 난 재희와 함께 등하교하지 않았다. 늘, 중간에 합류해서 학교까지 같이 걸어갔던 가희도 나와 함께 등교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 빈 자리를 우주가 혼자 채운 채로, 조용한 열흘이 흘렀다.
우주 녀석은 내가 윤하 모습으로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작년에 나와 붙어다니던 것 처럼 묵묵히 내 옆을 걷기만 했다. 덕분에 등하교 시간이 굉장히 심심해졌다. 그래도 내가 말을 걸면 그때그때 대꾸는 잘 해주긴 했지만 추가적으로 이어지는 대화가 없으니 답답할 따름. 수다쟁이 재희와 가희의 공백을 절실히 느끼며, 원래 몸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걸 하는 아쉬움만 가득했다.
아, 그리고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그 뒤로 가희에게서 전화가 오는 일은 없었다. 학교에서도 재희와 단 둘이서 다니는 경우가 많아져서, 내 앞 자리에 (이 당시엔 달이 바뀌어 자리배치가 바뀌었었다) 앉아있는 게 무색할 정도로 대화는 없었다. 가끔씩 서로 눈이 마주쳐도 피할 정도였으니까. 뭐 그 덕분에 난 반 여자애들이랑 좀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 189페이지에 있는 문제 4를 A4지 한장분량으로 논술형 작성해서 제출하는걸로 하겠어요."
국어선생님의 수행평가 알림에 야유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수행평가 공지는 앞에 있는 두 사람의 대화로 인해 내 귀에 들리진 않았다.
"가자, 가희야. 오늘이 블랙 아이즈 2집 발매일이야."
"어... 그래? 벌써 그렇게 됬나?"
앞쪽에서 재희의 '악마의 유혹'이나 다름없는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이 지속적으로 가희의 아킬레스건을 공략했는지 지금은 흡사 과거의 윤하와 가희를 보는 듯한 그림이었다. 다만 나한테(원래 윤하에게) 안기던 것처럼 강렬한 포옹은 빼고.
"그럼 그러지 뭐. 점심은 뭐 먹을거야?"
"우리 매번 가는 음반매장 옆쪽에 있잖아, 닭갈비 전문점."
그런데 여태껏 나에게 많이 차가웠던 가희로부터 갑작스러운 구원의 빛이 내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솔직히 가희가 그 사건 이후로 나에게 편히 대할 수 있으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난 새로 친해진 애들과 함께 귀가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오늘은 오랜만에 윤하랑 우주도 같이 가자."
"응?"
방금 것은 당황한 내가 얼떨결에 토해낸 소리.
"뭐?"
이건 역시 예상치 못했는지 재희 녀석이 한 말.
"왜긴 왜야, 요즘 둘이만 다닌다고 윤하랑 우주한테 얼마나 소흘했는데. 그것도 대부분 재희 너가 안된다고 해서였잖아."
"아... 그거야 그렇긴 했지만."
아-하? 뭐가 그렇긴 했지많이냐 이 자식아. 방금 가희 말을 들으니 이제서야 이해가 되는구만. 요컨대 가희는 그 사건 이후에도 나와 앙금을 풀고 같이 놀고 싶었지만 재희녀석때문에 그러지 못 했다는 거잖아.
"나 더이상 둘에게 미안해서 안되겠어. 너도 좀 더 친구를 신경쓰는게 좋지 않겠니 재희야?"
"어, 으응."
재희는 이제서야 너무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수긍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녀석은 상체를 돌려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난 아직 이 녀석과 냉전을 끝낼 생각이 없었지만 분위기상 잡아줘야 할 것 같았다. 이 자식이 집에서는 마치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더니만 가희가 시키니까 말을 하는구만.
"미안하다 윤하야."
그래서 재희의 악수에 응하고 가볍게 흔드는데, 이 생각 없는 녀석은 짧고 굵은 한 마디로 우리 넷 가운데에 폭탄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앞으로 집에서 무시하고 그러지 않을게."
"...?!"
헐. 야 이건 아니잖아! 그 얘길 지금 하면 어떻해?! 우리 암묵적으로 그 얘기 비밀로 하고 있던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집에서라니? 설마 너희 같이-"
놀란 가희가 대뜸 되물었고, 난 그 말을 끊으려 했지만 되려 재희에게 묻히고 말았다.
"아냐 그게-"
"어? 말 안했었나? 윤하 지금 우리 집에서 묵고- 읍!"
다급히 녀석의 입을 봉인해 뒤 쪽으로 잡아당겼지만, 이미 반의 모든 아이들 귀에 들어간 뒤였다. 그 표정 거의 안 변한다는 우주도 이 때만은 확실히 놀란 것이 보였다.
그 뒤로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재희가 힘으로 내 손을 강제로 떼어낼 때 까지는.
"왜 이래 너? 사촌이라서 어쩔 수 없이 같은 집에서 신세지고 있는건데 그게 뭐가 부끄러운 거라구."
그게... 그 문제가 아니라 내가 가희에게 얼버무렸던 게 들통나버렸잖아! 아니, 솔직히 내가 가희를 속인거니까 내 잘못이긴 한데.. 그런데 말이지, 젠장, 급한 마음에 막 뱉었던 말이라서 다시 주워담을수도 없었다고!
"윤하야, 나한테 이런 말은 한 적 없잖아..."
역시나 가희는 기억하고 있었다. 굉장히 다급한 상황이 되어버린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임기응변을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그게 말야 그때는.. 가희 네가 너무 당황해서 혼란스러워 하고 있어서..."
가희의 표정은 상당히 복잡미묘했다. 아마 화를 내야 할 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거겠지. 아아 젠장, 내가 거짓말 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거 재희에게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군.
나와 가희 사이의 미묘한 기류 때문에 재희는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심각한 내 표정과 고민하고있는 가희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보던 재희가 뭔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담임선생님 오신다~!"
그 한마디에 어수선하던 교실이 정리되었고, 가희도 앞쪽으로 몸을 돌렸다. 난 여전히 어찌하면 좋을 지 몰라 옆에 있는 우주의 눈을 절망적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다행히, 정말 천만 다행으로 종례 후 교문에서 가희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우주와 재희는 할 일이 있어서 잠깐 자리를 비운 상태로 단 둘이 만나게 된 나는 가슴졸이면서 어떤 말이 나올 지 몰라 긴장하고 있었다.
"그... 거짓말까진 아니지만, 날 속였던 건 화가 많이 났거든? 그래도 날 위해서 한 거라니까 한 번 더 생각해 봤어."
그래 솔직히 나라도 거짓말 하면 화가 많이 날 거야. 난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한 마음에 어떻게든 가희의 기분에 맞춰갔다.
"그런데 굳이 나한테까지 그렇게 말해뒀어야 할 필요 있었나 싶어. 그리고 재희 얘기 들어보니까 꽤 오래 숨기고 있었더라? 가장 친한 나한테까지 이렇게 숨길 필요가 있었던거야? 그리고 우주한테도 말이야, 숨기고... 흠."
...왜냐하면 이런 사태가 발생할 까봐 두려웠으니까요. 아, 내가 윤하를 좋아한다는 건 아직 가희한테는 안 들켰던가. 그런데 재희녀석 우주한테도 말 안 했었나보네.
"미안. 나도 빨리 말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너희 둘 사이가 점점 발전하는 것 같아서 말하면 또 문제가 될까봐..."
지금 말한 건 모두 사실이었다. 게다가 가희와는 요 몇 주간 제대로 말도 못 했었으니까 지금이 어쩌면 유일하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최근해는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나랑 안 놀아줬었잖아.."
"그, 그야 그렇긴 하지만, 분명 윤하 너가 가라고 했...구, 게다가 재희가 날 너무 안 놓아줬단말야..."
가희는 그 말에 당황했는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우물쭈물거렸다. 나는 이때다 싶어, 모든 상황을 원상복귀 시킬 절묘한 협상의 한 마디를 질렀다.
"그럼 우리 서로 섭섭한 거 퉁치자. 어때?"
============================ 작품 후기 ============================
+14.07.08 - 수정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