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4. 사랑하니까, 포기했다.>
아저씨가 떠나고 나서 4주 만에 꿈을 꾸었다.
너무 생생한 나머지 깨고 나서 2시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을 정도의 꿈.
대충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내가 길을 걷다가 몸을 빼앗겨 어떤 모르는 소녀의 몸 속에 자리하게 되고, 그 소녀의 기구한 운명에 따라 학교를 다니던 해괴망측한 꿈이었다. 그러나 이 일장춘몽, 호접지몽이나 다름 없는 꿈은 꿈일 뿐인데... 어째서 기상 후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은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인 걸까? 그것도 내가 첫눈에 반해버린 이 서윤하라는 아이의 몸인 걸까.
"하아...?"
젠장, 그렇다. 난 깨고 나서 1분만에 현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고? 그 꿈같은 기구한 이야기는 내가 이미 몇 달 전에 겪었던 일이니까.
잘나가던 소년이이었던 나는, 알 수 없는 일을 계기로 소녀 서윤하와 육체가 바뀌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공항에서 우리에게 남겼던 문자 메세지로 보아 이 일과 연관되어 있음이 틀림없었지만, 아저씨는 출장을 핑계로 해외로 떠나심과 동시에 연락두절이 되어버렸고, 이제 이 기괴한 사건을 풀 실마리는 내 주변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거다.
난 오로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박한 희망만을 가진 채, 내 몸을 차지한 윤하가 괜한 일 벌이지 않고 원래대로 지금 이 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내 바람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일요일 아침엔 꼭 집에서 운동하던 재희가 평소와 다르게 없는 거 말고는 별다를 게 없는 아침. 주말이면 늘 늦게 일어나는 날 위해 '나의 원래 어머니'이신 재희의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토스트를 입 안에 우겨넣으며 나는 다시 내 방으로 향했다. 분명 어제와 똑같이 깔끔하고 여성스러운 나의 방, 틀림없는 윤하를 위한 방이었다.
"자, 오랜만에 아무도 날 귀찮게 하지 않는 주말인데 뭘 하면서 보낼까나?"
컴퓨터 전원을 켜면서 일 주일 전에 재희가 새로 마련해 준 핸드폰을 열었다. 재희가 자기랑 같은 폰으로 하자는 걸 끝까지 잡아 말린 끝에 고른 귀여운 폴더형 핸드폰. 역시, 슬라이드보단 폴더가 좋다. 게다가 재희는 도대체 왜 같은 폰으로 하자고 우기는건지, 니 여자친구한테나 그렇게 말해라 이자식아.
"응? 이게 뭐야, 부재중 전화 27통?"
열자마자 주루루룩 올라오는 부재중 통화 목록에 나는 흠칫 놀랐지만, 입 속의 토스트를 우유와 함께 꿀꺽 삼킨 뒤 나는 침착하게 목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희, 가희, 가희, 가희, 가희... 가희. 이럴수가. 27번 전부 가희였다.
나는 목록에서 바로 가희를 선택해 전화를 걸었다. 평소에 아무리 가희가 이 윤하에게 깊이 반해있다고 해도 27번이나 전화를 한 적은 없었으니까. 분명 무슨 일이 있는게 분명했다.
[윤하야!!]
전화를 걸자마자 다급하게 들려오는 가희의 목소리에 난 놀라서 의자에서 넘어질 뻔 했다. 의자를 움직이고 있었다간 어디에 멍이라도 들었을 것이다.
"아우, 깜짝이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부재중 전화가 온 건 아침 10시 경. 지금은 그로부터 3시간이나 지난 오후 1시라서 가희도 어느정도 진정이 되어있겠지 싶어 긴장을 풀고 있었는데, 긴장풀린 내게 들려온 가희의 비명소리는 내 말초신경까지 곤두서게 만들었다.
[그게... 말하자면 좀 긴데, 내가 지금 그래서 너네 집으로 가려고 하거든? 가서 얘기하면 안될까?]
어 그래 우리 집으로 온단 말이지. 하긴 아저씨도 안계시니까 이제 집에 아무도 없어서 눈치 볼 일도 없겠.....지가 아니잖아. 난 지금 재희네 집, 아니 자꾸 말이 꼬이네 젠장, 내 집에 있잖아! 생각해보니 나 지금 재희랑 같이 산다는 걸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전에 달리 언급이 없었지만, 재희와 나는 암묵적으로 같이 산다는 걸 학교에 알리지 않은 상태였다. 흔한 러브코미디에 나오는 동거 커플처럼 될까봐서 그런 것이다. 소문이 나면 둘이 투닥거리다 정드는 그런 시나리오가 될까봐 애초에 재희 녀석이 막아둔 것이나 다름없다.
"워, 워 잠깐만, 가희야 내가 나갈게, 어디로 갈까?!"
[어... 어 그래?]
내가 생각해도 완전 어색하고 급조한 말로 집으로 쳐들어올 기세인 가희를 막고 나서, 난 짧은 시간동안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솔직히 이정도면 가희가 뭔가 알아차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어색한 말돌림이어서 걱정이 됬지만 그녀도 당황한 상태니까 뭐...
"그럼 내가 준비하고 두시까지 노량진역 육교로 나갈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줄래?"
[알았어. 그때 보자. 꼭 나와야 해?]
얼마나 걱정이 되면 가희는 그 후에도 두번 세번씩 재차 확인까지 한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전화로도 충분히 얘기가 가능했을 테지만 어쩐지 가희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간 나는 자연스럽게 외출하는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좋아서 나가는 건 아니지만 따스한 봄의 주말에 외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기에, 난 봄 향기나 느껴볼까 하는 마음으로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
이 쪽의 나는 이미 윤하로써 생활하는데 완벽히 적응해서, 어찌보면 17세 소녀 다 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자로 사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신기하게도 흔히 저지를 수 있는 남자다운 실수 따위는 전혀(?) 일체 없었다.
그렇게 상식을 좋아하고 비과학적 현상에 흥미도 없던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적응하고 있다는게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단지 현실과 타협했을 뿐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니니까 괜찮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는 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원래 몸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고,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고 참고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서 아저씨가 떠난 직후부터 나는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지만 예상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떠나면서 남긴 문자 메시지는 분명 우리가 아저씨와 관련된 어떤 일에 의해 몸이 뒤바뀌었으며, 돌아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다급하게 부른 이유가 뭐야?"
그렇기 때문에 몸이 다시 바뀌기 전에 일을 끝내야 겠다고 생각했는지, 일요일 아침인데도 재희가 서둘러 집에서 나간 것도, 가희가 다급하게 내게 전화를 한 것도 이해가 됐다.
"좀 길게 잡고 이야기해야 될 것 같아 윤하야..."
분명 재희는 아저씨가 출국한 날 그날부터 바로 밑작업을 시작했을 거다. 가희가 크게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그리고 그렇게 가희로부터 호감을 끌어내기 시작한 지 4주 째, 녀석이 작전 개시를 선포한게 틀림없었다.
"윤하야, 재희가 너 사촌이랬지?"
가희는 주문한 커피도 입에 잘 대지 못했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그녀의 첫 마디는 재희에 관한 말이었다.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나 없을 때 나에대해 얘기하거나, 비슷한 얘기 한 적 없니..?"
이 질문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지난 몇 주간 집에서 재희는 나와 가희 문제로 수도없이 실갱이를 벌였으니까. 아저씨가 출장 떠나시자마자 바로 선전 포고를 해 왔던 녀석이다.
'앞으로 가희가 내게 넘어오도록 만들테니까, 넌 절대 방해하지 말고 지켜보기나 해.'
하지만 그 말에 가만있을 내가 아니라서 허튼 소리 하지 말라며 끊임없이 다그치기는 했지만, 녀석은 과거 날 둘째 부인으로 삼겠다던 농담조차 하지 않으며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말을 해도 콧방귀를 뀌며 방으로 쏙 들어가버리니, 난 싸울 힘도 나지 않았었다.
아저씨의 의미심장한 문자를 보기 전에는 그래도 날 두번째로라도 생각해주더니, 그 후로는 자기도 조급한 마음이 들었는지 날 완전 찬밥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 여자였던 주제에 내 몸에 들어가서 가희를 차지하려 하다니, 완전 남의 몸 가져다가 범죄를 저지르려는 거랑 뭐가 다르겠는가.
"흐음... 글쎄? 딱히 그렇게 별난 말은 한 적 없는데."
가희를 생각하면 미안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재희가 바라는 대로 굴러가게 둘 수만은 없었기에 난 최대한 그녀가 재희에게 호감을 가지고 넘어가지 않도록 알게 모르게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나도 일단은 가짜 서윤하. 그래서인지 진짜 서윤하와 가희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은 어찌해봐도 손쓸 도리가 없었다. 실제로 재희는 가희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었다.
"사실은 오늘 재희가 갑자기 대뜸 고백을 해 와서..."
그렇게 매번 날 보면 달라붙던 가희가, 오늘 나를 만나자고 해놓고 이렇게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는 이유가 달리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도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윤하가 들어있는 재희와, 겉모습만 윤하인 나 사이에서.
그 이후로 가희가 이야기하는 것은 전부 어느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있었던 일 하나하나가 재희가 사전에 계획했던 일이라고 생각하니, 녀석이 가희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도 새삼 느껴졌다.
"난 분명 윤하 네게 끌렸고, 반했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요즘엔 재희에게도 비슷하게 끌리게 되고 말아..."
언제나 저돌적이고 교태넘칠 것만 같았던 가희가 이렇게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는 표정을 보니 '아.. 이건 진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 문제로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가희가 재희에게 넘어가지 않게 해야, 나도 내 사랑의 방향을 원래 윤하에게 흔들림 없이 고정시킬 수 있겠지만, 어째서일까, 난 감히 그녀를 붙잡기 위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미 가희는 재희에게서 옛 진짜 윤하의 체취를 느꼈을 거야. 지금 나같이 차가움이 느껴지는 태도가 아닌 따뜻함이 느껴지는 재희에게서, 옛 사랑을 느끼고 있는 걸지도...'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억만금같이 길게 느껴지는 가희와 나 사이 2미터의 거리에 멈춰버린 정적 사이로, 난 수십 번을 고민했다.
젠장.
그 수십번의 고민 끝에, 또 수십번을 고민한 뒤에야 난 고개를 들어 가희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흔들리는 서로의 눈동자 사이로 시선을 교환하고 나서, 마치 수 톤의 추라도 달린 마냥 무거워진 입을 열었다.
"가희야."
사랑하니까, 내가 포기한다.
"재희에게로 가. 지금 너의 마음을 믿어."
============================ 작품 후기 ============================
+14.07.08
작중 휴대폰이 2g폰인건, 배경이 2010년이라서 그러니 양해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