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끝까지 뭐 자기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다느니, 그러니까 너가 조심하라느니 조잘대는 재희를 방에 버려둔 채, 부엌에서 아주머니 점심 하는 걸 도와드리고 있는데 재희가 뭘 보고 그렇게 놀랐는지 헐레벌떡 뛰어왔다.
"엄마, 저 방, 저 방 뭐야? 하루사이에 방이 바뀐것 같은데?"
아아 아무래도 내가 살게 될 방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나 보군? 아니 아까전에 내내 내 방에 있었으면서 이제야 눈치채다니 저거 바보 아냐?! 게다가 이 녀석 아직 엄마한테 얘기는 전해듣지 못한건가보네.
"어머 내가 깜빡하고 말을 안 해 줬구나. 그 방 앞으로 윤하가 쓰게 될 방이야."
"어어엉?!"
재희가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린지 모르겠다는 멀뚱한 표정으로 나랑 엄마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엄마에게 들으라는 듯한 표정을 지은 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결국 한마디 만으로는 설명이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엄마는 칼을 내려놓고 다시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시작했다.
"윤하네 아버지 이번에 해외 출장 가신댔잖아. 그러고보니 이것도 재희 너가 말해준 거 아니었니? 아무튼 그래서, 윤하 혼자 집에 있기 그러니까 걔네 아버지가 어제 네 아빠한테 전화해서 부탁했나봐. 그래서 다음주부터 윤하 우리집에서 생활하기로 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녀석이 소래기를 쳤다.
"뭬에에에에에?!"
물론 나는 그 비명소리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분명 녀석이 저렇게 놀라자빠지려고 하는 건 아침에 나와 있었던 해프닝 때문이겠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저거 기쁨의 외침 아냐? 또래 여자애중에 절세미녀인 내가 같이 살아준다는데.
"엄마 잠깐 이리 와봐요."
거의 30초를 멍하니 입 벌린 채 서있던 녀석은 갑자기 엄마를 자기 방으로 후다닥 끌고가더니 문을 닫고 뭔가를 속닥속닥 얘기하기 시작했다.
재빨리 따라가서 방 밖에서 엿들으려 했으나, 얼마나 작게 말하는지 잘 안들렸다. 하지만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지는 내가 이미 쫙 꿰고 있었다.
'보나마나 한창때인 남녀가 같이 있으면 공부가 어쩌네 큰일이 날거네 어쩌네 하는 얘기를 엄마한테 하고 있으렸다.'
하지만 그 얘기는 우리 엄마한테 해 봤자다. 우리 엄마 성격은 내가 정말 잘 아는데, 예전부터 지금의 딱 윤하 같은 이미지의 여자 애를 데려다 키우는 게 소원이었단 말이지. 맨날 딸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시던 분이었으니, 내가 이 집에 와서 살게 된 건 엄마한테 있어 행운이나 마찬가지란 소리다. 아 젠장 그런데 아들이었던 난 왜 눈물이 나지. 아무튼 그래서, 난 지금 엄마가 내 방 따로 만들어 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 생각하고 있다. 울 엄마아빠 같은 분이면 약혼도 일사천리로 치르실 분이기 때문에...
대충 알아서 얘기 하다가 재희가 포기 하겠지 하고 생각한 나는 내가 하던걸 마치고 거실로 나와서 티비를 보기 시작했다. 아니나다를까, 10분 정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재희가 투덜투덜대며 방에서 걸어나왔다. 그러더니 거실에 앉아있는 나를 보자마자 다시 방으로 질질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윤하야 잘 들어. 절대 내 앞에서 속옷을 보인다거나 각선미를 자랑한다거나 하면 안 된다? 난 분명히 말했어."
"그래서... 그러면 덮치기라도 하겠다는 말이야?"
"물논."
우와. 이녀석 진짜 안되겠어. 마치 불끈불끈한 청년의 몸을 14살 중학생에게 쥐어 준 거나 마찬가지인 생각을 하고 있잖아. 언제라도 잡아먹겠다는 말이랑 뭐가 달라 저게.
"바보야. 너 만약 그러기만 했단 봐, 바로 가희한테 일러버릴거야."
"!"
이건 좀 정곡이었던 듯, 내내 고집을 부리던 재희도 그제서야 사태의 중요성을 깨달았는지 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전세 역전이구나 윤하야? 후훗.
"미안. 내가 참을테니까 제발 그것만은 하지 말아줘!"
"그래그래. 이제야 말을 좀 알아듣는구나."
아무튼 그렇게 내가 재희네 집에서 살게 되는 거에 대한 실랑이가 끝이 났고, 나는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아빠는 확실히 운동을 꾸준히 하셔서 그런지 예전보다 얼굴이 밝아보이셨고, 나를 보더니 한층 더 흐뭇해 하셨다. 우리 어머니와 생각이 비슷하시기 때문에 내가 여기 사는것에 대찬성 하셨다고 하셨으니, 뭐 뻔하다.
원래는 우주와 하던 딜레이 스테이션 3도 오늘은 대신 재희와 실컷 했는데, 이 녀석 진짜 게임을 못 한다. 뭘 하든 나한테 4시간 동안 이긴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녀석은 오기 때문에 계속해서 덤벼들었지만, 내가 이걸 하루이틀 한게 아니란 말이지. 결국 재희가 패배를 선언하고 패드를 놓을 때까지 게임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게임도 끝나고, 남은 두 시간은 가족들과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의 대화이다 보니 너무 신이 나서 하마터면 말 실수를 할 뻔 했지만, 다행히 옆에 있던 재희가 제지해 준 덕분에 큰 실수는 면할수 있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오늘 너무 감사합니다."
"어라? 벌써 가려구? 저녁도 먹고 가. 자고 가도 되구."
엄마. 아니됩니다, 이 집엔 엄마가 아끼시는 양녀를 노리는 사나운 늑대가 한 마리 있어서요. 물론 다음주부턴 같은 집에서 살아야겠지만... 그래도 얼마 안 남았으니 당분간은 아저씨랑 자렵니다.
"아녜요, 아빠가 지금 저 찾으면서 기다리고 계실게 뻔해서요. 연락은 해뒀지만서도 일찍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렴 그러면. 얘 재희야! 윤하 집까지 좀 바래다주고 와!"
아뇨 이 몸도 나름 단련이 되있어서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하긴 오늘 재희가 날 힘으로 구속했던 걸 보면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택도 없겠지만 말이에요. 그래도 오늘은 재희의 안좋은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 밤중에 같이 걷고싶지 않아요 엄마!
"헉 안 그러셔도 되요! 빨리 가야겠네. 그럼 수요일날 뵈요!!"
"어머? 윤하야~ 조심해서 가! ... 한재희! 뭐하니?!"
분명 재희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따라갔다간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고. 그래서 엄마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방에서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봤자 3일 후면 계속 등하교도 같이 해야 될텐데 어쩌려고 저런담 쟤가.'
물론 남자가 되어버린 재희 혼자만의 고민이겠지만... 난 오히려 이럴 땐 여자가 된게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차라리 저렇게 본능적인 것보단 이성적인 게 훨씬 낫지 암.
*
그 날 부터는 난 매일 아저씨와 함께 잠을 잤다. 2년동안이나 못 보니까, 미리 아저씨의 체온을 더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이 역할은 내 몸에 있는 윤하 역할일텐데, 녀석이 공항에서 아저씨를 배웅하면서 울지나 않을 지 걱정이 됐다.
'그동안 아저씨한테 차갑게 대했으니까 멀쩡하려나. 아님 울던가, 자기 몫이지 뭐... 내 몸이 되고 나서는 자기 집은 한번도 안 찾아왔으니까 말야.'
그리하여 다가온 수요일 오후. 아저씨가 타고 가시는 비행기는 오후 6시 비행기였기 때문에, 난 수업이 끝나고 나름 신경써서 차려입고 재희를 데리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녀석은 여전히 내 옆에 붙어있기가 껄끄러운지, 계속해서 2미터 거리를 유지하곤 했다. 다행히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았기에 망정이지, 버스에서까지 다른좌석에 앉았으면 한 대 때릴 뻔 했다. 뭘 그렇게 피하냐 피하긴, 잡아먹어도 니가 잡아먹을텐데.
"그럼 윤하, 건강하게 잘 있고. 재희도 윤하 잘 부탁한다. 2년뒤에 아빠도 일이 잘 풀려서 꼭 건강하게 귀국할게."
눈물을 쏟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출국 소식을 접한 그날 있는 눈물이란 눈물은 다 짜낸 덕분인지 담담하게 있을 수 있었다. 괜히 아저씨에게 약한 모습 보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저씨 걱정 마세요. 윤하는 제가 책임지고 바람 못 피게 감시하겠습니다."
"뭐, 뭐라는거야 너!"
재희는 예상대로 눈물 하나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저씨에게 장난까지 칠 정도였으니 뭐... 넌 감정이 있긴 한거니.
"고맙구나 재희야. 2년동안 윤하를 잘 지켜줄 거라고 믿는다. 그럼 갈게."
마지막으로 한번씩 포옹하고 나서, 아저씨는 게이트를 지나 비행기로 향하셨다. 아저씨의 뒷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재희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아, 그리고 아까 재희에게 감정이 있냐고 한 쓴소리는 취소다. 녀석은 아저씨가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눈물을 펑펑 흘려대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소식 처음 들었을 때도 이렇게 울었겠지 싶을 정도로 많이.
그러나 10분 뒤 울고있는 재희를 미처 진정시키기도 전에, 아저씨로부터 아주 충격적인 문자가 왔다.
[딩동]
나와 재희에게 동시에 온 문자. 난 재희를 한 번 바라보고 바로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
[발신자 : 팔불출 아빠]
[재희야. 내가 올 2년 뒤까지, 꼭 행복해져 있으렴]
뭐야. 재희라니? 이거 분명 윤하 폰인데?
"야! 이거 뭐야?!"
내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데, 재희가 깜짝 놀라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 뭐야 이거.
[발신자 : 010394XXXX9]
[윤하야, 앞으로 네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남은 2년에 달렸단다.]
아저씨가 내 원래 번호는 어떻게 알고 계셨던 거지?! 아니 게다가 설마 아저씨는 우리 바뀐 걸 알고 계셨단 말야?!
"이게... 대체..."
결국 그 아저씨의 문자로 인해,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몇 분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3.전세역전>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