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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13화 (13/188)

13화

얼마나 웃었는지, 배를 부여잡고 침대위를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었더니 또 눈물이 눈에 한가득 고여버렸다. 게다가 얼마나 크게 웃어댔는지, 부엌에 있던 가희와 우주가 놀라서 달려올 정도였던 모양이다.

"괜찮아 윤하야?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숨 넘어갈 듯이 웃니!"

가희는 어지간히 놀랐는지, 내 등을 퍽 쳤다. 대충 '얘가 사람 놀래키고 있어!'라는 의미이다. 나는 간신히 숨을 고르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옆에서 떨떠름 하게 앉아있는 재희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다시 부엌으로 돌아간 뒤 난 간신히 정상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하아... 죽는 줄 알았네. 너 왜그렇게 사람을 웃기고 그래. 나 이러다가 엉덩이에 뿔 나겠어..."

".... 반은 진심이었는데."

재희는 풀이 죽었는지 축 처져서는 털썩 침대에 주저앉았다. 얌마 그래도그렇지, 반은 진심이 뭐냐 반은 진심이, 온 마음을 다해도 지금의 나는 받아줄까 말깐데. 난 녀석의 뒤통수에 꿀밤을 살짝 먹이고는 조용히 내가 낸 결론을 말해주었다.

"됐네요. 난 여자인 서윤하가 좋단말야."

그 말을 듣더니 녀석도 저번에 공원에서 대화한게 아직은 기억속에 남아 있는지, '아쉽다'와 '미안하다'의 두가지 표정이 동시에 얼굴에서 보였다. 왜 이제와서 그런 표정 짓는건데 너!

게다가 난 정말로 이녀석이 날 좋아해서 '두 번째 마누라가 되 달라'는 둥의 말을 했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웃었던 것이었다. 난 분명 녀석이 풀죽은 내가 걱정되서 한 소리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아- 그래. 싫으면 말고, 이렇게 멋진 남자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하나도 두근거리지 않나보지 넌?"

"웃기지도 않는다. 그 몸 원래 내꺼거든요? 남자였던 사람이 어떻게 남자한테 그렇게 쉽게 두근거리냐? 볼래?"

재희가 뜬금없이 이 멋진 내가 어떻냐는 투로 말하자, 난 그렇게 말하며 녀석의 손을 내 가슴에 덥썩 가져다댔다. 윤하도 당연히 여자였으니까 여자 가슴 쯤 만져도 아무 생각 들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자기 몸이니깐.

"봐봐, 난 지금 널 봐도 아무런 연애감정이 안생긴다구. 자기 몸에 대고 흥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녀석은 분명 자기 것이었던 몸의 일부분에 손을 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제멋대로 반응하는 건지, 자기 몸임에도 불구하고 반응하는건지 사내녀석처럼 흥분했다. 속옷과 잠옷이 분명 내 가슴과 녀석의 손 사이에 있었지만, 이 오묘한 감촉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재희는 자기 손 위에 있던 내 손을 떼버리고는 머리에서 김을 모락모락 내며 재빨리 가슴에서 손을 치워버렸다.

"야.. 너.."

"젠장. 너 여자인 주제에 왜이렇게 대담해!! 세상에 어떤 여자가 자기 가슴에 남자 손을 얹어주냐!"

아니, 저기요? 이거 원래 네 몸이거든요? 너도 이젠 남자라 이거냐? 불끈불끈 해?!

"밝히기는. 대단하다, 남자 다 됬네."

"뭐, 뭣, 응?"

재희가 아니라고 아니라고 한사코 부정을 해댔지만, 방금의 반응으로 보아 녀석은 이미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남성호르몬에 흠뻑 취한 상태인 듯 하다. 저번에 나한테 했던 얘기로 보아 분명... 그것도 했겠지. 아니다 생각하지 말자 나도 했으니 퉁치고.

분위기가 어색해진 탓에 재희에게서 도망가 욕실에서 부은 눈을 마사지하고 간단하게 세안을 했다. 나와보니 어느 덧 가희와 우주가 준비하던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오- 맛있는 냄새. 뭘 만든 거야?"

두 사람의 요리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우주 녀석 요리 솜씨는 안봐도 뻔히 아는 무난한 정도였고, 가희랑은 이렇게 서로 음식을 해주거나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만약 이 밥이 맛있다면 이건 가희 솜씨라 이거지.

"그냥, 소화 잘되고 무난한 카레로 했어. 내가 칼질을 잘 못해서 우주 시켰는데, 우주가 칼질 하나는 끝내주게 잘 하더라구."

우주 칼질하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칼질을 하는 장면이 상상이 되지 않았으나,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한술 떠서 먹어보니 굉장히 좋은 맛이었다.

"마있다. 외고아,"

재희가 한 숟가락 가득 떠먹더니, 맛있다며, 최고라며 아주 난리 법석을 떨었다. 우리 어머니 요리 솜씨 탓에 입맛이 고급화된 나에게도 아주 딱 맞는 맛이어서, 나는 한재희일 적 엄마의 요리가 떠올라서 감동을 받고 있었다.

밥먹으면서 즐겁게 웃고 떠들다보니,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난 혼자가 아니었구나.'

그 생각을 하고 나니까, 아침부터 날 휘감고 있던 묘한 오한과 두려움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저씨가 일 때문에 외국에 나가셔도... 친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에겐 이 녀석들이 있었어.

'그 중에서도 재희가 제일 웃기단 말야... 워낙 4차원 정신세계에 살고 있고, 이따금씩 말도 안되는 말을 하긴 해도, 그게 진짜 재밌어.'

난 숟가락을 든 오른손을 허공에 멈춘 채,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간밤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해외출장 가신다는 말에 가장 놀랐던 건 당연히 재희였다. 그렇게 맨날 아저씨에게 차갑게 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니까 멀리 떠난다는게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이다.

"아저씨 가실 때 나도 갈래. 그래도 괜찮지 윤하야?"

그래서인지 녀석은 죽어도 날 따라 공항까지 가겠다며 난리를 피웠다. 가희와 우주까지 같이 가겠다고 하는 통에 난 간신히 재희만 데려가기로 합의를 보고 일단 세 사람 모두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따 아저씨가 오시면 할 말이 많았다. 일단 아저씨를 안심시켜드리는게 최우선이 아닐까 싶다. 어제 그렇게 내가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으니, 간다고 말은 하셨어도 얼마나 불안한 마음이시겠느냔 말이지.

출장 준비때문에 바쁘신지, 아저씨는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오셨다. 난 아저씨가 돌아오시자마자 거실로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야... 이게 뭐야? 우리 딸이 만든거야?"

거실 테이블에는 내가 미리 만들어 놓은 과일 안주와 초, 그리고 아저씨가 아끼는 와인 한 병이 놓여져 있었다. 물론 내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미리 다 세팅한 것이었다. 분명 아저씨도 한 분위기 하시기 때문에,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설마 아끼는 와인 땄다고 뭐라 하시진 않으시겠지..!

와인글라스에 와인을 따라 드리고, 내 컵에는 과일주스를 따른 뒤 건배를 했다. 아저씨는 계속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듯 내 눈치를 보고 계셨다.

"저기 아빠."

"응. 우리 딸."

내가 어떻게든 먼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한 뒤,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빠 출장 가시면, 나 친구집에서 같이 생활하면 안 될까?"

아저씨는 약간 놀라신 듯, 눈을 동그랗게 뜨셨다. 분명 늘 지멋대로였던 딸이 최근 살갑게 대해주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상담을 통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걸 보니 놀랄만한 상황은 맞다.

"어제밤엔 아빠 없으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것 처럼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아니었나봐, 내가 아프다고 누워있으니까 이렇게 바로 달려와주는 친구들이 세 명이나 있네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시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난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기둥이 되어주었던 아빠가 없지만, 그 기둥 역할을 해 줄 친구가 있으면 나 계속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빠."

그런데 내가 말을 마치자, 아저씨는 계속 허공과 바닥을 번갈아 보시다가 '끙-' 이라는 신음소리까지 내시며 고민을 하시더니 내게 힘들게 말을 꺼내셨다. 난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며 어떤 말이 아저씨 입에서 나올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런데 어떻하지 윤하야? 어제 네 모습 보고 너무 걱정되서 벌써 내 친구 가족에게 부탁했는데..."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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