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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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공원에서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온 뒤, 내 머릿속은 더욱 혼돈에 휩싸여버렸다. 이렇게 몸이 뒤바뀐 것이 그가 원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지만, 그가 마법이라던지를 써서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날 단번에 윤하에게 반해버려 그녀가 아니면 다른 누구와도 사랑을 할 수 없을것만 같은 이 감정은 도대체 어떻게 정리를 해야만 한단 말인가. 여자고 남자고 그 누가 나한테 들이댄 들 내 꽉 막혀버린 이 감정을 뚫어낼 수 있느냐말이다.
매일 잠들때 내가 곧 윤하이며 그녀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매일아침 일어나서 샤워를 하면서 거울을 통해 그것을 실감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바보같은 내 머리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게다가 기쁜 일이 몰려서 일어나는 것 처럼, 슬픈 일도 몰려서 일어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미 충분히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신께선 아직 나를 더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실 모양인듯 했다.
"네...? 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재희의 비밀스런 사랑을 전해 듣고 난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이번에 날 충격에 빠트린건 다름아닌 윤하의 하나뿐인 혈육, 아저씨였다.
"그러니까... 다음주부터 2년동안 해외 출장을 가게 됬어. 일본에 먼저 1년동안 가 있다가 다음해에는 미국, 6개월 후에 유럽을 거쳐서 2년 후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 같구나."
출장이라니. 내가 이렇게 정신적으로 힘들어도 그나마 아저씨 덕분에 이 고독감을 버텨내고 있었던 건데, 아저씨마저 한국을 떠나버리신다니... 그러면 이 집에 늘 혼자 남아서 버텨야 한단 말이야?
"꼭... 2년이나 가야해요? 중간에 잠깐도 돌아오지 못하는거에요?"
난 정말 눈물을 흘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동안 쌓여왔던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원하지 않는 닭똥같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렇게 펑펑 우는지 몰랐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 눈물이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내게 유일하게 기댈 곳을 주셨던 아저씨가 없어진다는 얘기는 나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커다란 슬픔이었던 것이다.
"나도... 우리 딸 윤하만 남겨놓고 간다는게 너무나 힘들지만, 중요한 일이라서 정말 어쩔 수가 없구나... 가서도 하루도 못 쉬고 일 할것 같네..."
너무나도 딸을 사랑하는 아저씨의 본심이 단 한마디만으로 강하게 느껴져왔다. 아저씨는 펑펑 울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눈물을 닦아주더니, 그 넓으신 가슴으로 나를 품에 안아 등을 두드리며 다독거려 주셨다.
"흐아아아앙. 가지 마세요 아빠!!"
그러나, 아저씨의 심장 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지자 난 오히려 더더욱 감정이 격해지면서 커다란 소리를 내며 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마음속으로 그렇게 고민하면서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저씨의 품에 깊이 달려들고 있었다.
평소라면 분명 '그럼 가지 말까 아빠?! 난 딸내미가 더 중요해!' 하고 말했을 아저씨가 그런 농담 한마디 하지 못한다는게 굉장히 중요한 일임에 분명했고, 내가 멋대로 그런 공적인 일에 펑크를 낼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날 난 잠들때까지 몸에 있는 수분을 전부 짜 낼 정도로 눈물을 많이 흘린 뒤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로 잠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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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쌓인 것이 있을 때는 그냥 속 시원히 울면 된다고 누가 그랬었지. 정말 그 동안 힘들어 하던 것을 하루 종일 우는 것으로 풀고 나니, 다음 날 아침엔 웬지모르게 고뇌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이 맑았다.
"으와... 장난 아니다."
다만 몇 시간을 울어버린 탓에 퉁퉁 부은 눈이 부작용으로 남아버렸지만 말이다. 쉬는 토요일이 아니라서 학교에 가야 하는데 이 상태로 학교에 갔다간 하나의 폭력 사건을 새로 만들어 내야 할 지도 모를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난 선생님께 꾀병을 시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여보세요? 선생님. 저 윤하에요..."
난 최대한 아픈 척을 해 가며 선생님께 못 가겠다고 전화를 드렸다. 어제까지 멀쩡했던 애가 갑자기 결석한다는게 좀 수상하긴 하셨겠지만, 다행히 담임선생님은 알겠다며 월요일에 학교와서 설명해 달라고 하실 뿐, 깊이는 묻지 않으셨다.
'집에 혼자라... 그러고보니 어렸을 때부터 난 혼자 있었던 적이 없구나.'
아침부터 학교도 안 가고 집에 혼자 덩그러니 있으려니 웬지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남아버린 것 같은 고독감이 밀려왔다. 거실 소파에 따뜻한 이불을 돌돌 말고 누운 채로 티비를 보고 있었지만, 웬지모르게 한기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늘 가족들 아니면 친구들과 함께 있었던 나로서는 생각보다 견디기 힘든 고독이었다. 아저씨가 출장가시면 2년동안 집에선 혼자 이런 고독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할 정도였다.
"싫다..."
나도 모르게 오한이 들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알수없는 두려움이 자꾸 나를 괴롭혔기에, 난 자꾸만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소라게처럼 머리만 빼꼼 내민 채로 난 멍하니 허공만 바라봤다.
'외로워.'
갑작스럽게 또다시 감정이 복받쳐 오르려 하는데, 내 눈이 가득 눈물을 머금었을 때 쯤 현관에서 난폭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딩동]
한 번으로 시작된 초인종 소리는, 내가 현관문을 열려고 눈물을 훔치기 시작하자마자 찾아온 사람을 알 수 있게 했다.
[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
나는 엄청나게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서둘러 달려나가서 인터폰을 확인했다. 아니나다를까, 그곳엔 재희가 우주와 가희를 데리고 와서 인터폰 렌즈를 녹여버릴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현관문을 열어주자마자 가희가 나에게 와락 달려들어 온몸을 부벼댔다. 그녀는 무슨일 있는거 아니냐고 안은 채로 다섯 번을 넘게 질문하더니 내 눈을 보고는 꺄악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힘없이 계속해서 괜찮다고 말 했지만, 녀석들이 자기들끼리 눈병이네 마네 멋대로 추측하고 있어서 하나도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얼마나 운 거야? 몇 시간을 울면 눈이 이렇게 되는거야."
녀석들의 논쟁 사이에서 간신히 울었다는 얘기만 했더니, 가희가 날 침대에 눕히고는 냉장고에서 가져온 얼음으로 대충 만든 찜질팩을 내 눈에 문질러주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3년을 함께했던 친구나 되서 지금까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못 알아챈게 너무나도 미안했던 모양이다. 아니 그전에 자초지종을 좀 들으라고 이 자식들이 진짜.
하지만 내 눈 상태를 보고 더욱 충격을 먹은 건 재희였다. 그때만은 아무리 눈치가 없는 우주라도 재희가 입을 떠억 벌리고 충격에 마음을 추스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챘을 정도였으니까 굉장히 놀란 것 만은 분명했다.
우주와 가희가 잠시 점심 준비를 해준답시고 부엌으로 가자, 요리는 문외한이었는지 재희는 내 옆에서 계속 우물쭈물하다가 내가 눈에 올려둔 찜질팩을 들어내고 몸을 일으켜 앉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건데,"
이제야 좀 눈의 붓기가 풀어져서 눈 깜빡이기가 편해진 나는, 녀석이 말하기 시작하자 그냥 녀석을 꿈뻑꿈뻑 쳐다보기 시작했다.
"혹시 그날 공원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이렇게 우는 거야? 정말 그런거야?"
얼씨구 이게 말이야 방구야. 이게 정말 그렇게 눈치 빠르고 내 생각 막 읽어내던 한재희 맞냐? 언제부터 너가 그렇게 남 처지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됬더냐.
"무슨 소리야 너?"
나는 최대한 어리둥절한 척 하면서 녀석이 다음에 할 말을 재빠르게 이끌어냈다. 어째서인지 오늘의 녀석은 내게 끌려다니고 있는 느낌이라서, 이런식으로 하면 재희가 쉽게 속마음을 드러낼 것만 같았는데 진짜였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내가 두 번째 부인 하라고 해서 이렇게 펑펑 우는거 아니냐구.."
푸...푸흡...그...그얘기가..큭..왜 여기서....후큽흡...
"내가 그렇게 좋으면 말이지, 널 첫번째 부인으로 삼아줄 수도 있어. 내가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줄게!"
나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입을 틀어막고 호흡을 조절하여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어깨를 들썩거리는 정도로 간신히 참아내고, 최대한 아니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뭐...뭐야?!'라고 말하는 듯한 녀석의 표정을 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난다는데.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