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다행히 책상에 머리를 부딪칠 정도로 강하게 민 건 아니여서, 나는 놀란 표정으로 바로 고개를 그녀쪽으로 돌렸다. 날 너무나 좋아하는 가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난 괜시리 겁부터 났다.
'얘가 혹시 나랑 재희랑 얘기하는 걸 봤나?'
아마도 옆에서 보고 있었겠지만, 혹시 질투하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그녀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중학교를 다닐 당시 남자와는 거의 담을 쌓고 지내왔던 내가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재희가) 생판 모로는 남자 하나와 속닥거리고 있으니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누구야? 아는 애?"
가희는 앞에 앉은 재희를 가리키며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난 그제서야 재희 녀석이 왜 사촌이라고 둘러댔는지 이해했다. 원래는 생판 모르는 남이어야 할 사이인데 몸이 바뀐 탓에 꽤나 깊이 알고 있는 사이가 되어 버렸으니, 이런 복잡한 전후사정을 설명하지 않고 별다른 오해도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간단히 둘러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난 녀석의 깊은 생각에 감탄하며 재희가 가르쳐준 대로(?) 가희에게 일러주었다.
"아, 응. 사촌이야. 최근에 연락이 별로 없어서 이렇게 가까이에 사는 지 몰랐거든."
내가 생각해도 이 변명 이상의 변명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새삼 놀라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주랑 대화하던 재희 녀석이 뒤를 보더니 나에게 말했다.
"윤하야, 이따가 점심이나 같이 먹자. 딱히 같이 먹을 사람도 없지?"
어째서 내가 혼자 점심을 먹을거라고 단정짓는거냐 이 말아먹을 녀석아. 그래도 같이 먹을 사람 바로 옆에 있거든요? 최가희라고. 아니지, 설마 이녀석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하필 가희가 왔을때 나한테 말을 걸어온건...
"아니, 난 가희랑 먹으려고..."
그러나 반박하기가 무섭게, 녀석은 내 말을 잘라먹더니 순식간에 가희까지 점심식사에 초대해 버렸다. 안돼 이렇게 꼬이면 나만 귀찮아진다고옷-!
"그럼 둘 다 가면 되지, 나도 우주랑 갈거니까. 점심 먹는데 남자 둘에 너 혼자 있으면 심심할거 아냐."
내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재희의 화려한 언변에 우리 둘과 관계있던 모든 사람을 하나의 그룹으로 만들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이녀석 정말 막무가내야!'
아무리 생각해도 재희와 함께 있으면, 뭔가 굉장히 꼬일 것만 같아서 가희에게 거절하자고 하려고 했지만, 가희는 이미 녀석의 시원시원한 성격이 약간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어쩌면 원래 자신이 좋아했던 캐릭터에 대한 당연한 호감일 지도 몰랐다.
"같이 갈래 윤하 친구?"
"음... 좋아! 같이 먹지 뭐. 난 최가희라고 해."
"아까 들었지. 난 재희야, 한재희."
난 일이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느끼고 막아보려고 했지만, 방해하려는 나를 도와줄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어보였다. 이미 세 사람은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서 어쩔줄 몰라 나만 허둥대고 있는 꼴이었다.
"얜 니 친구야?"
"응. 나우주야."
게다가 평소에 말수 없이 조용한 우주마저 이 그룹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는지 살짝 미소를 띄며 조금씩 말하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같이 지내온 나는 그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아마 이 그룹으로 인해 내 고등학교 생활은 꼬일게 분명해. 예지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생긴지 얼마 안 된 여자의 감(?)이 이 녀석들과 함께 놀면 안된다고 엄청나게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어...
*
4교시 단축 수업이 끝나고 학교 밖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은, 지금껏 걸어왔던 그 어떤 길보다 더욱 길게 느껴졌다. 일편단심 나만 좋다고 그동안 수도 없이 말해왔던 가희는 계속 재희랑 깔깔거리고 있고, 재희 녀석은 더 우쭐해서는 주구장창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앞에서는 둘이서 재잘대고 있었던 터라, 뒤쪽으로 밀려난 나는 우주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우주와 얘기하고 싶은게 정말 산더미 같이 많았지만, 윤하인 상태로 녀석에게 과거 얘기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혹여나 그렇게 된다 치면 현재 재희의 정체도 탄로날테고 말이지.
"그래서 그 때 이 사람이 어떻게 했냐면-"
정말 인상을 쓰고 싶지 않아서 얼굴 근육을 최대한 이완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썹이 자꾸만 조금씩 치켜올라가고 있었다. 남자 한재희는 원래 경박한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뭔가 자꾸만 내 고상한 이미지가 망가지고 있었다.
"헐 진짜? 대박."
게다가 아까부터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하며 앞만 보면서 걷고 있긴 했지만, 왼쪽 높은 곳에서 자꾸만 시선이 느껴졌다. 너무나도 강렬한 안광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시선이 오는 곳을 확인했다.
'응? 요거봐라?'
그러나 우주는 언제 날 보고 있었냐는 듯 앞을 보고 걷고 있었다. 내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면 시선이 느껴졌고, 다시 우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녀석은 앞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대 여섯번을 허탕을 치고 나자, 목이 고통을 호소해왔다.
'아오 이자식 키가 너무 크단 말이야.'
우주가 날 보고 있다는 심증은 가득했지만 물증을 잡지 못한 채로 우린 학교 근처 분식집에 도착했고, 밥을 먹으면서까지도 나는 재희의 끝없는 수다와 우주 녀석의 강렬한 시선을 힘들게 이겨내야 했다.
내가 집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그 이후로도 재희 녀석에게 노래방, 오락실 등등을 한참이나 끌려다니고 난 뒤였다. 헤어지면서 가희가 한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희 정말 너무 재밌는 것 같아. 앞으로도 계속 같이 다니자!'라니.. 난 아마도 앞으로 3년동안 이 녀석들에게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가보다.
"첫날부터 녹초가 되다니..."
특히 윤하의 몸으로 노래를 부를 때는 기분이 굉장히 오묘했다. 윤하가 노래를 불러주는 걸 듣고 있는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내가 부르고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 말로 설명하기엔 상당히 까다로운 느낌.
거실 소파에 한참 누워있다가 시계를 봤다. 아직 아저씨가 오시기엔 시간이 조금 남아서, 일단 씻고 식사 준비를 해 놓으려는데,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후다닥 거실로 나가서 핸드폰 액정을 본 나는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발신 : 도둑놈]
"굉장히 받으면 안될것같은 예감이 드는데..."
그때당시 내 심정이 어땠냐면, 핸드폰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게 보일 정도였다. 물론 실제로 검은 기운이 나왔다는 건 아니지만, 나의 무의식이 지금 걸려온 전화가 굉장히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뭐야, 뭔일이야."
[여. 윤하야.]
이 녀석도 이제 나를 윤하라고 부르는 것에 완전히 적응한 듯, 둘만 있을 때에도 그냥 윤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무슨일이야. 하루종일 끌고다녀놓고 아직도 할말이 남았냐, 나도 좀 쉬자 좀."
[흠. 그게 사실은 말이지...]
그런데 그당시 전화를 건 녀석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에겐 단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굉장히 자신없는 목소리였다.
[나 사실, 가희를 좋아해]
응 그래 가희가 좋...
"...아가 아니지 뭐시라고라?"
뭔가 생각하다 말고 말이 나간 느낌이 들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지. 이 자식이 도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거야? 어안이 벙벙해진 내게 녀석의 2차 공격이 들이닥쳤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너같으면 안 놀라겠어? 내 몸을 뺏어간 서윤하께서 지금 자기의 제일 친한 친구를, 그것도 여자애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뭐가 이상해? 난 이제 남자고, 그러니까 가희랑 나랑 사귄다고 별 문제 없을 거 아냐. 난 몸 바뀌어서 오히려 잘 됐지.]
아니지 이자식아. 그 몸은 내꺼니까 내 몸 가지고 맘대로 연애하면 안 되는 거잖아, 언제 돌아갈 지도 모르는데! 그 몸의 주인은 나라고 나, 너가 아니고!!
[이제 그만 좀 포기해 너도, 하루이틀도 아니고. 좀 그냥 그냥 여자의 삶을 즐기면 안 되냐? 남자친구도 만들고]
하지만 녀석의 마지막 마디를 흘려들으며 나는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그랬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빈틈없이 완벽했던 녀석의 약점을 드디어 잡은 것이었다.
[여보세요? 어이? 뭐해. 자냐?]
'큭큭.. 이녀석, 넌 나한테 이 말 한게 가장 큰 실수다. 내일 안에 이걸 기회로 반드시 내 몸을 되찾아주지! 각오해라 한재희!!'
속으로도 흐뭇한 나의 계획을 생각하며 나는 전화기가 바닥에 떨어진 것도 모른 채 허공을 향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몸이 되돌아오면 즐기게 될 나의 해피한 남자 고등학생 라이프를 상상하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우하하하하하하, 와하하하하하!!"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 왜그래? 너 진짜 미친거야?]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으로부터 들려오는 재희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원래 하려던 저녁 준비도 잊어버린 채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2.완벽한 그놈의 은밀한 비밀>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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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보다 조금 늦어지게 되어 죄송합니다. 어제 술자리가 있어서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