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다시 눈을 뜨니 어느새 선생님이 들어와 계셨고, 이것저것 안내사항을 전달하고 계셨다. 다행히 깜빡 잠들긴 했어도 오래 잔 건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은 안경을 쓰신 평범한 여선생님이었고, 상당히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수수한 분이셨다.
"자 그러면, 첫날이니 선생님은 긴 말 안하고 여기까지 할게. 음... 새 학교, 새 학년에 새 학긴데 자기소개나 하도록 할까?"
그 말에 학생들의 야유소리가 교실안에 울려퍼졌다. 요샌 생각보다 자기소개 하는 학교는 드물었으나, 뭐 선생님들에 따라 다르니 뭐... 그리고 급우들을 서로 인사시킴과 동시에 선생님이 학생들을 간단히 파악할 수 있는 무난한 방법이기도 했다.
복도쪽 제일 앞에 앉은 학생들부터 차례차례 소개를 하기 시작했지만, 잠에서 막 깬 나는 자기소개 같은건 관심 밖이었다. 순서가 돌아오려면 한참 멀었을 뿐더러 다시 떠오른 걱정거리들이 머리속을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이어다.
'큰일이다. 정말 큰일이다. 가희는 어떻게든 달래야 하고, 내가 심심해서라도 아무리 다른 몸이라지만 내 절친인 우주랑은 다시 친해져야만 하고, 게다가 내 앞에 계신 도둑놈에게서 내 몸까지 돌려받아야 하고... 나 어쩌다가 이렇게 고생문이 활짝 열렸지?'
다행히도 가희는 걱정한 것 처럼 내가 자기 것이니까 넘보지 말라는 둥의 자기소개는 하지 않았다. 일단 고비를 하나 넘긴 셈이었다. 소개를 마치고는 그녀는 자리에 앉더니 왼편의 나를 보며 윙크를 날렸다. '나 잘했지?'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래 착하다 착해.'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걸 본 순간 가희의 표정이 달려들고 싶어 미치겠다는 무언의 욕구를 마구마구 표시해 왔지만, 부담스러워진 나는 차마 그녀를 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 앞의 재희에게로 돌려버렸다.
아 참고로, 이제부터는 내가 부르는 호칭을 약간 바꿀 예정이다. 몸이 바뀐 상태에다가 언제 돌아갈 지도 모르니, 바뀐 대로 내 몸에 있는 윤하는 재희로 날 윤하로 부를 생각. 뭐 굳이 이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솔직히 알려주는 나도 점점 헷갈리고 있기 때문에 바꿔 불러야겠다.
"안녕, 한재희라고 해. 출신 중학교는 영운중학교이고, 축구를 굉장히 좋아하거든? 아마 축구동아리에 가입할 것 같은데, 그 외에 다른 운동도 좋아하니까 관심 있으면 말 걸어줘. 이상입니다!"
재희의 자기소개 때문에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난 절대 운동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다만 타고난 능력치가 너무 뛰어난 탓에 그만큼 남들 많이 할 때 난 조금만 해도 비등비등하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었던 것 뿐이다.
'하지만 이놈은 운동 바보였던건가.'
솔직히 처음 윤하 몸으로 생활하기 시작했을 때도 여자인데도 원래 내 몸이랑 엇비슷한 근력에 깜짝깜짝 놀랐는데, 그게 다 저녀석이 운동을 좋아해서 몸에 잔근육이 많이 쌓여있기 때문이겠지.
"자 그럼 다음~?"
어느덧 재희 뒤에 앉은 내 차례가 되자, 나는 조심스럽게 의자를 밀고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서윤하라고 합니다. 세림중학교 출신이고, 독서를 제일 좋아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니까,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반 아이들이 나에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잘 몰랐다. 난 분명 모두들 처음보는 사이이고 어색한 사이니까 친해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사실 재희, 가희, 나 이렇게 셋은 꽤나 알려진 상태였다.(이런저런 의미에서)마지막으로 창가쪽 가장 뒤에 앉은 우주의 소개도 모두 끝나고 나서 학기초에 절대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오고야 말았다.
"자 그럼, 새 반장이 뽑히기 전까지 우리 반 일을 좀 도와줄 임시 반장을 뽑아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 혹시 지원해서 할 사람 있니?"
예상한 대로 모두들 우물쭈물 하며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뭐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서 보통 출석번호 1번이 하곤 했지. 선생님들도 이런 걸로 굳이 시간 오래 끌지 않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게 가장 간단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웬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던 나의 예상대로, 재희녀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이 고집불통에 독불장군인 녀석이 임시 반장을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든 것이었다.
"오... 재희..였나? 재희가 그럼 2주 동안 선생님좀 도와 줄래?"
"네. 잘 부탁 드립니다!"
선생님이 혹시나 해서 더 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 물어봤지만, 아이들은 당연하게도 손을 들지 않았다. 다들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 재희에게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솔직히 저녀석이 뭘 하고 싶은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나서서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심경이 참 복잡하다. 그냥 단순히 나서기 좋아하는 바보일 뿐인건가?
"그럼 다들 사이좋게 지내고, 오늘 수업은 4교시까지만 하고 종례니까, 다들 수업 끝나고 기다리고 있어라~"
선생님께서 나가자마자 나는 앞에 앉은 재희의 뒤통수를 꾹꾹 눌렀다. 어서 이쪽을 보란 말이야 이녀석아. 난 원한다 대화를.
"응? 왜."
왜라니, 내가 지금 말할게 산더미같이 쌓여있단다 요 깜찍한 녀석아. 근데 교실 안에서 언성 높이긴 싫으니까 밖으로 나가자는거지.
"잠깐 밖으로 나와봐."
"싫은데. 할말 있으면 여기서 해."
이 망할 녀석의 귀릅 잡아당겨 엄청난 고통을 주고 싶었지만, 난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침착하게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은 아까 우주에게 둘러댔던 사촌이라는 호칭에 대해서였다.
"사촌이라니, 너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그런 거짓말을 한 거야?"
내가 질문하자, 녀석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대답했다.
"왜? 안되는 이유라도 있어?"
"아니 그게... 나중에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들킬 수도... 있으니까..."
딱히 안되는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우물쭈물하자, 언제나 그랬듯이 녀석이 나보다 한 수 위의 말빨로 나를 밀어붙였다.
"뭐 어때. 툭 까놓고 말해서 너랑 나랑 사귈 것도 아닌데."
우와... 정곡을 완전히 찔렸다. 나는 어떻게라든 녀석과 한 단계라도 진전하기 위해서 사촌이라고 설정되버린 관계를 무너트리려고 한 건데, 이녀석 나의 취약부위를 너무 잘 꿰고 있잖아!
"그, 그야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늘 이성적이던 나도, 이 녀석과 말만 하면 괜시리 흥분하는 경향이 있어서 평정심을 유지 못 할 지경이었다. 이번에도 고새를 참지 못하고 버럭 해버렸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늘 하던 그걸로...
"그.. 그리고, 빨리 돌려줘 내 몸."
"싫네요."
언제나 그랬듯이, 하루에 한 번 꼬박꼬박 재희를 향에 요구하는 것이지만, 당연하게 거절당해버렸다, 젠장. 이 놈은 너무 가드가 완벽해서 빈틈이 없단 말이야. 내가 반드시 이달 안에 네녀석 약점을 잡아다가 정말 원래 몸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버리겠어.
매몰차게 나에게 거절을 때린 녀석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옆에 앉아있는 우주와 다시 얘기하기 시작했다. 둘이 무난하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분명 방학때 꽤나 친해진 것이 분명했다. 원래 저 자리에 앉아서 우주와 얘기하고 있어야 하는 건 나일텐데...
서글픈 현실에 한숨을 쉬면서 책상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등에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와락]
"윤, 하, 야~♡"
아니나다를까, 조례시간의 그 얌전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있는 가희가 내 등에 D컵 정도 되는 커다란 가슴을 들이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