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 *
내가 굳센 다짐을 한 뒤 녀석을 다시 만난 것은, 내가 1년을 보내게 될 영운고등학교 1학년 2반 교실이었다. 운 좋게도 재희와 같은 반이 된 나는 단순히 그 상황에 기뻐하며 다른 급우들의 이름을 확인하지 않았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딱드리게 되면, 사람은 일단 이성을 추스리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쉽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엄청난 마인드 컨트롤을 발휘하여 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기야 하겠지만, 열이면 아홉은 이 마인드 컨트롤을 쉽게 성공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황하면 실언이 나오는 것이고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다행히도 나의 경우는 마인드 컨트롤에는 성공했지만...
"에에에에에엑?!!"
격하게 튀어나오는 이 목소리만은 내 이성도 막지 못했다.
"쉿, 쉿! 얘가 왜이래?!"
분명 교실에는 내가 예상했던대로, 내 모습을 한 윤하가 덤덤하게 앉아 있었으나,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또 있었던 것이었다.
절대로 날 따라오진 않겠지 하고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가희가, 우리 고등학교의, 그것도 우리 반에 떡 하니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당황해서 소리를 지르자 가희는 후다닥 날 끌고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너 어떻게 된거야? 세림여고로 가기로 했던거 아니었어?"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굉장히 놀란 나는, 복도로 나가자마자 다짜고짜 버럭버럭 화를 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찰거머리같은 가희를 떼어놨다고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젠장, 다 좋았는데 마무리가 역시 좋지 못했던 것인가...
"그게... 사실 계속 고민하고 있어서 말 안했는데, 역시 윤하 너 없인 안되겠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나를 꽈악 껴안았다. 차마 겉으로 신음소리를 낼 수 없었던 나는 속으로 '으아아아아-'를 연신 외쳤다.
가슴과 가슴이 부비적거리며 이상야릇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뭔가 우정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 정열적으로 포옹하고 있는 미녀 둘을 보면서 주변의 학생들이 속닥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안돼, 이대로 가희한테 묶여버릴 순 없어! 반사적으로 그녀를 밀어내고 안전거리 2m를 유지한 뒤, 난 조곤조곤 말해주었다.
"너 지금 굉장히 오해받을만한 행동 하고 있다는거 알지?!"
그러나 그녀도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요량인지, 다시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귓속말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그녀가 상식 있는 사람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어떻해 그럼. 너의 그 부드럽고 폭신하고 몰캉한 느낌이 자꾸 손에서 아른거려. 하루라도 만지지 않으면 내 손에 가시가 돋을지도 모른단 말야."
이 아가씨 이거 중증이네. 안되겠어,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내가 곤경에 처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마구마구 솟구친다.
"그리고 중학교 내내 윤하는 내 소유였으니까, 고등학교에서도 내 거라는 도장을 찍어놔야지."
잠깐, 무슨소리를 하는거야 지금 내가 물건이냐! 내가 왜 너의 소유물이 되어야 하냐고 엄청나게 따지고 싶지만 보는 눈이 있어서 내가 지금 아무 말 안하고 있는 거지, 너 이따가 하교할때 가만 안둬 진짜.
"무슨소리야...!"
"어정쩡한 남자애들에게 여자친구로 팔려가느니 나랑 있는게 낫다고 생각 안 해? 고등학생이 되서 더욱 아름다워진 네가 뭇 남학생들의 혼을 빼놓을까봐 난 그게 너무 걱정이 되는걸..."
다시한번 말하지만, 그래도 또 한번 더 말하겠지만, 난 절대로, 저-얼대로 남자랑 이러콩저러콩 할 생각이 없다. 내가 원래 남자였던데다가 여자인 가희가 달라붙는 것 조차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감히 남자를 안거나 포옹하거나 더 나아간 행위를 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아, 아저씨는 예외고!
어찌됐던 이대로 뒀다간 그녀가 폭주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가희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절대 부정을 담은 꿀밤을 한 대 먹이고 그녀를 교실로 밀어 넣어 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이상집착에 못을 박는 한 마디까지 해 주었다. 도대체 윤하 녀석이 어떻게 대해줬는진 모르겠지만, 난 정말 확실하게 선은 그어야겠다.
"말도 안돼는 소리 하지 말고, 이상한 소문 퍼질까 두려우니까 너무 달라붙지 마!"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하며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를 매몰차게 외면 한 뒤 자리에 앉아 간신히 좀 쉬려는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윤하였다. 못본 몇주 사이에 도대체 뭘 한건지, 내 원래 모습과는 인상과 태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요오, 일찍 왔네?"
내 몸으로 행동하는데 어떻게 생각해도 방해꾼인 나를 당연히 외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반응은 의외였다. 녀석은 내 앞자리에 털썩 앉더니, 뒤를 돌아서 나에게 씨익 웃으며 인사했다.
우와, 정말 내가봐도 내가 저렇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니 뭔가 굉장히 사악해 보인다. 난 살면서 저런 표정 한번도 안 지어봤던 것 같은데...
"안녕."
그동안 한 짓을 생각하니 별로 반응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나는 뾰루퉁하게 대꾸한 뒤, 그대로 책상에 엎어져 자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윤하에게 굉장히 화가 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꿉친구였던 우주가 윤하 옆에 떡 하니 서 있었기 때문에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파묻은 것이었다.
'맞다, 우주도 이 학교였지. 이 둔탱이 녀석은 내 몸이 지금 도둑맞아서 딴놈이 들어가 있는데도 아직 나로 알고 있는건가?'
11년지기 친구인 우주라면 웬지 이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려줄 줄 알았으나... 역시 무리였나보다. 우리 부모님도 그냥 성격에 변화가 온줄로만 아는데, 둔하다면 제일가라인 나우주 이녀석이 알아챌 수 있을리가 없지, 아마 이 꼴로 100년이 지나도 절대 못 알아볼 것이다. 아, 아니다 아마 죽기전에 내가 먼저 말할 지도 모르겠군.
'키는 고새 더 컸네... 키만 멀대같이 큰 바보같으니...'
바보라고 한 의미는, 머리가 나빠서 한 말이 아니다. 이 녀석이 정말 눈치가 너무너무 없는, 옆에서 자기 험담을 해도 못알아들을정도의 눈치계의 이단아, 답답함의 최강자였기 때문이다. 키도 크고 생긴건 연예인 뺨치게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나우주 씨가 여지껏 애인 한 명 사귀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부재중인 눈치 때문이었다. 11년동안 지켜봤던 나로선 고등학생이 되면 없는 눈치가 좀 생길거라 생각했는데, 나의 오산이었던 모양이다.
"아는 사이야?"
"아 참. 넌 첨 보나? 옆동네 사는 우리 사촌이야."
응? 잠깐 어째서 내가 니녀석 사촌이 되는거야. 말이면 다냐?!
"아하.. 어쩐지 처음보는 얼굴인데 네가 아는 척 하길래 누군가 했지."
난 자꾸 대화에서 내가 언급되자 하는 수 없이 슬쩍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우주 쪽을 보고 살짝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녕."
"나우주야, 잘 부탁해."
눈치는 없지만 그래도 교양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이라서 그런지 첫 인사부터가 남다르다. 웬지 대충 인사한 나를 찔리게 하는 녀석의 인사에, 난 다시금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년지기 친구인데도 마치 처음 만난 사람마냥 어색하게 인사해야 한다는 사실이 약간 내 맘을 쓰리게 했다.
"서윤하야. 내가 어제 잠을 못 자서.. 다시 잘게."
내가 다시 고개를 파묻기 전까지 우주가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슨 상관이랴. 나는 완벽하게 편안한 자세를 유지하고 자는척을 하다가 긴장의 끈을 놓고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