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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7화 (7/188)

7화

"아... 아빠.... 아...하하하"

약간 겁에 질린 모습으로 화가 나 있는 내 모습을 본 아저씨는 굉장히 움츠러드셨다. 아니 뭐 대단한 일 일어난거 아닌데..

"왜그러니 윤하야. 화 많이 났어? 아빠... 때문은 아니지?"

아저씨 반응을 보자니, 그간 윤하가 아저씨께 얼마나 험하게 대했는지 대충 감이 왔다. 이 몸 도둑이라는 사람은 성격도 굉장히 지랄맞은 모양이었다. 너무나도 정상적인 개념을 갖추고 너무나도 정상적으로 부모님을 극진히 모셔왔던 나 한재희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는 걸 새삼 느꼈다.

"화 안 났어요. 좀 안 풀리는 일이 있어서..."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어보이고 있자니, 아저씨는 그제서야 긴장을 푸시고 점심 얘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뜬금없이 이른 낮 시간에 돌아오신 이유가 궁금해져서, 부엌에서 뭔갈 만들기 시작하신 아저씨의 등 뒤로 가서 무얼 만드시나 빼꼼 살펴보면서 물었다.

"어라, 근데 아빠. 오늘 출근하시는 날 아니었어요?"

"응 출근일은 맞는데, 오늘 그냥 조퇴했어. 뭔가 꺼림칙하더라."

사정을 들어보니, 일을 하고 있는데 직장에서 사용하는 머그컵을 실수로 깨트리는 바람에 웬지 내가 걱정되서 집에 오셨다고. 거 있잖소, 자기가 아끼는 물건이 갑자기 깨지거나 하면 왠지모르게 내 가족들에게 문제가 생길 것 같은 불길한 느낌.

"그래서 혹시 윤하한테 무슨 일 있나 싶어서, 걱정되서 달려와봤는데... 멀쩡하네?"

악몽을 꿨으니까 안좋은 일이 있는 건 맞지만... 제가 생각해도 멀쩡해 보이긴 하네요. 악몽 꾼게 피부에 검은 반점이 피어나듯 티가 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아저씨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서 소리까지 버럭 질렀으니 얼마나 기분이 묘하셨을까...

"하하하..."

난 허탈하게 웃으며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난감한 상태의 내가 짓고 있는 표정을 아저씨도 짓고 있었는데, 우연히 같은 표정으로 눈이 마주치자 굉장히 웃겼다. 아저씨는 칼질 하다말고 웃음보가 터져서 칼까지 내려놓고 입을 막은 채 '쿠흑..큭..크크큭.'하고 웃엇고, 난 찔끔 눈물이 나는 걸 막지 못하고 바닥에 쭈그려앉아 끅끅대고 웃었다.

그렇게 서로 한참을 웃고 나니까 악몽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고, 윤하 때문에 살짝 망므고생한 것도 한결 홀가분해졌다.

"고마워요 아빠."

방법이 어찌되었든 슬픔을 덜어준 아저씨께 가볍게 고맙다고 하며 뒤에서 안아드렸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저-얼대로 남자를 안고 싶어서 포옹한게 아니고, 나의 답답한 부분을 풀어준 아저씨가 너무나 고마워서 보답한 것이다.

"나 샤워좀 할게요. 점심은 뭐에요?"

씻고 나오면 알게 될거라며 일단 씻고 나오라고 나를 욕실로 밀어넣은 뒤 아저씨는 욕실 안쪽의 내게 살짝 귀띔을 해 주었다.

대충 무슨 메뉴인지 감이 온 나는 바로 옷가지를 훌렁훌렁 벗어버렸다.

'그래. 이렇게 나 혼자 정신공격에 쓰러지면 안 되지.'

따뜻한 물을 틀어놓고 거울을 바라보던 나는, 뜨거운 물의 김으로 거울이 흐려질 때 쯤 눈을 살짝 떴다. 차마 대놓고 보진 못해도, 나도 내가 바라던 이상형의 누드 정도는 볼 수 있지 않냐는 생각에서였다. 마치 비너스같은 우윳빛 아름다운 몸의 실루엣은 보는것만으로 숨막힐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서윤하. 그땐 날 잘도 놀려먹었겠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는 몇 주 전 말만으로 나를 넉다운 시켰던 그녀가 떠올라서 복수심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녀의 몸에 해코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약간 미안하긴 했지만, 그녀의 언행으로 보아 이런 건 크게 문제되지 않다고 내 나름대로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내 몸으로 어디까지 갔을지 몰라 두렵기도 하고...

'좋아. 니가 그날 말한대로 해 주지.'

내가 상상하고 있던 윤하라는 여자의 모든 이상적인 모습을 박살내는 행위였지만, 나는 그녀가 카페에서 내게 했던 선정적인 문구들을 되뇌이며 '이건 단순한 복수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일련의 행위들에 정당성을 어떻게든 부여하려 했다.

"아-앙-!"

신음 소리를 내다가 정신차리고 내 입을 스스로 막았기에 망정이지, 혹시나 아저씨가 듣기라도 하셨다간 큰일 날뻔 했다. 아저씨가 소리를 듣고 상황을 알게되었는지.. 나중에 가서 나랑 윤하 몸이 바뀐 걸 아셨다간.. 으 난 아마 팔불출 아저씨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할지도 몰라.

불과 20여분 밖에 안 됬는데도 일어서기도 힘들 지경이 되자, 난 겨우겨우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분명 내가 정말 이 세계에 있는 것이 맞나 싶을정도로 황홀한 기분이었으나, 멍청하게도 뜨거운 물을 계속 맞은 바람에 현기증이 안 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걸로 웬지 윤하에게 한번 이겼다는 생각이 들어서 황홀감보다는 승리감이 날 휘감았다. 좋아, 이걸로 서윤하가 내 몸에 한 짓과 1:1 무승부야!

"어라 윤하야, 괜찮아? 왜이렇게 얼굴이 빨갛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소파에 추욱 늘어져 있는 나를 보고 아저씨가 괜찮냐며 물었다. 말할 힘마저 없었던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도대체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 지 몰라도 밥은 먹어야 했기에 난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얼마나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길래 물 속에 넣은 대파마냥 축 늘어졌어. 뜨거운 물을 너무 맞은거 아니야?"

[펑]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고 있었던 나의 불타는 이마를 만지며 하신 아저씨의 한마디는 욕실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오르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얼마 전 카페에서 윤하에게 한 방 먹어서 정신 못 차렸을 때처럼 얼굴이 불타기 시작했다. 아.. 젠장 할 땐 몰랐는데 끝나고 나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민망하다. 혹시 누가 보거나 듣지나 않았을까 무섭다...

"헉, 윤하야 왜그래! 괜찮아?"

결국 난 그대로 다시 소파에 쓰러졌고, 아저씨는 깜짝 놀라 얼음 주머니를 가져와서 내 이마를 식히는 등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아아... 엄마 아빠... 아들내미 복상사 합니다. 묘비에는 너무 행복한데 부끄러워서 죽었다고 적어주세요.

*

그렇게 다사무난한 일들이 하릴없이 지나가고, 결국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나는 서윤하의 몸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분명 내가 원래 다니던 중학교에서 그녀도 내 몸으로 졸업식을 치렀겠지.

졸업식 후의 2월도 평범한 나날이 계속되었고, 나와 그녀의 문자를 통한 실랑이는 하루도 빠짐 없이 계속되었으나 그녀는 한발짝도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날 압박해왔다.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킬까 걱정하면서도 그녀의 압박으로부터 물러나지 않았지만, 애초에 좋아한다는 패널티를 가지고 시작한 것도 있고 말빨과 눈치싸움에서 모두 밀렸기 때문에 계속해서 나의 열세였다.

당장 우리 부모님에게 찾아가 진짜 내가 여기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갔는데 윤하가 정색하면서 쟤 뭐냐고 하는 순간 아마 난 정신병원에 끌려갈 게 뻔했다. 그냥도 믿기 어려운데 윤하가 방해공작을 펴는 순간 무조건 신뢰불가가 되기 때문에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의미없이 시간은 지나가고, 윤하는 동네에서 나를 우연히 몇 번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깔끔하게 무시해주셨다. 내가 열받아서 따라가서 무시하냐고 바락바락 귀찮게 하면 그제서야 간단히 아는 척, 그리고 끝이었다.

결국 방법은 도망칠 곳 없는 학교에서 그녀를 닥달하는 수 밖에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악당처럼 비신사적인 행위로 강제로 몸을 바꾸도록 협박하는 것은 내 체질에 맞지 않아서, 만나면 어떻게 그녀를 괴롭혀서 몸을 돌려받을까 고민하는 것 외엔 딱히 없었다. 얼마 후 드디어 윤하를 다시 만나게 되는 3월이 되었고, 나는 고등학교에서 다시 시작될 그녀와의 몸 소유권 분쟁을 앞두고 마음을 다잡았다.

"서윤하. 아니, 이제는 한재희지."

누가 날 불러도 이젠 절대 헷갈리지 않을 자신도 있고, 혹시 모를 위기에 대비해 내 이름을 부를 준비도 충분히 해 두었다. 준비 완벽, 기다려라 서윤하!!

"내 몸, 반드시 돌려받고 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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