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1. 서윤하>
졸업여행으로부터 돌아온 지 벌써 한시간 째. 난 아직도 현재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버스에서 내린 뒤 낯선 중학교 교정을 걷고 있었다.
다행히도 수학여행 3일째인 오늘까지 무려 24시간 넘게 생각할 시간이 주어진 덕분에, 여전히 뒤죽박죽이긴 했지만 간신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부터 차근차근 생각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을 머리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은 분명했다.
"일단, 어디로 보나 난 지금 이 윤하라는 애 몸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조그만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운동장 모래 위에 깨작깨작 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어떻게든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수도없이 많이 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다. 나도 이런 판타지 관련 요소는 그래도 쫙 꿰고 있으니까. 그럼 뭐지? 유체이탈? 영혼교환? 심령현상? 환상? 최면? 혹은 마법? 혹은 실제 존재하는 내가 모르는 과학 기술??
한참 생각해보던 나는 발로 모래 위에 그렸던 그림을 슥슥 지워버렸다. 그리고 나서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집어던지며 나는 생각했다.
'젠장. 그런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당연한 얘기였다. 지금은 2009년, 벌써 인류가 최초로 자남극점에 도착한지도 백년이나 지난 첨단 과학 문명 사회인데,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않은가. 정말 가능성 중에 내가 모르는 과학기술로 인한 일이 아니라면..
'하지만, 이 상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상황이 꿈이라면 믿겠지만, 꿈도 아닌 것 같고.'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던 나는 벌떡 일어나 학교를 나서기로 했다. 밤이 되서 날씨가 더 추워진 탓도 있지만, 혼자 있으려니 점점 무서워진 탓도 있었다. 그러나 교문을 나오기가 무섭게 나는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잠깐, 이 꼴로 내 집에 갈 수는 없잖아.'
우리 집이라 함은, 물론 남자 한재희의 집이었다. 그러나 난 지금 여자 서윤하다. 갈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결국 수학여행에서 돌아와 학교에 도착한 지 2시간 만에야 난 가장 상황에 알맞는 해결책을 떠올렸다. 다행히도 비밀번호가 걸려있지 않았던 그녀의 핸드폰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던 '팔불출'이라고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발견했다. 왜 저런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녀의 아버지임에 틀림없겠지.
"아아, 음 아아아-"
벌써 이틀 째 이 몸에 기생(?)해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이 고음의 목소리는 적응이 되지가 않았다. 전화를 걸면서 나는 불안감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뚜루루루...]
밋밋한 통화연결음이 한 5초정도나 울렸을까,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빠르게 받는 통에 나는 약간 당황해버렸다.
[여보세요? 윤하야? 무슨일이니?]
"아, 아빠. 저 그게 집이 어- 읍!"
어이 잠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는거냐. 자기가 자기 집 위치를 물어보다니, 무진장 수상하잖아!
[음? 무슨소리니, 어디 아파?]
"아아- 아, 아니에요."
그나저나, 아저씨의 목소리가 굉장히 부드러워서 나의 긴장을 단번에 풀어주며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팔불출이라더니 생각외로 굉장히 차분하신데?
[그래? 우리 딸이 아플 리가 없지~ 하하. 수학여행은 잘 다녀온거야?]
잠깐 이봐요, 아플 리가 없다니! 아저씨 자식은 여자애거든요?!
"으...응, 잘 다녀왔어요."
[그래? 집에 오고 있겠구나, 맛있는 저녁 해 둘게~ 이따 보-]
"자, 잠깐만요 아빠!!"
전화를 끊으려는 아저씨를 간신히 막은 나는 어떻게든 그녀의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평생 우리 부모님께도 부끄러워서 한번 말 못해본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른스럽지 못한 중학생이라면 당연히 이런 말 잘 못하니깐!
"저... 오늘 저녁 같이 외식하면 안되요? 나.. 웬지 혼자 집에 가기가 오늘따라 무서워서..."
내가 말을 마치고 나서 야 10초의 정적이 흘렀다. 큰일이다, 혹시 원래 윤하와 너무 다르게 말한건가?! 정적이 흐르는 동안 난 실수했다고 생각하며 자책하고 있었는데, 돌아오는 말은 의외였다.
[그게 정말이야? 우, 우리 딸이 웬일이래? 알았다, 학교 앞이지? 아빠 초고속으로 준비하고 갈게!!!]
"에? 아, 알았어요."
초 하이텐션이 된 아저씨의 말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뭐지, 아까까진 전혀 팔불출이 아니었는데 내 말 한마디에 갑자기 팔불출이 됐잖아!
'이 정도의 반응이라는건, 이 애 아버지와 많이 소원했던 걸까나...'
어떻게든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의 전화번호부를 계속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계속 뒤적거리는데 뭔가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아줌마께 먼저 걸어볼 걸 그랬나... 생각해보니 아저씨는 좀 부담스럽네.'
하지만 생각해보니 엄마 비슷한 이름이 전화번호부에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녀가 뭔가 다른 이름으로 저장한게 아닐까 싶다.
"아 잠깐. 혹시 이상한 사람이 날 속여서 납치해 갈지도 모르니 숨어있어야겠다."
물론 그녀가 엄청 매력적이긴 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나오는지 나조차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을 덜컥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최선의 선택이었음은 분명했다. 난 학교 담장 뒤에 몸을 숨기고, 아저씨에 대한 단서가 혹시 없을까 지갑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지갑 구석까지 뒤져 본 뒤에야 난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굉장히 안쪽에 숨겨져 있던 사진엔 몇 년은 된 것 같은 부녀의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고, 그 옆의 아저씨도 그녀를 품에 안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렸을 때도 귀엽네-'
내가 또 잡생각에 빠지려는데, 전화 끊은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아저씨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헉...헉, 윤하야 . 학교 .. 헉, 앞인데 어디니?]
굉장해, 뭔가 엄청난 기대를 하고 오신 것 같은데요 아저씨?! 마치 첫 데이트 하는 소년 같은 텐션이잖아요...
"응? 벌써? 알았어요 전화 끊지 마세요~"
난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담장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아저씨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담장 밖엔 전화를 받고 있는 중년 남성 한 명이 보였다. 얼굴도 사진에서 봤던 것과 비슷해서 난 안심하고 교문 밖으로 나가 가볍게 아저씨의 허리에 양 팔을 감아 안았다.
"다녀왔습니다-"
난 약간 장난끼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아저씨에게 달라붙었다. 원래 내 모습이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행동이었으나, 홀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 떨어져 있다는 불안감이 내가 이렇게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느낌이 들었다.
"딸... 으허허헝-"
"엥? 으엑?!"
그런데 아저씨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더니 펑펑 우시는게 아닌가.
"이렇게 안아본 게 몇년 만인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이쁜 짓만 골라 하는거야... 아빠 감동, 완전 감동..."
아하하하... 웬지 그 동안 그녀가 아저씨에게 어떻게 대해 왔는지가 내 머리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도대체 얼마나 아저씨에게 차갑게 대한 거람?!
"어.. 미안. 오늘 갑자기 너무 어리광을 부리고 말았나..."
"아냐, 딸! 앞으로 계속 어리광 부려도 돼. 아빠는 좋아."
그리고 그녀가 왜 아저씨를 '팔불출'로 저장해 두었는지도 이해가 갔다. 정말 이 아저씨, 내가 그녀 몸에 들어오지 못했다면 계속 딸내미 애교 한번 못보고 재미없게 사셨을 거 아냐? 딱하게도.
"아 맞다. 깜빡하고 있었네. 잠깐만 딸."
아저씨는 들고 온 쇼핑백에서 아이보리 색 목도리를 꺼내더니 내 목에 둘러서 감아주었다. 완전 부드럽네.. 가 아니지, 몇분이나 됐다고 이걸 사올 시간이 있었던 거죠 아저씨?!
그나저나 이거 남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정말,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한 번쯤은 해주고 싶은 상황이 아닌가. 추운 날에 떨고 있는 그녀에게 따스한 목도리라니... 완전 로맨틱!
"땡큐, 아빠."
내가 고맙다며 아저씨의 손을 잡자, 아저씨는 또 그것만으로도 엄청 기쁜 표정을 지으셨다.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에게 이런 행동들을 하는 건 남자였던 나에게 있어 상당히 오그라드는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지금 그녀의 몸에 붙어있는 상황이고, 불쌍한 아저씨를 생각해서 남자의 자존심은 일단 뒤로 하기로 했다.
"그럼 갈까?"
"응"
하지만 아저씨 덕분에 간신히 되찾은 평온은, 집에서 자기 전 샤워를 하면서 다시 깨지고야 말았다. 확실히 그림과 실제로 보는건 뭔가 굉장히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