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부장 아들은 트롯천재-235화 (235/250)

235화. 한 박자 쉬고

“헤헷.”

한 남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방에서 나오는데, 분명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우와!”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손을 잡고 소리쳤다.

“빅보이 형! 팬이에요!”

작년에 쇼미더캐시에서 멋진 퍼포먼스를 펼치며 우승한 남자.

예선전부터 우승 후보로 거론되며 꾸준히 좋은 모습을 펼치다가, 결국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그의 결승전 곡이 연말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려서 매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안녕하세요.”

그에게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소년 같은 미소가 있었는데, TV에서 본 그대로였다.

“나도 덕군 씨 팬인데. 헤헷.”

그의 트레이드 마크. 말끝마다 하는 어색한 웃음소리도 똑같다.

“우와~ 정말로요?”

“정말이에요~ 저 헬로우 트롯맨 매일 보고 있어요. 데스 매치에서 보여 주신 ‘오매불망 장미’는 진짜 압권이었어요!”

눈빛을 보니 진짜인 것 같다. 그는 내가 치렀던 다른 미션 얘기도 했다.

“두번째 라운드인가? 그때 보여 주셨던 무대 있죠? ‘울산역에서’인가? 그건 힙합에서도 응용해 볼 수 있는 무대 같거든요? 덕군 씨가 노래야 당연히 잘하고, 무대 연출 능력이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아, 네 감사합니다.”

이 남자가 여기 왜 왔는지는 묻지도 않고, 그냥 연예인 만난 기분에계속 이것저것 물어보며 덕담만 나눴다.

그 또한 내게 관심이 많아 보였다.

“우리 엄마가 진짜 팬이거든요? 이따가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물론이죠.”

“한 장 말고 다섯 장이요. 헤헷.”

“열 장도 해 드릴게요~ 하하.”

처음 만난 사이지만, 나와 잘 맞는다. 특히, 그의 밝고 편안한 분위기가 좋았다.

보통 힙합 한다고 하면 어두운 분위기를 연상하기 쉬운데, 빅보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게 아마 우승했던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작년이 그의 쇼미더캐시 재도전이었는데, 첫 번째 도전 때와 크게 변하지 않았음에도 이번엔 우승했던 걸 보면 말이다.

시대가 변하듯, 관객도 변해 간다.

“자자, 두 분 인사 다 나눴어요?”

정동희가 끼어들었다.

“빅보이 씨,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29세입니다.”

정동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날 바라봤다.

“덕군, 네가 22잖아.”

“응.”

“둘이 호칭 정리부터 하는 게 어때요? 해야 할 얘기가 많은데.”

난 반색하며 빅보이에게 물었다.

“형이라 불러도 돼요?”

빅보이는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헤이~ 브로~”

빅보이는 손을 내밀었고, 난 그와 손을 잡고 어깨를 부딪히는 래퍼들이 하는 인사를 했다.

“하하. 형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 한참 어린데.”

“그래, 덕군도 말 편하게 해. 형, 동생 하기로 했잖아~?”

“…….”

난 원래 이럴 때면 눈도 깜빡 안 하고 바로 말을 깠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인생에서의 내 나이에 대한 현실감을 갖기 시작하면서 좀 달라졌다.

이젠 윗사람이 말을 놓으라고 해도, 약간의 시간 텀을 둔다.

“천천히 놓을게요~ 아직은 어려워서. 하하.”

전혀 어렵지 않지만, 말은 이렇게 한다. 그래야 예의 있어 보이니까.

“괜찮은데~ 그래, 그래. 덕군 편한 대로 해~”

정동희는 호칭 정리가 끝난 우리를 흐뭇한 표정으로 보다가 말했다.

“덕군아, 경연 전략을 짜는 데 조언을 좀 구하려고 오늘 빅보이 님 모셨어.”

* * *

쇼미더캐시와 헬로우 트롯맨의 장르는 완전 다르지만, 긴장감, 대결, 생존……. 오디션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는 비슷하다.

난 헬로우 트롯맨의 미션을 알고 있었으며,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 왔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정보는 전생에 TV를 통해 시청했던 것뿐이다.

직접 경연에 부딪히면서 TV로 봤던 것과는 달리 고충이 많다는 걸 몸소 깨닫고 있다.

준결승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는데…… 적절한 타이밍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잘 섭외한 것 같다.

난 가볍게 농담으로 응수했다.

“하하, 난 피처링 해 주시려고 온 줄 알았네~”

빅보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피처링 해도 돼요?”

“아, 아닙니다. 농담입니다.”

“아…….”

정동희는 헛기침을 하고 얘기했다.

“너 오기 전에 대화를 좀 나눴거든?”

정동희는 빅보이에게 얘기하라는 듯 눈짓을 보냈고, 빅보이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덕군아. 흠! 말 놓기로 했으니까 편하게 할게.”

“네~ 편하게 하세요~”

“정동희 씨한테 연락받고 좀 당혹스럽긴 했는데, 어쨌든 난 헬로우 트롯맨 애청자이기도 하고…… 네게 좀 도움이 된다고 하기에 왔거든? 아, 물론 맨입으로 하는 건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 가질 뻔했는데, 다행이다.

“형이 봤을 때는, 음…… 뭐랄까. 모든 무대를 결승전처럼 했다고 할까?”

“…….”

“다른 참가자들을 너무 압도하니까. 아, 물론 김종근 씨나 데이비드 강도 압도적으로 잘하기는 해. 하지만 그분들은 한 가지 무기를 갖고 하지, 너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압도하는 게 아니잖아.”

빅보이는 웃으며 말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네가 얼마나 무대에 대해 고민을 했으며, 많은 준비를 했는지가 보이거든. 그래서 네가 모든 무대를 결승전처럼 했다고 형이 말한 건데. 시청자 입장에선 좋아~ 나쁘지 않아. 근데 문제는…… 사람인 이상 고갈되게 되어 있어.”

“…….”

“아무리 오랜 시간을 들여서 무대 준비를 잘해도 그걸 연속해서 보여 주면 에너지가 고갈된단 말이야.”

이 말에 난 약간 놀랐다. 무대 준비가 되어 있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안 거지?

놀란 눈빛을 눈치챘는지, 빅보이는 눈썹을 찡긋하고는 말했다.

“나 같은 꾼들은 보면 알어. 네가 지금까지 보여 준 무대는 단기간에 준비해서 될 게 아니거든. 덕군은 예전부터 시간을 들여서 구상한 무대들이 있는 거 같아. 그걸 하나씩 꺼내 보여 주는 느낌이랄까. 헤헷.”

소름이 돋았다. 정확하다.

“또 하나 문제는 대중들은 길들여져. 이전과 똑같은 센 맛을 들고 나오면 역치가 올라가서 그전보다 약하게 느낀단 말이야.”

빅보이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대화 내용은 아주 냉철했다.

“네가 만약에 준결승에서도 트롯콘서트 무대 못지않은 강렬한 무대를 해 버리면…… 결승전에서 어려워질 수 있어. 김종근과 데이비드 강이 결승전에서 포텐을 터트리고, 덕군이 그들과 같은 수준의 무대를 보여 준다고 가정해 봐. 아마, 네가 그 둘에게 임팩트에서 밀릴 거야.”

“…….”

“애매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빵 터트리는 사람이 계속 잘해 왔던 사람보다 눈에 더 띄는 법이거든. 무슨 말인지 알지?”

빅보이가 웃음기를 빼고 말했다.

“덕군아, 네 목표는 우승 아니니?”

“맞아요.”

“그럼 준결승에서는 약간 힘을 빼는 게 좋을 것 같아.”

난 그냥 단순하게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대에 서는 이상, 가수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그건 내 신조이기도 하다. 빅보이의 말이 이해는 되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 * *

내가 고민하자, 정동희가 옆에서 말했다.

“덕군아, 너 지금까지 너무 달렸어. 위기 없는 클라이맥스는 앙꼬 없는 찐빵이란 거 알지?”

“고구마보다는 앙꼬 없는 찐빵이 낫지 않아?”

“…….”

이 말에 정동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하.”

빅보이는 웃고 나서 말했다.

“위기는 안 되지. 내가 말하는 건 무대를 포기하라는 게 아니야.”

“…….”

빅보이는 검지를 펼친 후 말했다.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는 거야.”

“완급 조절이요?”

“그래~ 지금까지 주 무기로 싸웠다면, 준결승은 보조 무기로 싸워 보라는 거지.”

“…….”

“약한 뒤에 강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거든. 모든 감동의 근본은 강약 조절이라는 거 알지?”

“형도 작년에 그렇게 했어요?”

빅보이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어 버렸지. 준결승 무대가 임팩트가 약했어. 그래서 결승 무대가 돋보였지. 빅보이가 돌아왔다고 하면서.”

“아…….”

빅보이는 작년 쇼미더캐시에서 꾸준히 우승 후보로 거론됐었다. 그랬기에 이런 의도치 않은 전략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랬다가 만약에 떨어지면요?”

힘 빼고 경연을 펼쳤다가 자칫 떨어지기라도 하면…….

“완급 조절이 어렵다는 말이 괜히 나오겠니? 어디서든 중간만 하는 게 가장 어려운 거잖아.”

잘 알고 있다. 회사 생활해 봤으니까. 아주 잘하거나 못하는 게 도리어 쉽다.

“전략을 짜는 데는 모험이 필요한 법이야. 모험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거고. 난 네가 확실한 우승을 거머쥐기 위해서는 지금 이 전략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

빅보이는 시계를 보았다.

보아하니, 약속된 시간이 다 된 것 같다.

“저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아, 네네.”

빅보이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난 고마움에 그에게 인사했다.

“귀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팬심이야. 난 덕군이 우승했으면 좋겠어.”

난 빙그레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화이팅 하자. 급하게 가서 미안해.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괜찮아요~ 들어가세요~”

빅보이는 손을 흔들며 나간 뒤, 잠시 후 황급히 다시 들어왔다.

“아! 사인 열 장.”

“네?

“해 주기로 했잖아.”

“아…… 네. 근데 지금 바쁘시다고.”

“괜찮아. 그 정도 기다릴 시간은 있어.”

“아…… 네.”

* * *

다음 날.

준결승 미션을 앞둔 참가자들은 TV고려 본사에 모였다.

14명의 참가자.

미션 설명을 위해 반드시 모여야 한다고 해서 왔다.

오 피디가 앞에 나와 말했다.

“모두 잘 쉬셨나요?”

3일간의 휴가. 이 패턴의 반복이다. 3주간 빡세게 하고, 3일 쉬고.

그래도 쉴 시간을 줘서 다행이다.

“이번 준결승 미션은요. 트롯콘서트에 비해 준비 기간이 일주일이 짧습니다. 결승전 날짜와 장소가 잡혔거든요.”

―오…… 결승전.

―아직 준결승도 안 했는데, 결승전 날짜가?

“결승전 준비 기간을 충분히 갖기 위해서 준결승전은 준비 기간을 2주만 드리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트롯콘서트 준비하셨던 것보다는 훨씬 수월하실 거예요. 이번엔 개인 대결과 듀엣 대결이니까요.”

개인과 듀엣…….

“준결승은 ‘레전드 미션!’입니다.”

―레전드 미션…….

―레전드 찍으라는 건가?

내용을 알고 있는 난 주변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여러분들은 저희가 선정한 레전드 가수의 곡 중에서 선곡을 해 주셔야 하고요. 그 곡의 주인이신 레전드님들께서 여러분을 평가하실 겁니다.”

―아~ 불후의 명곡 같은 거네~

―거기서 따왔구만.

어느 눈치없는 참가자의 말에 오 피디가 쌍심지를 켰다.

나 또한 헬로우 트롯맨의 준결승 미션이 ‘불후의 명곡’ 프로그램에서 따왔다는 생각은 못 해 봤는데. 역시 집단 지성이란…….

“자세한 설명은 잠시 후에 말씀드릴 거고요. 우선 선곡하기 전에 듀엣 결성부터 해야겠죠?”

―아, 또 시작이네.

―긴장된다…… 결국 두 사람이 상대 평가 받는 방식일 거 아니야.

―보나마나 뻔하지.

수군거림을 무시하고 오 피디가 말했다.

“모두 데스 매치 상대 지목 방식 기억하시죠?”

데스 매치에서는 순위가 높은 사람부터 상대를 지목해 나갔다.

“이번엔 그 역순입니다. 듀엣은 약자 지목으로 결성됩니다.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팀 평가가 아니기 때문에 본인을 돋보이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뭐야 이름만 바꼈지 데스 매치잖아.

―듀엣 대결 말고, 개인전도 있다잖아.

“자, 이제 4위를 하셨던 꽃보다 트롯 팀 나와 주시고요. 제가 호명해 드리는 분은 나와서 지목해 주세요.”

우리 팀 멤버는 아무도 지목받지 않았다.

“다음 3위 종근형님어디가 팀 나와 주세요.”

이번에 허경구가 지목되었다.

아직까지 나와 정진, 덕용이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이러다가…… 내가 정진 아니면 덕용이를 상대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자, 다음 김종근 씨 호명해 주세요.”

우승 후보 중 한 명인 김종근이 마이크를 잡자, 주위 분위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김종근은 지목받지 못한 참가자들을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나와 마주쳤는데.

어?!

그의 시선이 내게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덕군아, 한판 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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