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짧은 휴가(1)
부우웅~
날 태운 정진의 차는 출발했다.
“형, 주차 요금 많이 안 나왔어?”
“주차 요금? 하하! 야, 설마 출연진 차량인데 주차 요금 받겠냐?”
“공연장은 TV고려 게 아닐 텐데?”
“TV고려가 운영하는 호텔은 아니어도 대신 돈은 내줄 수 있지.”
“아…… 지원 좋네.”
“며칠을 있는 건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정진이 운전하는 차는 영종대교를 건너고 있었고, 우리는 묵묵히 앞만 보며 갔다.
난 힐끔 정진의 옆모습을 보았는데, 많이 진정돼 보였다. 한편으로는 기운이 다 빠져 버린 거 같기도 하고…….
오늘 롤러코스터를 가장 많이 탄 사람이니까.
정진이 떨어지는 줄 알고 놀랐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양상두 형님은 잘 갔어?”
“잘 갔겠지.”
“가시는 걸 못 봤네. 인사드려야 했는데.”
정진은 잠자코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화장실 가다가 캐리어 끌고 나가시는 거 우연히 봤거든?”
“…….”
“애들 불러온다니까, 그냥 조용히 가고 싶다고 하시더라.”
왠지 모습이 그려져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만약 양상두의 상대가 정진이 아니었다면 난 양상두를 응원했을 것이다.
나와의 데스 매치에서 패했던 사람이며, 존경하는 트롯 선배 중 한 명이니까.
정진은 곁눈질로 내 얼굴을 살피고는 말했다.
“슬픈 얼굴은 아니셨어.”
“…….”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마.”
“내가 할 소리를 형이 하네.”
우리는 마주 보고 피식 웃었다.
“형은 휴가 동안 뭐 할 생각이야?”
“글쎄다~ 휴가가 워낙 짧아서 뭐 할 수나 있겠냐? 가서 가족들 얼굴이나 보고 오라는 거잖아. 이틀 뒤에 바로 다시 내려가야 하니깐.”
“그렇지, 이왕 주는 휴가 하루만 더 주지.”
정진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근데 뭐~ 재밌으니까.”
“…….”
“난 너희들이랑 함께 이 프로그램 하는 게 너무 재밌어. 하루하루가 아쉬울 정도로.”
“하하, 진짜? 그럼 오늘도 재밌었어?”
“으응?”
허를 찌르는 말에 정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오늘은 끔찍했을 것이다.
풉!
정진은 웃고는 액셀을 밟았다.
“이 자식이 형을 놀리네?”
“어? 어? 형! 안전 운전!”
“짜샤, 황천길을 맛보여 주마.”
부아아앙~
정진의 차는 고속도로 위를 난폭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 * *
“어이 씨, 뭔 운전을 이따구로 해!”
오금이 저린다. 난 도착하자마자, 안전 벨트를 풀고 도망치듯 내렸다.
“하하, 짜식아. 데려다줘서 고맙다는 말은 안 하고. 그러니까 담부터 까불지 마.”
“쳇. 데려다줘서 무쟈게 고맙습니다~ 근데 형, 집에 갈 때는 그렇게 운전하지 마. 큰일 난다.”
“알았어~ 잘 쉬고 모레 보자~”
“어~ 형~ 들어가~”
부우웅~
차가 출발한 뒤 아파트 단지 안을 걸었다. 지상에는 차 한 대 없는 새 아파트.
평생 이런 곳을 살아 본 적이 없었고, 이사 온 지가 얼마 안 되어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이전에 살던 시영아파트는 차 한번 쓰려면 이중 주차된 차량 미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어?”
아파트 현관 근처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이제 오냐?”
아빠였다. 지금 시간이…… 밤 열한 시인데?
반가움보다도 당혹스러움이 컸다.
“주무실 시간 아니신가?”
“얀마, 존대를 하려면 존대를 하고, 말을 편하게 하려면 편하게 하지. 그게 뭐냐?”
아빠는 웃으며 말했다. 나이가 들어 가니, 자연스럽게 존대로 바뀌어 간다. 이상하게도 반말이 점점 어색해진다.
“그냥. 찬 공기 좀 마시고 싶어서 나왔다.”
“…….”
딱 봐도 나 마중하려고 나온 거 같은데.
아빠는 아닌 척했고, 나도 속마음은 알지만 굳이 집어서 말하진 않았다.
남자들끼리는 그런 게 있다.
“밥은 먹었냐?”
“저녁은 당연히 먹었지. 근데 배고프긴 해~”
“니 엄마 말이 맞았네.”
“뭐가?”
“들어가 보면 알어.”
“…….”
“어서 들어가자. 다들 기다린다.”
* * *
“아들~ 어서 와~”
어머니는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나왔다.
“어머니~”
와락!
난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고.
어머니는 내 엉덩이를 토닥이며 말했다.
“어이구~ 우리 아들. 많이 보고 싶었어~”
“저두요~”
이제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어머니.
어릴 적에는 어머니와 포옹을 많이 했었는데…… 이렇게 안아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새삼 어머니가 참 작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내가 큰 것인데.
“고생 많았지?”
“고생은요~ 재밌게 하고 있어요.”
“배고프지? 너 좋아하는 김치찌개 끓여 놨다.”
안 그래도 집 안에 들어서면서부터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위가 뒤집어지고 있었다.
“어머니~ 이 센스 뭐예요~ 하하! 두 그릇 먹어야지~”
“에구…… 살 빠진 거 봐 봐. 안 그래도 마른 애가. 더 홀쭉해졌네. 어서 손 씻고 와라.”
“네~”
화장실로 가려는데, 그제야 어머니 뒤에 서 계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보였다.
“엇? 다녀왔습니다!”
난 황급히 인사했다.
“허허. 왔니?”
“인사가 늦었네요. 죄송해요. 당연히 주무시고 계실 줄 알고.”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손주가 큰일 하고 오는데, 기다려야지.”
할머니도 내게 다가와 안아 주며, 엉덩이를 토닥였다.
“어이구~ 우리 강아지. 장하다, 장해.”
“하하.”
“정말 대단하더라. 우리 손주가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네.”
난 웃으며 할머니를 바라보았는데.
“…….”
그렇게 음악에 반대하셨던 할머니, 날 보는 눈빛이 바뀌셨다.
이건…… 분명 팬심이었다.
핑덕덕핑 회원들의 눈빛.
“할머니가 우리 손주 공연 직관하고 싶은데. 그 영광을 한번 주면 안 되겠니?”
“네? 아, 네. 당연히 가족들 초대 한번 해야죠. 제가 적절한 시점에 제작진에 요청해서 자리 만들게요.”
“아이고 좋아라~ 아싸라비야 칸따비야~”
“…….”
할머니는 소녀처럼 좋아하셨다.
난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손을 꼭 잡았다.
“할아버지이~”
“…….”
80 중반의 고령.
귀가 많이 어두워지셔서 크게 소리를 질러야 들으시고, 말수도 많이 적어지셨다.
그래도 어디 아픈 곳 없으시고, 정정하시다. 못 들으신 거 같아서 난 크게 소리 질렀다.
“할아버지!”
“응? 어~ 허허.”
“아침잠도 없으시잖아요! 어서 들어가 주무세요!”
“허허~ 그래~ 그래~”
할아버지는 웃으신다. 뭐라고 말만 하면 그냥 웃으시며 어깨를 토닥여 주신다.
지금도 그랬다. 내 어깨를 토닥이며 웃기만 하셨다.
“할아버지~ 어서요.”
“어~ 허허.”
난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방으로 모셔다드렸다.
눈에 띄게 수척해지신 할아버지를 보면, 세월의 흔적을 느낀다. 칠순 잔치 때만 해도 청년 같으셨는데, 이젠…….
할아버지를 부축해 들어가며 아빠의 얼굴을 살폈는데, 표정이 좋지 않다.
할아버지의 구부정한 뒷모습에 그의 시선이 묶여 있었다.
* * *
다음 날.
오랜만에 잠을 푹 잤다.
잠들기 전에 알람도 다 꺼 놓고, 커튼도 꼼꼼하게 쳐 놓았다.
쉴 때는 푹 쉬어야 한다. 특히 나처럼 영감과 아이디어가 중요한 사람들은 쉼이 중요하다. 무조건 노력만 한다고 잘되는 일이 아니며, 컨디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깨면 다시 자고. 다시 또 깨면 자고.
도저히 잠이 더 이상 오지 않을 때쯤 시계를 봤다.
‘오후 한 시.’
생각보다 많이 잤다. 체질상 잠을 많이 못 자는 성향이라, 끽해 봐야 오전 열 시쯤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만큼 잘 수 있어서 아주 만족스럽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 본 건 전국민노래자랑 예선을 치른 후 처음인 것 같다. 그만큼 피곤이 꽤 누적되어 있었던 거겠지.
간단히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섰다.
‘공연장―합숙소’ 수험생처럼 이 루트만 반복했더니 바깥 구경을 좀 하고 싶었다.
개포동에서 도곡동으로. 도곡동에서 강남역 방향으로. 사람 구경, 거리 구경하며 한가롭게 걸었다.
강남역이 가까워지니, 거리에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고.
‘나는 나는~ 꽃을 문 남자~’
강남 길거리에서 뽕짝이 들린다.
캐롤 대신 뽕짝인가?
아, 크리스마스는 지났지? 신년이니까.
어쨌든, 최신 가요가 아닌 십수 년도 더 된 뽕짝이 번화한 거리에서 들리는 게 신기했다.
빌딩 위 커다란 전광판에 ‘TV고려 헬로우 트롯맨’ 광고 화면이 보이고.
“엇!”
지난주 첫 방송. 내가 ‘똬리를 틀어 봐’를 외친 뒤, 불꽃이 터지는 장면이 나왔다.
3층 높이 대형 전광판이 내 얼굴로 가득 차 있다.
“우와…… 대박.”
난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재빨리 선글라스를 꼈다. 대중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거, 정말 오랜만이다.
* * *
“다녀왔습니다~”
“어, 왔니? 친구들 만나고 늦게 올 줄 알았는데?”
“에이~ 저 친구 없는 거 아시잖아요. 유일한 친구는 어차피 내일 합숙소 들어가면 매일 만날 예정이라. 하하.”
저녁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왔다. 초중고 친구들과는 연락 끊긴 지 오래다. 간혹 일석이와만 연락하는 정도.
어릴 적부터 일을 하다 보니,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 그나마 좀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비즈니스와 관계되어 있고.
마음 터놓고 아주 가깝게 지내는 진짜 친구는 정진뿐이다.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한 뒤.
밤 열 시. 우리는 TV 앞에 모였다.
[헬로우 트롯맨 2회.]
오늘은 2회차 방영 날이다.
휴가 기간 중 방영 날이 껴 있었는데, 제작진의 의도인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당연히 안 볼 수 없다.
내가 노래하는 모습은 1회에 나왔기에 오늘 보지는 못하겠지만, 다른 참가자들이 어떻게 비칠지 궁금했다.
[안녕하세요~ 헬로우 트롯맨! 김승주 인사드립니다~]
“한다! 한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TV 속에 들어갈 태세다. 난 그 모습이 재밌어서 피식 웃었다.
“덕군아.”
아빠가 옆에서 불렀다.
“응?”
“여긴 라운드 끝날 때마다 진선미 정한다며?”
“응, 맞아.”
“그 안에 들었냐?”
난 눈썹을 찡긋 올리고는 물었다.
“오늘 나올 텐데…… 궁금해? 얘기해 줘?”
어머니가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하지 마!”
할머니도 고개를 저으셨다.
“하지 말거라.”
“허허.”
할아버지도 웃으셨다.
내가 이 모습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하자.
“흠!”
아빠는 입을 꾹 다물고 TV를 지켜봤다.
그리고 방송되는 약 두 시간 동안.
우리는 숨도 못 쉬고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다.
난 내용을 다 아는데도 왜 이렇게 재밌을까? 정신을 못 차리겠다.
TV고려가 편집을 어찌나 기가 막히게 했는지…… 아주 쫄깃쫄깃하다.
[꽃피는…… 동백섬에…….]
2회의 마지막은 김종근의 무대였다.
우리 가족은 완전 빠져들었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눈시울을 붉히셨다.
“아이고~ 저 양반 왜 이렇게 사람을 울리는 거니?”
“어머니~ 흑흑.”
할머니와 어머니는 서로 손을 꼭 잡고 TV에 집중했다. 영원할 것 같던 고부간의 거리도 세월이 지나니 서로 의지하는 모녀 같은 사이가 되어 있었다.
“하아~ 한참을 울었네.”
“어머니, 시간 여행을 한 거 같아요.”
[헬로우 트롯맨! 예선전 모든 무대가 끝났습니다!]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우리 가족은 모두 눈이 똘망똘망하다.
“우리 손자가 3등 안에 들어야 할 텐데.”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요.”
“그래도 내 아들이 가장 잘했지.”
마지막 말은 아빠가 했다.
솔직히 김종근이 너무 잘했다. 하지만 아빠라면 자존심 때문이라도 무조건 내가 잘했다고 할 것이다.
“허허.”
할아버지도 안 주무시고 계셨다.
결과를 아는 나는 전전긍긍하는 이 모습을 보는 게 재밌었다.
입이 근질근질하다. 훗.
[헬로우 트롯맨 진 후보입니다! 김종근! 그리고~]
두근. 두근.
[덕군!]
“우와아~ 만세!”
“역시 우리 손주다!”
“만세! 만세!”
아빠도 손을 번쩍 들고 좋아했다.
예선전 최종 결과 난 ‘선’으로 불렸지만. 가족들은 그래도 매우 기뻐했다.
물론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지는 않았다.
‘본선 2차 데스 매치에서는 내가 ‘진’이라는 걸 얘기해 버려?’
입이 몹시 근질근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