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데스 매치(4)
이 또한 전생과 다른 점인가?
하필 왜 이 타이밍에…… 이런 변수가…….
‘추가 합격자는 없습니다.’
난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카메라는 승리한 김종근보다 패한 정진을 집중적으로 비추고 있었고.
난 체념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 정진의 얼굴을 보는 게 힘들었다.
뭐라도 할 수 없을까?
제작진이라도 찾아가 볼까?
하아…….
일개 참가자가 제작진을 찾아가서 뭘 어쩔 것인가. 떨어진 사람이 정진뿐인 것도 아니고.
“아오, 젠장!”
난 머리를 감싸 쥐었고.
주변 사람들은 날 지켜보기만 할 뿐 어쩌지 못했다.
나와 정진의 사이를 다들 잘 알고 있다.
왜 이렇게 정진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까.
“덕군아…….”
안만호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어깨를 감싸 쥐었는데.
“내버려 두세요.”
“…….”
누구에게 위로받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참담했다. 정진이 김종근을 선택하려 할 때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는데……
모니터에서 김승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트 개수 차이는요…… 김종근 7, 정진 6입니다. 단 한 개 차이로 김종근 씨가 승리를 거뒀군요. 정진 씨 너무 잘했는데요~ 아쉽습니다.]
―겨우 한 개 차이야.
―미치겠다. 진짜.
―도대체 둘이 왜 붙은 거야?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하면 뭐 해…….
―정진 너무 아쉽다. 이건 TV고려의 손실 아니야?
김종근은 정진에게 다가와 위로해 주었고, 정진은 괜찮다며 김종근을 축하해 주었다.
[김종근 씨,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진의 탈락이 믿기지 않는 듯 방청객들은 참담한 표정이었고.
김종근 또한 이 분위기를 잘 느끼고 있었다.
[승부이기에 최선을 다했고, 이겨서 기쁩니다만…… 안타깝기도 합니다. 정진은 정말 좋은 가수고 앞으로도 보여 줄 게 많은 친구인데…….]
[그렇죠. 정진 씨가 잘하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네…… 정진 씨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서 경연에 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아…… 인터뷰를 들을수록 실감이 난다. 정진이…… 진짜 떨어진 건가.
[정진 군?]
[네! 하하.]
눈가에 눈물이 번져 있었지만, 정진은 씩씩해 보이려 일부러 웃었다.
[괜찮으십니까?]
[하하. 네, 괜찮습니다.]
[소감 한 말씀 하시죠.]
[후우…….]
정진은 심호흡을 하고, 소매로 눈가를 몇 번 훔치었다.
[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너무 행복했고요. 지금 집에 가게 되어 매우 아쉽습니다!]
김승주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더 하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제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덕군을 응원하고 싶은데요…….]
결국, 덕군은 왈칵 눈물을 쏟았고,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굉장히 뚝심 있고, 한길만 가는 가수거든요. 그 친구가 보뉘를 했던 것도 좋은 트롯 가수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물론, 보뉘로서도 최선을 다했었고요. 그건 보뉘하뉘 보셨던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옆에서 마이크를 들고 있던 김승주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5년 만에 용기 내어 나온 자리입니다. 걔가 겉보기엔 씩씩해 보이지만 마음이 여리거든요. 저는 이제 가지만, 덕군은 앞으로도 경연을 계속하게 될 텐데…… 많은 응원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앞으로 좋은 모습 보여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정진! 잘했어~
―사랑해~
―너무 수고 많았어~
덕군은 엎드려서 온몸을 떨었다. 그 누구도 그를 위로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 * *
“자, 이제 두 분 들어가셔도 됩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정진의 탈락은 컸다. 판정단뿐만이 아니라 방청객들도 멍하고, 출연자 대기실도. 모두가 혼이 나간 상태였다.
하지만 김승주는 멀쩡해 보였다. 진행자로서의 책임감 때문일까. 아니면, 뭔가 다른 게 있어서일까.
“100억 트롯맨을 찾아라! 본선 2차 데스 매치의 모든 대결이 끝이 났습니다. 38명이 승부를 벌였고요, 그중 승리를 거둔 19명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게 됩니다. 생존한 19명을 위해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짝. 짝. 짝.
근데…… 김승주는 박수를 보내 달라고만 할 뿐, 19명을 무대로 부르지 않았다.
보통 라운드가 끝나면 합격자들을 무대로 올린 후, 진선미 선정을 한다.
―이상해. 최종 진출자가 홀수야?
―지금까지 계속 짝수였잖아.
―다음 라운드가 개인전이 아니라면 짝수여야 할 텐데.
김승주는 씩 미소를 지은 후 말했다.
“본선 3차로 직행한 인원은 총 19명! 하지만 본선 3차를 치를 총 인원은 20명입니다!”
―어머! 어머! 뭐야?!
―추가 합격자는 없다며?
―설마? 설마아~~~
김승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추가 합격자는 없습니다. 단!”
김승주의 우렁찬 목소리에 좌중은 모두 집중했다.
“패자부활전은 있습니다!”
스튜디오는 충격에 정적이 흘렀다.
“단 한 명! 패자부활전을 통해 본선 3차 티겟을 거머쥘 수 있습니다.”
판정단 또한 사전 얘기를 못 들은 룰인지,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탈락하신 분들 중에 가장 좋은 무대를 보여 준 두 분을 선정할 거고요. 그 두 분은 다시 한번 대결을 할 겁니다. 즉 데스 매치 재대결을 통해 마지막 한 자리의 주인공이 결정됩니다!”
김승주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판정단과 출연자들은 모르게 진행된 시크릿 룰입니다. 따라서 패자들의 한 곡 대결 또한 이 자리에서 선곡을 하여 펼치는 대결인 점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 끝난 줄 알았던 스튜디오.
다시 긴장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판정단께서는 지금 부활의 기회를 드릴 두 분을 선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뭐야…… 우리가 시키면 하는 사람이야?
―사전에 협의도 없이.
―너무하네.
판정단은 툴툴거렸고, 김승주는 살살 웃으며 달래었다.
“하하. 프로그램의 긴장감을 위해 그런 거니까요. 다들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아~ 몰라요!
―어떻게 된 게 판정단까지 속이냐?
―잘됐지 뭘 그래요. 아쉬운 참가자 한 명 살릴 수 있게 됐으니.
―근데, 겨우 한 명이야? 이왕 할 거 좀 더 쓰지.
패자부활전에 나설 가수를 선정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장연정 주변에 마스터들이 모여 아주 짧게 얘기 나눈 후, 모두 자리로 돌아갔다.
너무나 뻔했기에, 김승주도 시간을 오래 줄 필요가 없었다.
“장연정 마스터님, 선정하셨습니까?”
“네, 아쉬운 분들이 많지만요. 저희가 기회를 드릴 분은…….”
장연정은 굳은 얼굴로 이름을 호명했다.
“정진 씨와 양상두 씨입니다.”
* * *
대기실에서는 난리가 났다.
탈락자들을 위로하느라 정신없던 대기실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패자부활전! 패자부활전!
―헐, 대박!
―거봐~ 내가 뭔가 있을 거랬지?
난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굳게 믿고 있던 ‘추가 합격자’ 제도는 없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패자부활전’이 생겼다.
뒤통수 두 대 맞은 기분.
꿀꺽. 난 정진을 토닥여 주던 걸 멈추고 모니터에 집중했고, 출연자 대기실은 초긴장 모드로 돌입했다.
[정진 씨와 양상두 씨입니다.]
장연정의 호명.
정진과 양상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마침 두 사람은 내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허허, 이거 참.”
“하하…….”
두 남자는 정말 어색하게 웃었다. 좋기도 하면서 난감한 듯.
양상두는 웃으며 말했다.
“정진아, 이거 꼭 해야 하냐?”
“형님이 포기해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얀마, 넌 아직 젊잖아.”
“그래서 갈 길이 멉니다, 형님.”
“예끼, 하하.”
서로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짦은 대화는 큰 웃음소리로 끝났다.
난 두 사람을 향해 주먹을 꼭 쥐어 보였다.
“둘 다 화이팅 하세요!”
“그래~!”
방금전까지 서로를 위로해 주던 두 사람. 이젠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기 위해 상대방을 이겨야 한다.
승부의 비정함이란…….
―휘이익~!
―화이팅!
―둘 다 힘내세요!
큰 박수갈채를 받으며 두 남자는 출연자 대기실을 나갔고.
[두 분 무대 앞으로 나와 주세요!]
어느덧 모니터에 나타난 양상두와 정진.
지옥을 경험해서일까. 두 사람은 초연하면서도 비장해 보였다.
즉흥 대결이라도 이 둘은 잘 해낼 것이다. 수많은 행사를 경험한 트롯 베테랑들이기에.
머릿속에 최소 트롯 1,000곡 정도는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자, 정진 씨의 선공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역시, 선곡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정진이 먼저 무대에 섰다.
눈을 감고 전주를 기다리는 정진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내가 양상두였다면…… 내가 지금 저 상황에서 정진을 상대해야 한다면 어땠을까.
승자의 자리가 정해져 있는 경연.
내가 만약 저 자리에 있었다면, 아무리 상대가 정진이라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 살아남기 위해서.
서바이벌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난 이제 차가워진 머리로 정진의 무대를 감상했다.
* * *
모든 경연이 끝나고.
덕용이와 함께 페스티벌 시티 정문 앞에 서 있었다.
TV고려는 다음 일정 안내와 유의 사항을 안내하느라 합격자들을 좀 늦게까지 붙잡고 있었다.
탈락자들은 경연이 끝나자마자 먼저 갔다.
그리고 이번엔 합숙소로 바로 가는 게 아니라, 3일간의 휴가를 주었다. 지금까지 합격자들은 거의 한 달 반 동안 집에 가지 못했었다.
“덕용아, 너 꽤 오래 버틴다?”
“그러게, 운이 좋은 듯?”
“짜샤~ 농담이야. 엄청 잘하더만.”
“에이~ ‘진’님께 그런 얘기 듣는 건 별로 와닿지 않는데~?”
“쳇.”
난 본선 2차 데스 매치의 ‘진’으로 선정됐다.
‘선’은 김종근. ‘미’는 김덕용이다.
“형처럼 되고 싶어서 노래를 시작한 건데, 같이 경연해 보니까 형을 존경하게 될 거 같아.”
“무슨 소리냐? 그게?”
“형 무대는 볼 때마다 정말 대단해. 그 이상의 표현을 쓰고 싶은데…… 모르겠다. 아주 아주 대단 대단해.”
덕용이는 날 우러러보는 눈길로 바라봤다.
“특히 이번 라운드는 진짜…….”
난 부담스러워서 덕용이의 얼굴을 밀치며 말했다.
“야, 야. 그만 좀 해라. 형제끼리. 그리고 이 쟁쟁한 어른들이 있는 무대에서 열 살짜리가 ‘미’라니……. 그게 더 대단한 거 아니냐?”
“엇! 아빠~!”
큰삼촌의 차가 도착했다.
“삼촌~!”
“어~ 덕군아~ 이야~ 요즘 핫한 스타를 만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에이~ 놀리지 마.”
“안에 있어서 잘 모르지? 헬로우 트롯맨 인기 장난 아니야~ 특히 네가 1회 마지막에 나와서 ‘똬리’를 트는데…….”
예선전, 1라운드 때 난 ‘똬리’를 불렀었다. 그때 무대에서 오두방정 떨던 게 생각나서 부끄러워졌다.
난 그의 말을 막기 위해 말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삼촌 늦었어. 어서 가~”
“어, 그래. 너는? 삼촌이랑 같이 가자. 바래다줄게.”
“됐어~ 안산이랑 우리 집은 반대 방향인데. 그리고 나, 같이 갈 사람 있어.”
“그래?”
덕용이가 큰삼촌에게 말했다.
“맞아. 덕군 형아 단짝 친구 있어. 간혹 보면 나보다 더 형제 같다니깐? 질투 나.”
마침 그때 하얀색 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위이잉―!
창문이 열리며 차 주인이 얼굴을 드러냈다.
데스 매치와 패자부활전.
두 번의 죽음의 매치에서 살아 돌아온 남자가.
“엇! 삼촌~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큰삼촌은 씩 웃고는 말했다.
“오냐~ 정진이 오랜만이네? 스타들이 아주 끼리끼리 노는구나?”
정진은 활짝 웃으며 내게 소리쳤다.
“덕군아~ 어서 타!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