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동해의 밤
“자, 모두 주목해 주세요! 이렇게 진선미 결정은 끝났고요.”
김승주는 무대 뒤로 이동하려는 참가자들을 불러 세웠다.
“본선 2차전이 일대일 데스 매치인데요, 지금부터 각 상대를 정할 겁니다.”
여기서 바로?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이 자리에서 바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김승주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 왜 그러시나요? 여기 서바이벌 아닙니까? 새삼스럽게. 숨 돌릴 틈이 없죠? 살아남자마자 바로 또 살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게.”
그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 또한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좋아하실 겁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주세요.”
―네~!
우리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앞서 설명드린 대로 지목 순서는 본선 1차전 성적순입니다. 지금 바로 순서를 불러 드릴 테니, 각자 고민하신 후에 10분 뒤 상대자를 지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와…… 겨우 10분?!
일부러 고민할 시간을 안 주려고 하는 건가?
김승주는 지목 순서를 불러 준 후.
“지금부터 10분입니다! 돌아다니셔도 되고, 옆 사람과 상의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한 명만 살아남을 테니까요! 자~ 시작!”
참가자들은 우왕좌왕했고.
본선 1차 ‘진’ 정진과 ‘선’인 내 주변으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지목 순서의 첫 번째는 정진이고, 그다음이 나다. 그리고 세 번째 순서는 안만호. 정진과 나와는 달리 안만호는 인기가 많았다. 그에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만호 형님. 저랑 하는 거 어떠세요?
―무대 재밌게 하시던데, 저랑 붙어요!
―같이하면 재밌는 그림 나올 것 같아요.
지금 인기가 많다는 건, 참가자들이 안만호를 만만한 상대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생존 게임. 이길 만하다 생각하니 본인을 지목해 달라고 어필하는 거다. 안만호 또한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 인기가 달갑지 않았다.
나와 정진 주변엔 파리만 날렸다.
“형, 지목할 상대 생각해 봤어?”
“글쎄다…… 좀 재밌게 하고 싶긴 해.”
“재밌게?”
“응. 너는?”
“글쎄…….”
난 당연히 약한 상대를 골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한 상대들이야 결승으로 올라가다 보면 당연히 맞붙게 될 것이다. 초반부터 위험한 상대를 고를 필요는 없다.
물론 난 데스 매치에 ‘추가 합격자’ 제도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전생에 ‘헬로우 트롯맨’ 데스 매치에서 강한 상대끼리 맞붙는 라운드가 있었다.
내가 응원했던 참가자가 패배하여 짜증 났었는데, 추가 합격으로 쉽게 살아나는 거 보고 싱거워했던 기억이 있다.
내 딴에는 너무 어이없고 충격적인 장면이어서, 참가자의 놀란 표정까지도 명료하게 기억이 난다. 그건 연기가 아니었다. ‘추가 합격자’라는 제도를 제작진이 숨겼던 게 분명하다.
“형이니까 솔직히 말하는 건데, 난 아이돌부 신건 옆에 있는 형을 지목하려고 생각하고 있어.”
“너무 쉽지 않냐?”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우리끼리 작은 소리로 대화 중이라 편하게 얘기했다.
“쉬워도 확실하게 생존할 수 있는 선택을 해야지.”
데스 매치는 누굴 이기느냐보다 살아남느냐가 중요하다. 이 또한 서바이벌의 한 과정이다. 괜한 객기 부리다가 순간 골로 갈 수 있다. 아무리 ‘추가 합격’ 제도를 알고 있으나, 뛰어난 참가자와 붙어서 내가 묻히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
“덕군아.”
턱.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뒤돌아봤더니, 양상두가 웃고 있었다.
“네, 형님.”
난 살짝 놀랐다. 이 타이밍에 양상두가 날 왜 찾아온 거지?
“너 혹시 생각해 둔 사람 있냐?”
“네?”
설마…….
“나랑 한번 붙어 보는 거 어떠니?”
꿀꺽.
옆에 있던 정진도 놀란 표정이었다.
“우리 둘이 붙으면 재밌을 거 같은데. 정통 트롯 신구(新舊) 가수들의 대결. 어떠냐?”
난 양상두의 저의를 생각했다.
왜 나한테 붙자고 하는 걸까?
정말 재밌을 것 같아서?
지금까지 내가 진행한 두 번의 무대를 봤을 것이다.
내가 에이스로 주목받으며 매 라운드를 진행하고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그 또한 모르진 않을 터.
생각이 복잡해졌지만, 이럴 때일수록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
양상두는 라운드 통과는 무난하게 하고 있지만, 주목받지는 못하는 상황이었고. 아마 ‘반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상대로 내가 적절하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주목받고 있는 참가자는 나뿐만이 아닌데, 굳이 내게 찾아와서 붙자고 하는 걸 보면.
“제가 만만해 보이세요?”
난 뼈 있는 말을 웃으면서 던졌다.
“어? 하하. 설마~ 네가 만만하겠니?”
양상두의 표정에서 다 느껴진다.
‘해볼 만하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내가 여섯 살 때, 이미 트롯계의 슈퍼스타였던 양상두. 지금 참가자가 아닌 판정단석에 있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사람.
그와 데스 매치에서 붙는 게 부담스럽긴 하지만…….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남자라면 그래선 안 된다.
이미 다른 참가자들이 우리의 대화를 주목하고 있었고, 옆에 카메라도 붙어 있다.
난 정진에게 물었다.
“정진 형. 혹시 양상두 선배님 지목할 거야?”
“어? 아, 아니.”
정진의 대답을 들은 후, 난 단호하게 양상두에게 말했다.
“그러죠, 제가 지목할게요.”
“오케이~”
양상두는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그 미소가 상당히 거슬렸다.
경연이 끝난 후에도 웃을지, 꼭 지켜볼 것이다.
* * *
데스 매치 상대자 지목이 끝난 후.
모두가 기대하는 두 건의 빅 매치가 성사되었다.
첫 번째는 나와 양상두의 대결이었고.
두 번째는…….
“형! 도대체 왜 그런 거야?”
“…….”
“혹시 나랑 양상두 선배님 대결 때문에 자극받아서 그런 건 아니지?”
동해 크루즈 호텔로 올라가는 차 안. 난 옆자리에 앉은 정진에게 핀잔을 주고 있었다.
“아니야~ 그런 거.”
“근데, 왜 하필 김종근 아저씨를 선택해?!”
황당하게도 정진은 김종근을 선택했다. 그것도 양상두처럼 김종근이 도발을 해 온 것도 아니고, 정진이 먼저 다가가서 정중하게 제안했다.
본선 1차 ‘진’ 정진과 예선전 ‘진’ 김종근의 대결.
제작진에서는 난리가 났다.
기대하는 마음 반. 우려하는 마음 반일 것이다.
정진은 웃으며 말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듯이…….”
“형. 무협 영화 찍어? 이제 겨우 세 번째 라운드인데, 이 무슨 객기야?”
“…….”
“김종근 아저씨 노래 부르는 거 봤잖아. 그 아저씨는 팀 대결 아니면 무조건 피해야 해.”
“야, 언젠가는 붙어야 하잖아.”
“언젠가 붙을 건데 왜 빨리 붙냐고!”
“하~ 거참. 짜식 잔소리 심하네.”
정진은 귀 아프다는 듯 말했다.
“아~ 몰라~ 나도 지금 약간 후회하고 있는데. 너무 그러지 말아 줄래? 이미 선택했잖아~”
“…….”
정진은 한숨을 쉬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자리에서 김종근 아저씨랑 눈이 마주쳤는데, 붙어야 할 것 같았어.”
“뭐?”
“몰라, 나도.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는데, 아마 그 아저씨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본능적인…… 뭐 그런 게 있더라고. 한 명이 가게 되더라도 피하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그럼 원래 생각했던 건 아니라는 말이야?”
“응, 완전 즉흥.”
“참나…….”
상황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지금 우리는 음악 경연에 참가했지만, 점점 이 서바이벌 환경에 몰입하고 있었다.
정진은 우두머리는 양립할 수 없다는 본능을 따른 것이다.
“야! 그런데 지금 네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할 상황은 아니거든?”
“뭐?”
“양상두 선배가 어떤 사람인데, 미쳤냐? 도발 좀 했다고 그냥 호로록 넘어가 버려?”
“…….”
“뭐라고 말 좀 해 봐.”
난 입 다물고 의자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았다.
* * *
동해 크루즈 호텔.
나와 정진은 같은 방으로 배정받았다.
늦은 시간, 안만호가 캔맥주를 들고 우리 방에 찾아왔다.
정진이 반갑게 맞이했다.
“형님~ 어서 오세요~”
안만호는 아주 신나 했다.
“하하, 이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캔맥주와 마른안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두 가수님께서는 술 드셔도 되나? 요즘 가수들은 관리한다고 잘 안 먹잖아요? 난 술이 들어가야 노래가 더 잘 나오는데. 으하하.”
안만호는 말은 그러면서 캔맥주를 따서 우리에게 건네주었고.
난 웃으며 말했다.
“하루 정도는 괜찮아요~ 소주 타 마시는 것도 아니고 뭐. 간단하게 맥주 정도야~”
“맞아요, 저희가 관리는 하지만 도인은 아닙니다.”
“하하.”
우리는 각자 한마디씩 하며 건배를 했다.
“생존을 위하여!”
“살아남자! 전우야!”
“내일도 태양은 뜬다!”
어려운 상황 속에 우정은 더욱 꽃이 핀다고.
다음 라운드를 마친 뒤, 이 숙소에서 다시 얼굴 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조금의 시간도 참 소중했다.
합숙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행패를 부리거나, 경연에 지장 갈 정도만 아니라면 웬만한 건 다 허용됐다.
맥주 사 와서 가볍게 목 한번 축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물론 나와 정진은 관리를 위해 안 마셨었고, 경연 시작된 후 술 마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캬~ 오랜만에 마시니까 더 맛 좋네요.”
“그치잉? 살아남아서 그런지 더 맛 좋아!”
안만호는 기분이 좋아서 연신 웃어 댔고. 여기에 정진이 기름을 부었다.
“엇! 그러고 보니!”
그의 놀란 표정에 나와 안만호가 바라보니.
“여기 진선미가 다 모였네~? 위하여!”
“와하하하!”
“좋아! 좋아!”
우리는 신나서 연신 맥주 캔을 부딪혔다. 한 캔만 마신다는 게 두 캔 되고, 세 캔 되고.
밤이 늦어지고 있었고, 주변 방들도 소란스러웠다.
본선 1차 경연이 끝난 날이라 다들 오늘 하루 정도는 풀어지고 싶을 것이다.
쏴아~ 착!
쏴아~ 착!
창밖으로 파도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새까만 바다를 위에 뜬 달이 유독 더 밝게 느껴졌다. 기분 좋게 취해 가고 있는 밤.
불콰해진 안만호가 말했다.
“여기 와서 너무 행복해.”
어느 정도 술자리가 무르익자, 그는 정진에게도 자연스럽게 말을 편하게 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음악을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그게 음악 하는 사람의 목적이니까.”
“…….”
“근데, 난 인정이라는 건 받기 어려웠거든. 글쎄…… 시장터에서 내 품바 노래가 손님들의 발을 붙잡고 있다면 그게 인정이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좋았다, 안 좋았다 얘기를 해 주거나 평가해 주는 사람은 없었단 말이야.”
그는 황홀한 표정으로 밤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내 노래를 들어 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니. 인생 헛살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난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만족해.”
본선 1차에서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품바를 했으며, 예선 결과의 우려를 불식하고 당당히 ‘미’를 차지했다.
“행복하다, 정말 행복해. 참가하길 정말 잘한 거 같아. 너희를 알게 되어 더 행복하고.”
잠자코 난 그의 말을 듣다가 말했다.
“아이~ 아직 갈 길이 먼데. 왜 갈 사람처럼 얘기하세요? 그런 얘기는 다 끝난 다음에 얘기해요.”
“떨어지면 여기 못 오잖아…….”
갑자기 술맛이 확 떨어진다.
“에이~ 진짜! 지금은 그런 건 좀 잊자니까요~?”
“하하, 알았어~ 알았어~”
난 웃으며 캔을 높이 들었다.
“데스 매치! 살아남읍시다! 진선미를 위하여!”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