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진짜들이 모였다
덕군이 무대를 내려간 뒤.
판정단은 난리가 났다.
―우승 후보다.
누군가 내뱉은 말.
아무도 이 말에 부인하지 못했다.
무대로 보여 주겠다던 덕군의 발언은 진짜였다.
뛰어난 가창에 능숙한 무대매너. 거기에 오랜 기간 무대를 선 사람에게만 느낄 수 있는 무대의 짠 내. 그게 21세 청년에게서 느껴졌다.
마스터들은 트롯 전문가다. 기본 20년 이상 이 바닥에 있던 사람들. 한 소절이면 알 수 있었다. 이 가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진짜가 나타났네. 연습을 도대체 어떻게 한 걸까?
―외모는 아이돌 뺨치게 생겼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아이돌이야.
―어떻게 저런 능숙함과 감성이 나오는 거지?
다음 참가자가 호명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판정단은 여전히 덕군 얘기로 정신이 없었다.
장연정이 옆에 앉은 조용수에게 말했다.
“내가 정진이랑 좀 아는 사이거든요? 걔한테 덕군이라는 트롯 하는 동생이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듣긴 했는데, 그렇게 잘한다고.”
“…….”
“말만 하지 말고, 한번 데리고 와보라 했거든요. 근데, 뭔 준비를 하는지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실력은 없고, 그냥 친한 동생이니까 하는 소리인가 싶었는데.”
“아…… 실수하셨네.”
“그러게요. 오라고 하지 말고, 제가 찾아가 봤어야 했는데.”
장연정은 조용수의 말에 피식 웃고는 덕군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방송 나가면 전국이 뒤집어질 텐데, 먼저 발견하지 못한 게 아쉽네요. 나이도 지금 딱 좋은데.”
조용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중에 제 곡이라도 써 줬으면.”
이제 1라운드 끝났을 뿐이지만.
두 사람은 덕군의 성공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 * *
1라운드를 끝낸 후, 제작진의 태도가 달라졌다. A조 개인 촬영하는 곳에 B조인 나를 따로 데리고 왔다.
“어? 덕군아? 웬일이야?”
화보 촬영 장소에 도착하니, 정진이 놀란 눈으로 내게 물었다.
“몰라, 나도. 무대 끝나니까 데리고 오던데?”
스태프는 대기 중인 A조 참가자들을 제치고, 나를 가장 앞자리에 배치시켰다.
“자, 자, 비켜 주세요. 덕군 님부터 촬영하겠습니다.”
줄 서 있던 A조 사람들은 날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봤고, 난 민망했지만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정진이 옆에 와서 말했다.
“짜식, 한 건 했나 보구나?”
“나 노래 부르는 거 못 봤어?”
“그때 나 마침 촬영 중이어서.”
“아…… 나중에 방송으로 봐 봐.”
난 정진을 향해 윙크하며 말했고, 그는 내게 엄지를 치켜든 후 먼저 대기실로 갔다.
한동안 촬영을 끝낸 후 B조 대기실로 도착하니, 난리가 났다.
―우와~ 대박!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예요?
―우승 후보가 여기 있었네~
덕용이도 내 다리에 매달려서 핀잔을 주었다.
“형아~ 너무 잘하는 거 아니야? 배 아파~”
“하하. 그럼~ 형이 노래 부른 지가 몇 년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
일부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말실수한 건가? 여기 나보다 경력 높은 사람 많다는 걸 깜빡했다. 하지만 난 덕용이한테 한 말이었는데…….
어쨌든 다들 예민한 것 같으니 입조심해야겠다.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얌전히 앉아서 다음 사람들 무대에 집중했다.
나 이후에 B조에서는 눈에 띄는 무대는 없었다. 그나마 눈길이 가는 사람은 대디부의 허경구.
단체 촬영할 때 아이들과 영상통화를 하던, 손이 두꺼운 남자였다.
[나이트클럽에서 20년간 노래를 불렀고요. 생계 때문에 5년 전부터 막노동과 병행하다가, 작년에 다섯째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음악을 놓고 지냈습니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데, 헤어스타일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투블럭에 솥뚜껑 머리.
언밸런스한 외모와 스타일을 보니, 그의 굴곡 많은 사연이 더 가슴에 와닿았다.
[네~ 노래 시작해 주시면 됩니다.]
와, 근데…….
노래를 정말 잘 불렀다. 삶의 무게에 찌들어 있던 얼굴 인상이 노래 반주가 시작되자 활짝 펴지면서, 몸을 6/8박자로 흔들었다. 딱 나이트 죽돌이 스타일.
콧소리와 노래 끝 소절을 먹는 옛스러운 쿠세(버릇)가 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잘 불렀다.
[네~ 아쉽게 하트가 하나 모자르네요! 12개로 예비 합격되셨습니다~]
허경구는 아쉬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그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근데 내가 보기엔…… 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렇게 B조에서는 나를 포함해 올 하트 총 5명이 나오는 거로 1라운드가 끝났다.
[잠시 쉬었다가 A조 100인의 오디션 진행하겠습니다.]
* * *
A조 참가자들은 전반적으로 다 잘했다. 하트를 9개 이하로 받아서 불합격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또한 내가 기대했던 사람들은 역시 잘 해냈다.
[정진! 올 하트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우선 정진은 전략대로 정통 트롯을 불렀고, 판정단의 마음을 녹여 버렸다.
곱상한 남자가 미성으로 1950년대 정통을 불러 버리니 안 녹을 수가 없다.
양상두는 가볍게 불러서 올 하트 받았고.
그다음 이찬우의 무대.
전생의 헬로우 트롯맨에서 그의 1라운드 무대가 엄청났던 걸 기억한다. 내 생각엔 선곡이 한몫했다고 보는데, 혹시 이번에도 같은 선곡일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의 무대를 지켜보았는데.
[어촌마을 어귀에 서서!]
전생과 그대로였다.
이찬우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사골 뚝배기 목소리로 구수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진또배기 진또배기 진~~또배기이~~!]
―와. 대박 신나.
―저 사람 뭐야? 신동부?
―진짜 잘한다!
대기실도 난리가 났다.
같이 출연했지만…… 난 팬심으로 그의 무대를 지켜보았다. 이 무대를 직관하게 돼서 영광이다.
예심이기에 방청객은 없다. 이건 전생과 동일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만이 온전하게 이찬우의 첫 무대 ‘진또배기’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우승 후보다.
누군가 말했다. 직접 들어 보니 나 또한 이 말에 동감할 수밖에 없다.
이 특유의 바이브. 이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이찬우만의 것이다.
결과는 당연히…….
[올 하트! 와우~ 노래가 끝나기 한참 전에 올 하트가 나왔습니다~!]
―우와아~!
―진짜 잘해!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도 한목소리로 환호했다. 그만큼 대단한 무대였다.
“와…… 분위기 장난 아닌데? 지금까지 대기실 분위기 중에 최고 아니냐?”
난 신나는 표정으로 덕용이에게 말했고, 그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저 형아 정말 잘했고~ 분위기 좋긴 한데~ 지금까지 중에 최고는 아니야.”
“그래? 이렇게 뜨거운 반응은 없었던 거 같은데.”
“형 무대 때는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도 못 질렀어.”
“어? 아, 그랬어?”
“응.”
난 무대에 있었으니, 내가 노래 부를 때의 대기실 분위기는 모른다.
덕용이의 말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역시 팔은 안으로…….
“짜샤, 고맙다. 네 무대도 좋았어.”
“치. 그냥 하는 소리 아닌데. 형, 나 졸려.”
덕용이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 * *
그 이후에도 좋은 무대는 계속 나왔지만, 뭔가 좀 심심했다. 이찬우의 무대만큼 이목을 확 사로잡는 무대는 없었다.
어느덧 밤이 되고 대망의 ‘100인의 오디션’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마 판정단도 피곤할 것이다. 대기실의 참가자들도 모니터를 더 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집중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 1라운드! 100인의 오디션! 마지막 참가자입니다. 김종근 씨 앞으로 나와 주세요!]
마지막 참가자라는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난 모니터에 집중했다.
[안녕하세요. 백년동안도에서 노래하고 있는 김종근이라고 합니다.]
울프컷을 한 왜소한 남자였는데, 나이가 꽤 들어 보였다.
[실례지만 올해 어떻게 되십니까?]
[6년 뒤에 환갑입니다.]
[네에?!]
―우와! 진짜?
―왜 이렇게 동안이셔?
―많아야 40대 중반 정도 생각했는데.
[굉장히 관리를 잘하시나 봅니다.]
[하하, 관리는요~ 무슨.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데요.]
[그렇습니까?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요.]
김종근은 시종일관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오십 대 중반이지만, 삶에 찌든 모습은 얼굴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욕심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걱정 없이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서. 하하.]
[아~ 그렇군요. 백년동안도는 라이브 카페 아닙니까? 저도 예전에 가 본 적이 있는데.]
[네 맞습니다. 이십 대 때부터니까…… 라이브 카페에서 30년 넘게 노래했네요. 지금은 백년동안도에서 노래하고 있지만, 그전에는 레드문에 있었습니다. 뭐, 왔다 갔다 합니다. 하하.]
‘백년동안도’와 ‘레드문’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라이브 카페다. 거기서 30년을 노래를 불렀다면…….
[근데 라이브 카페에서 트롯은 안 부를 것 같은데요?]
[하하, 장르는 중요치 않습니다. 듣기 좋게 부르면 손님들은 좋아합니다.]
[아…… 그렇군요.]
김종근은 김승주가 질문할 걸 먼저 말했다.
[평소에 카페에서 트롯을 자주 부르기도 하고요. 제가 참 좋아합니다. 이번에 소식 듣고 재밌을 것 같아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우승 욕심은요?]
[있다고 말해야겠죠? 사실 없는데. 하하, 재밌게 즐기다 가면 그만입니다.]
덕군은 충격을 먹은 듯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아직 노래는 시작도 안 했지만, 보통 내공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경연을 참가한 동기부터가 다른 참가자들과 수준이 다르다.
그의 무대를 기다리며, 꽉 쥔 주먹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재주가 있으시군요. 아주 기대가 됩니다. 부르실 곡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르겠습니다.]
김종근은 어깨에 멘 기타 위에 손을 올렸다.
띵디 띵디 띵디리리 띵디
기타 반주 하나로 시작했다. 김종근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연주했다.
노래 시작하기 전 인터뷰 때의 편안한 미소는 사라졌다. 눈을 질끈 감고, 완전히 몰입한 김종근.
그의 노래가 시작됐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작지만 담백하게 공간을 울리는 외침.
주르륵.
첫 소절에 덕군의 눈물이 터졌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달래 주는 목소리.
‘그동안 힘들었지? 뭐 어때, 괜찮아.’
마치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덕군은 하염없이 울었고.
대기실 안의 다른 사람들 또한 충격의 도가니였다. 여기저기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 * *
1라운드. ‘100인의 오디션’이 끝났고, 모든 참가자들이 무대로 올라왔다.
김승주가 웃으며 말했다.
“와~ 빡세네요. 이제 다 끝났으니까, 조금만 더 힘냅시다.”
―네~!
[1라운드 ’진 선 미’ 수상자 결정됐습니다. 김승주 씨, 시작하시면 됩니다.]
스태프 사인에 김승주는 오케이 표시를 했다.
[하이~ 큐!]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고. 김승주는 밝은 표정으로 힘차게 말했다.
“1라운드 오디션이 모두 끝났습니다! 정말 대단한 참가자들이 많았는데요, 이제 1라운드 ‘진 선 미’ 발표만 남겨 두고 있습니다. 판정단이 결정하는데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렇죠? 장연정 마스터님?”
장연정이 마이크를 잡았다.
“네, 너무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진선미 세 분은 모두 진이나 마찬가지예요. 너무 잘하셔서 저희끼리 의견이 다 달라 정말 힘들었거든요. 판정단 마음속에는 세 분 모두 ‘진’이라는 거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김승주는 제작진이 건넨 큐시트를 펼쳤다.
“아…… 이게 이렇게 되는군요? 저도 세 분은 예상했습니다만, 결국 진은 이분이 되는군요!”
김승주는 큰소리로 외쳤다.
“먼저 ‘미’입니다. 1라운드 ‘미’!”
참가자들이 바싹 긴장한 가운데, 김승주가 큰소리로 외쳤다.
“축하드립니다! 이찬우 씨,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휘이익―!
―잘했다!
―너무 잘했어!
이찬우는 만족한 듯 활짝 웃으며 앞으로 나왔다. 화환을 받았다.
“네, 축하드립니다. 이제 ‘진’과 ‘선’이 남았는데요, 후보자 먼저 발표하겠습니다.”
두구. 두구. 두구.
“덕군! 그리고 김종근 씨!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우와아~!
―역시!
두 사람은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앞으로 나왔다.
“모두가 예상했던 후보죠? 두 분 모두 너무 멋진 무대를 보여 주셨습니다.”
김승주는 큐시트를 다시 보았다.
“‘진’을 먼저 발표하겠습니다. 호명되지 못하신 분은 자동으로 ‘선’이 되는 겁니다!”
긴장감이 도는 스튜디오.
김승주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100억 트롯맨을 찾아라! 첫 번째 라운드 ‘100인의 오디션’! 대망의 진으로 선정되신 분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