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TV고려(2)
회의룸 앞에서 기다렸다.
안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뭘 하고 있는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반 회사의 미팅룸인데, 안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다.
“아, 막상 오니까 긴장되네.”
내 옆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정진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나 또한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다. 헬로우 트롯맨의 애청자였기에 어떤 미션이 있는지, 어떻게 전개가 되는지는 알고 있다.
트롯 가수를 꿈꿀 때부터 이 경연을 기다려 왔기에, 난 그 기억을 계속 되새기고 노트에 기록도 해 두었다.
하지만…… TV에 나오지 않는 모습은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건 편집되어 방송된 것뿐으로 첫 방송 ‘100인의 오디션’에 나오기 전에 예심을 어떻게 보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내가 기억하는 건 방송에 나온 부분뿐이다. 그래서 지금 예선이 불안하기도 하고, 긴장되었다.
“형, 여기만 잘 통과하면 돼.”
“여기만?”
“응. 여기만 통과하면 그다음부턴 확실하게 준비할 수 있어.”
만약 경연 절차가 전생과 동일하다면, 내가 갖고 있는 정보를 활용하여 준비를 할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난 정진을 챙길 생각이다.
어릴 적부터 같은 길을 걸어온 동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정진이 잘된다면 내 일처럼 기쁠 것 같다.
“너 뭔가 알고 있니? 말이 좀 이상한데.”
철컥.
“덕군 님?”
“네!”
딴생각을 하던 중이라 깜짝 놀라서 크게 대답했다.
“호호. 와~ 진짜 덕군 님이네요.”
은테 안경을 쓰고, 포니테일 스타일로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여성이 회의실에서 나왔다.
아주 평범한 외모이며 내 또래 정도로 보인다. 연예계 활동하면서 화려한 사람들만 봐 와서일까.
내 눈엔 화장도 연하게 해서 수수한 분위기인 이 여성이 매력 있어 보였다.
“저 아세요?”
“호호, 제가 전화드렸었는데. 이해선이라고 해요.”
“아~ 네, 반가워요.”
이해선은 웃으며 악수를 건네었고, 난 그 손을 잡았다.
“호호. 영광입니다.”
내 손을 잡고 해맑게 웃는데, 눈이 초승달 모양이 되는 게 꼭 정동희와 닮았다.
처음 봤지만, 이상하게도 몇 번 봤던 사람처럼 편안한 느낌이었다.
“이제 덕군 님 차례인데, 준비되셨나요?”
“네. 그냥 하면 되죠, 뭐.”
이해선은 회의실 문을 닫고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들어가시기 전에요.”
“네.”
“압박 질문을 하거든요? 약간 불쾌하게 느끼실 수도 있는…….”
“그냥 노래 부르는 거 아니에요?”
“노래는 1절만 짧게 부르고요. 아무래도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보니 스토리를 중시해요.”
“아…….”
그러니까, 노래 예선이라기보다는 면접 같다는 거네.
그러고 보니 ‘100인의 오디션’을 떠올려 봤을 때 특이한 이력의 참가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노래 실력인데요, 비슷한 실력이면 사연 있는 참가자를 뽑습니다. 스타성이 있거나요.”
“네, 알겠어요. 정진 형! 들었지?”
“오케이~”
난 씩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도움이 되겠네요.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면 맞아도 덜 아프니까요. 하하.”
이해선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덕군 님 팬이거든요. 꼭 합격하셨으면 합니다.”
“네, 잘해 볼게요.”
철컥.
이해선은 회의실 문을 열고 말했다.
“들어가시죠.”
* * *
회의실 안의 기다란 테이블.
피디 3명과 보조작가 3명. 총 6명이 앉아 있었고, 스탠딩 카메라 하나가 놓여 있었다.
“덕군이라…….”
‘헬로우 트롯맨’의 책임프로듀서 고예지. 그녀는 지원서를 보며 중얼거렸다.
―굳이 오디션 볼 필요 있겠습니까?
―실력이야 입증된 사람인데.
―맞아요,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입니다. 지난주에도 의정부 부대찌개 축제에 행사 갔었습니다.
지원자가 제출한 지원서를 기준으로 TV고려에서 자체 조사를 한다.
‘복지리 총각’ 이후 덕군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얘는 근데 왜 이러고 사는 거야?”
사십 대 중반의 고 CP는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때 엄청 잘나갔잖아? 왜 지방 무대 전전하며 살았던 거냐고? 부대찌개 좋아한대?”
―…….
아무도 대꾸가 없었다. 그런 속사정이야 알 수가 없었다.
“에휴. 정작 중요한 건 확인 안 하고. 야! 오 피디!”
고 CP는 오 피디를 불렀다.
“네.”
“한때 유명했으나 지금은 지방 무대 전전하는 가수. 그런 가수에게 어떤 이미지가 흥미로울지 잘 생각해 봐.”
“알겠습니다.”
“노래는 안 들어도 되니까.”
“네.”
고 CP는 문 가까이에 있는 막내 작가 이해선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녀는 덕군을 데리러 나갔다.
잠시 후.
―오…….
―확실히 다르다.
회색 체크 정장을 깔끔하게 입은 훤칠한 청년이 들어오는데. 회의실 안에 있는 사람 모두 탄성을 질렀다.
저벅. 저벅.
젠틀하면서도 농밀한 느낌. 사람을 두근거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딱 한 사람. 고 CP만 냉정을 유지하고 있을 뿐,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덕군의 등장만으로도 홀려 버렸다.
―보통 TV에 나오던 사람이 갑자기 안 나오기 시작하면 망가지던데.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네. 좋은 쪽으로.
―이야…… 잘 컸네.
덕군의 주 활동 시기는 십 대 중반이었다. 그 당시 소년미 넘치는 상큼한 모습만 기억하고 있기에, 남성스런 모습을 갖춘 덕군에게 신선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덕군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오 피디가 대표로 인사를 받았고, 동시에 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
.
.
.
회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오 피디가 진행을 해야 하는데, 왠지 모를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죠? 제가 진행해야 하나요? 하하.”
덕군이 웃으며 말하자.
“흠! 아, 아닙니다. 카메라 앵글 맞추느라.”
카메라 앵글은 이미 한 장소로 고정되어 있었다. 궁색한 변명인 걸 알지만, 덕군은 미소로 받아넘겼다.
“왜 헬로우 트롯맨에 지원하셨습니까?”
“지원서에 보시는 대로입니다.”
“아, 네.”
다시 정적…….
“야이 씨, 똑바로 안 할래?”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보던 고 CP가 나섰고. 오 피디는 고개를 숙였다.
고 CP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덕군을 바라봤다.
“덕군 씨. 흠, 이렇게 부르니까 좀 이상한데? 어차피 이름 뒤가 ‘군’이니까 그냥 덕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편하신 대로 불러 주십시오~”
“오케이, 그럼 덕군이라고 부를게요.”
“넵.”
“헬로우 트롯맨에서 뭘 얻기를 바라나요?”
덕군의 눈이 반짝거렸다.
“제대로 된 무대에서 멋지게 트롯 공연을 하고요.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저의 트롯 무대를 보길 원합니다. 듣기도 좋고~ 멋진 가사를 지닌…… 제가 정말 사랑하는 트롯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이타적인 이유네요?”
덕군은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뭐,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근데 이건 제가 원하는 그림이니 절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도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고 CP는 오 피디와 상의했다.
“스토리랑 이미지가 안 맞는데? 이런 진정성 있는 이미지로 가기엔 외모도 멀끔하고…… 경력이 너무 화려하잖아?”
“그렇긴 합니다. 이미 컨셉 겹치는 출연자가 있기도 하고요.”
고 CP가 물었다.
“야망은 없으세요?”
“야망이요?”
“네. 트롯을 통해 한탕 하겠다던지.”
“…….”
“욕심 있을 수 있잖아요. 내가 왕년에 초통령 덕군이었는데, 이런 대중의 무관심 견딜 수 없다는…… 내가 누군데에~ 뭐 이런 거.”
덕군은 황당한 얼굴이었다.
“이미지를 정하고 경연에 참가해야 합니까?”
“저희 제작진은 헬로우 트롯맨은 전 연령층이 드라마처럼 볼 수 있는 경연을 만들고 싶거든요?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게 오디션 프로그램의 특징이긴 하지만, 경력 있는 참가자들은 프로그램에 기여를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좋은 공연과 흥미로운 이야기로요.”
덕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기획된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게 ‘헬로우 트롯맨’의 강점인 걸 기억하고 있다.
“그래도 거만한 이미지는 싫습니다. 저와 어울리지도 않고요.”
고 CP는 다시 오 피디와 상의했다.
“백마 탄 왕자님 컨셉으로 가야 하나? 허우대가 괜찮으니까.”
“아줌마 공략하는 컨셉 말이죠?”
상의를 하려면 당사자 없는 데서 하든지. 앞에 세워 놓고 다 들리게 말을 하는데…….
‘사람 불러 놓고 뭐 하는 거야?’
프로그램 재미를 위한 것이기에 이해는 되지만, 어쨌든 프레임을 씌우려는 모습이 상당히 거슬렸다.
그렇다고 해서 때려치우고 나갈 수도 없고. 14년을 기다려 온 트롯맨인데.
“덕군, 예선에서 느끼한 곡으로 할 수 있어요?”
“느끼한 곡? 지금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방송 예선 말씀하시는 건가요?”
“방송 예선이요. 선발된 100명을 추려서 방송에서 예선할 겁니다.”
덕군은 생각했다.
‘100인의 오디션 말하는 거군.’
“간질간질한 곡 있잖아요. 아, 똬리! 진남 씨의 똬리 알죠?”
당연히 알고 있다. 전국민노래자랑에서 친구들을 준비시킨 곡이기도 했으며, 덕군은 웬만한 트롯 곡은 다 외우고 있다.
무슨 노래를 불러도 상관은 없지만, 이들의 의도가 마음에 들진 않았다.
“꼭 똬리를 불러야 합니까?”
“네.”
고 CP는 단호했다.
덕군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말씀해 보세요.”
“예선은 똬리를 부를 테니, 본선 개인 미션부터는 선곡에 관여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니까 1:1 데스매치부터요.”
100인의 오디션 이후 장르별
“어?!”
고 CP의 눈이 커졌다.
“1:1 데스매치 하는 건 어떻게 알았지?”
* * *
“쇼미랑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서 얘기해 본 건데…… 설마 있나요?”
제작진과의 기 싸움에서 밀리기 싫어서 일부러 살짝 흘려 본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포맷이 뻔하죠, 뭐. 본선에서 비슷한 사람이나 경쟁자끼리 붙는 1:1 매치. 클리셰잖아요?”
“…….”
고 CP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오 피디 귀 가까이 대고 말했다.
“어떻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코너명을 똑같이 말하냐?”
“그러게요.”
“너, 혹시 어디 흘린 거 아니지?”
고 CP의 말에 오 피디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흠…….”
고 CP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덕군의 제안에 대답했다.
“선곡이 너무 이상하지 않거나, 준비한 무대 수준만 괜찮다면…… 본선에서 선곡은 건드리지 않을게요.”
“네, 좋습니다.”
덕군은 어깨를 으쓱하고 물었다.
“더 물어보실 말 없으시면, 이제 노래 부를까요?”
고 CP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불러도 될 것 같아요. 덕군이야 뭐…….”
“네? 그래도 예심인데.”
“괜찮아요, 합격이니 이만 가 보세요.”
“아니, 그래도…….”
노래 부르려고 옷까지 빼입고 왔다. 이대로 가긴 너무 아쉬웠다.
“괜찮다는데 굳이…….”
“그럼 한 소절만 부르고 갈게요.”
“아, 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덕군은 곧바로 골반을 흔들며 똬리를 불렀고.
싸~ 싸~ 내 안에 똬리를 틀어 봐~
현실일까 아닐까 사실일까 아닐까~ 헷갈리지 마! 우!
회의실에 있던 여성들은 모두 얼굴이 빨개졌다.
* * *
철컥.
심사를 마치고 나왔다. 정진이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덕군아~ 잘했니?”
“응. 형 지금 들어가면 돼.”
“어, 수고했다. 근데 왜 노랫소리가 안 들리냐?”
“노래 심사가 아닌 거 같아.”
“뭐?”
정진 옆에 앉아 있는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엇?”
난 설마 해서 물었다.
“혹시…… 양상두 선배님?”
“어, 덕군~ 풍기 인삼 축제에서 보고 오랜만이네?”
2005년에 ‘말벌’이라는 곡으로 최고의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 중인 베테랑 트롯 가수 양상두였다.
“선배님도 출연하시게요?”
“어~ 너도 지원했니?”
강적을 만났다.
연습 빡시게 해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