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그냥 말하면 돼
한 달이 좀 더 지났다.
내가 아닌 보뉘는 안 된다며 난리를 치던 사람들도 이 변화를 차츰 받아들이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제작진이 가장 적극적이었는데.
내가 보뉘로서 방송 출연을 하고 있지만, 보뉘 출연분으로 상의를 해야 할 때는 제작진은 꼭 송이수도 함께 불렀다. 아주 조그만 부분에 있어서도.
리허설 하다가 시간이 남을 때는 송이수를 보뉘 자리에 서 보도록 시키기도 하는 등 내가 있는 동안 최대한 준비를 시키려고 애썼다.
앞으로 새로 나올 코너나 캐릭터 조형을 할 때는 송이수만 따로 불러서 상의하기도 했다.
내가 떠나는 것을 가장 반대하던 제작진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인수인계에 열을 올릴 때, 서운한 감정이 약간 들기도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내가 선택한 거니까.
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 보뉘하뉘 프로그램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 제작진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출연자들도 적응해 갔다.
송이수가 보뉘가 될 거라고 공식적으로 알리지는 않았으나, 인수인계를 하는 걸 보게 되니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영향력이 출연자들 사이에서 너무 컸고, 그들은 송이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난 아주 사소한 것에도 송이수를 데리고 다니려 했고, 출연자들에게 인식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제 보뉘는 내가 아니라 송이수이며, 그가 보뉘하뉘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보였다. 이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기에 조바심을 내지는 않았다. 나 또한 출연자들의 마음을 장악하는 데, 2년이 걸렸었다.
그래도 나보다는 송이수가 훨씬 수월하게 출연자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주인공에 대한 적대감은 없으니깐. ‘보뉘하뉘 라이브 쇼’를 진행하면서 단역들이 보뉘와 하뉘에게 가졌던 거부감은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송이수는 옆에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미소 짓게 하는 힘이 있는 사람이니.
“덕군아, 지금 손동작 어땠어?”
“괜찮았어.”
송이수는 활짝 웃으며 오프닝송 007빵 자세를 내게 보였다.
“너무 가벼워 보이진 않니?”
“가벼우면 어때? 보기 좋고, 시청자들이 좋아하면 돼.”
“너처럼 멋이 안 나는 것 같아서.”
“난 형처럼 귀엽진 않잖아. 자기 캐릭터를 살려야 해. 보뉘하뉘는 생방송이잖아? 본연의 매력을 믿어.”
“그래…… 하~ 어렵네.”
그는 싱긋 웃으며 다시 오프닝송 007빵 자세를 연습했다.
지금 저 한 동작을 1시간 전에도 내게 물었었다.
난 송이수가 잘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보뉘로 지목하기 전에도 알았지만, 송이수는 진짜 노력파다.
한번 알려 주면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데, 그러면서도 힘든 내색 없이 항상 해맑게 웃었다.
세상 편해 보이고, 욕심이 없는 듯한 미소.
이 미소 때문에 사람들은 속는 것이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송이수가 얼마나 지독하게 노력하는 사람인지.
익히는 속도가 빠르지는 않다. 하나를 알려 주면 딱 하나만 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재능충들과 똑같은 성과를 보인다. 그만큼 노력하며 시간 투자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난 분장 때문에 송이수의 눈이 항상 충혈되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수인계하면서 송이수라는 인간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력도 재능이라는 걸.’
* * *
“덕군아, 이거 어때? 이거.”
송이수는 팔을 양옆으로 휘적거리며 247댄스를 선보였다.
내 필살기 중 하나라 안 가르쳐 주려 했는데…… 하도 졸라 대서 알려 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대중들에게 많이 선보인 춤이라 신선도가 떨어지기도 했고.
또한 내게는 콩콩이춤, 잉여춤, 크록하, 오징어춤 그리고…… 라이스케이크 댄스도 있으니깐.
“좋아~ 잘 춰~ 이제 그만 좀 물어봐.”
‘보뉘’에 대한 인수인계는 얼마 전에 끝났다. 송이수는 보뉘가 되기로 했을 때부터 보뉘의 요일별 코너 대본을 다 숙지했으며, 작은 손동작까지도 모두 외웠다.
아주 집요하고 꼼꼼했다.
공부를 했으면 참 잘했을 거라는 생각에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공부는 나랑 안 맞아~ 맨날 뒤에서 1등~ 헤헤.”
‘노력’이라는 재능은 선별되어 발동되는 것 같다.
“형~ 인수인계는 끝난 거 같은데. 자꾸 계약과 상관없는 거 물어볼 거야?”
247댄스를 배워 가더니, 요즘엔 트롯 창법도 슬금슬금 물어본다.
“에이~ 너무 칼 같다.”
“형, 나도 연예인이거든? 아직 은퇴 안 했거든?”
“아잉~ 덕군 선생님~”
“뭐어?!”
심지어 날 선생님이라 부른다.
난 황당해서 내 팔짱을 낀 송이수를 떼어 냈다.
가만히 있다가 큰일 나겠다.
상도덕이 없는 걸 넘어서, 양심이 없네.
“덕군아.”
녹화가 끝난 후 송이수와 대기실에서 투닥거리고 있는데, 정동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형.”
“아직 멀었니?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응? 새삼스럽게?”
요즘 녹화 끝난 후, 송이수 때문에 1시간 늦게 가는 건 기본이었다.
정동희의 표정이 어딘가 어둡다.
좀 이상한데?
“어서 가자. 이수야, 너도 연습 적당히 하고 가라.”
“네~ 사장님~”
송이수는 정동희를 ‘사장’이라고 부른다. 나 또한 호칭을 바꿔야 하는데, 아직 입에 붙지 않는다.
난 재빨리 정동희 뒤에 붙어서 물었다.
“형, 무슨 일 있어?”
“…….”
함께해 온 시간이 몇 년인데. 표정만 봐도 안다. 그리고 평소와 행동도 다르다. 요즘 집에 갈 때는 항상 송이수도 함께 나갔었다.
삑!
정동희는 차 문을 열고 말했다.
“우선 타라.”
“응.”
철컥.
차에 탄 후, 정동희는 인상을 찡그리고 물었다.
“너 혹시 찌라시 못 봤니?”
짜리시?!
“갑자기 뭔 소리야?”
“그러게 말이다.”
정동희는 내게 까똑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초통령 D군. 무리수 두다가 간판 프로그램에서 퇴출 위기!]
“으응?!”
손이 덜덜 떨린다.
‘초통령 D군’ 이건 누가 봐도 날 지칭하는 건데…… 내가 퇴출된다고? 무리수 두다가? 이게 무슨 소리야?!
난 숨을 고르고 바로 그 아래 내용을 읽어 나갔다.
[교육으로 특화된 방송사의 간판 프로그램 진행자인 D군. 명실상부한 초통령인데요, 최근 높아진 인기를 발판 삼아 출연료 인상 요구, 제작 활동에 개입하는 등 무리수를 두다가 퇴출 위기에 몰렸다는 소식입니다.]
“후우…….”
혈압이 빡 올라서, 난 심호흡을 했다.
“다 읽었니?”
“후우~ 아니, 아직.”
난 다시 한번 호흡을 진정하고 읽어 나갔다.
[안하무인 성격인 D군은 이전부터 제작진을 당황하게 하여 불협화음이 잦았다는 후문인데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에 방송사도 백기를 든 모양입니다. 조만간 초딩들을 슬프게 할 소식이 전해질 것 같군요. D군! 영원한 인기란 없어요! 조금이라도 어릴 때 인성 점검 좀 하시길!]
그 아래에 A군, C군, E양 등 ABCDEFG 별별 군과 양들의 내용이 가득했다.
어쨌든 난 다른 사람 얘기는 관심없고. 곧바로 핸드폰을 정동희에게 건넨 후 물었다.
“형, 이거 출처가 어디야?”
“출처를 알면 찌라시겠냐.”
“형은 어디서 받은 건데?”
“대학 동문 단톡방에서.”
“맙소사…….”
갑자기 등골에 땀이 쫙 났다.
일반인 단톡방에 오를 정도라면 꽤 퍼졌다는 건데.
정동희 또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를 어쩌냐.”
“…….”
“완전 허무맹랑한 내용이면 무시하고 말지. 반쪽만 맞는 내용이잖아.”
“그러게 하필 결론이…….”
찌라시 내용 중 결론만 맞다. ‘내가 관둘 거라는 사실’말이다.
결론이 맞아떨어지면, 과정은 자연스럽게 수긍되어지기 마련이다.
“어쩌냐? 지금이라도 보뉘 계속하겠다고 해?”
“형!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럼 어쩌냐. 벌써부터 언론사에서 사실관계 확인 요청이 들어오고 있는데.”
“아니라고 하면 되지!”
“당연히 그렇게 말하지. 근데 그 말을 누가 믿겠냐고! 사실이어도 아니라고 할 텐데!”
차는 아직도 출발하지 않았다.
우리는 시동도 켜지 않은 채로 계속 얘기 중이었다.
“탁 피디님한테 얘기해 봤어?”
“해 봤지. 그냥 무시하라고 하더라. 찌라시 누가 신경 쓰냐고.”
“그야, 교육 방송이야 손해 볼 거 없으니까.”
“내 말이.”
찌라시에 교육 방송은 피해자처럼 표현되어 있다. 교육 방송에 안 좋은 영향을 줄 만한 내용은 없었다.
혼란스럽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형, 이거 무시해야 해? 그래도 될까? 그게 최선일까?”
정동희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보뉘 은퇴 선언할 거잖아.”
“…….”
“무시하자. 그래도 될 거 같아. 그냥 찌라시일 뿐이야. 누가 물어보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거로.”
무시라…… 그게 최선일까.
보뉘로 2년을 넘게 있었다.
이런 마무리…… 영 개운치 않았다.
“일단 라디오 출연은 미루는 거로 할게. 지금은 몸 사리는 게 좋겠다.”
이번 주 토요일에 박청수와 약속했던 라디오에 출연하기로 했었다.
* * *
아~ 술 땡긴다.
얼마 전에 해가 바뀌어 16살이 되었다. 법적으로 술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려면 아직 몇 년 더 있어야 한다.
물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반쯤 채워진 마시다 만 소주병이 보인다.
……맛만 볼까.
순간 챙겨서 옥상으로 갈까 하다가…….
‘조금이라도 어릴 때 인성 점검 좀 하시길!’
찌라시 마지막 구절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인성…… 씨바 안 마셔! 이렇게 깔짝 마실 거 안 마시고 만다!
쾅!
난 냉장고 문을 거칠게 닫고, 콜라 캔을 집어서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단지를 이리저리 배회하며 콜라를 훌쩍이고 있는데.
“덕군이냐?”
“아빠?”
키가 크고 음울한 실루엣.
한눈에 봐도 아빠다. 오늘도 늦었네.
“추운데 이 시간에 밖에서 뭐 하냐?”
“그냥~ 속에 불난 것 좀 식히려고. 이제 퇴근하는 거야?”
아빠는 가만히 날 보다가 물었다.
“뭔 일 있냐?”
난 씁쓸히 웃었고.
아빠는 놀이터 앞에 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잠깐 앉자.”
“아니야. 피곤할 텐데, 들어가 쉬어.”
“어서.”
“…….”
결국 난 벤치에 앉았고, 아빠가 옆에 앉으며 물었다.
“얘기해 봐.”
“…….”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얘기해 봐. 아빠는 무조건 네 편이니까.”
하지만…… 기댈 곳이 필요했다.
“알았어. 대신 다른 가족들한테는 비밀로 해.”
“그래.”
오늘 들었던 찌라시 내용을 얘기해 주었다. 라디오 출연 보류 등 앞으로의 계획도…….
보뉘를 곧 관둘 거라는 건 아빠도 알고 있었기에 이해하는 데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몸을 사리기로 했다는 거냐? 어차피 관둘 거니까?”
“일단…… 지금 계획은 그래. 아직 결정된 건 없어.”
“넌 그게 맞다고 생각하냐?”
“모르겠어. 하지만 내키지는 않아.”
생각해 보니, 아빠의 반응이 좀 의아했다.
“근데, 왜 안 놀라? 찌라시 내용 듣고 놀랄 줄 알았는데.”
“알고 있었으니까.”
“아…… 알았어?”
“그래. 회사 단톡방에 돌더라. D군이면 단번에 네 얘긴 줄 알았지.”
그는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근데, 덕군아.”
“응?”
“왜 사람들에게 진실을 얘기해 볼 생각은 안 하냐?”
“이미 퍼질 대로 퍼졌을 텐데 들어 주겠어? 다들 변명이라 생각할걸.”
“네 자신을 못 믿냐?”
“어?”
“너 보뉘로서 부끄럽지 않게 해 왔잖아.”
“…….”
“괜찮아. 말해도 돼. 라디오 출연도 보류하지 말고 나가. 피하지 말고.”
“…….”
“아빠도 찌라시를 봤지만,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었다. 그냥 바로 개소리라고 생각했어.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보뉘를 아니까.”
아빠가 하는 말이라 그런 걸까.
몇 마디 말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너를 아는 사람이라면 조금도 오해하지 않을 거다. 팬들은 너가 말해 주길 기다리고 있을 거야. 만약 오해했더라도 진심으로 얘기하면 돌아올 거야.”
“…….”
“아빠 말을 믿어. 확신한다.”
움츠러들었던 마음에 아빠의 말로 인해 조금씩 펴지고 있었다.
“만약 잘못되어도 아빠가 지켜 줄 테니까 아무 걱정 말고.”
가족이 있음에 참 감사하다.
난 입술을 꽉 깨문 후 대답했다.
“알았어. 고마워,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