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가지 마(2)
“덕군아…….”
하뉘는 처연한 눈빛으로 덕군을 바라봤다. 날 두고 어딜 가냐며 낭군님을 바라보는 눈빛.
“엇…… 누나.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왜 나왔어.”
덕군은 학교 수업 때문에 다른 출연자들보다 30분 정도 늦게 도착한다.
통상 덕군이 오는 시간엔 다른 출연자들은 메이크업을 받고 있다. 여기 나와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아니라는 얘기다.
“소식 들었어. 장난이지?”
하트맨 송이수는 분장을 하다만 얼굴로 말했다.
“덕군아…… 형 불안해. 우리는 너 없으면 안 돼.”
하뉘가 ‘보뉘가 떠난다며.’ 급하게 나가길래 따라 나와 본 것인데.
송이수는 로비에 있는 제작진들과 덕군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덕군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하아…… 출연자들한테도 말을 한 건가.”
뒤에서 잠자코 있던 노재섭이 눈을 내리깔고,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아저씨 때문에 그러니? 나 때문에 요즘 제작진이랑 불편해졌지?”
덕군은 그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전 지금 어느 때보다 보뉘로서 만족해요. 제작진하고 사이도 좋고요. 안 좋은 일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럼 왜…….”
한 사람이 떠날 거라는 이유로, 교육 방송 1층 로비가 올스톱이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이 초딩들의 우상, 7대 보뉘 덕군이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교육 방송의 전체 프로그램 중 시청률의 역사를 갱신하고 있는 보뉘하뉘의 주역.
덕군은 출연자들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본격적으로 본업인 가수 준비를 하기 위해 떠나려 한다고.
하지만 가수가 본업이었냐고 되물을 게 뻔하고, 아직 제작진과 날짜 등 세부 사항이 조율된 게 아니다.
명확한 이유가 있음에도 설명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왜 벌써 출연자들에게 얘기를 해서는…… 이러면 분명 녹화에도 영향 갈 텐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확정이 난 게 없어서 지금은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정리되는 대로 말씀드릴게요.”
“…….”
덕군을 보는 흔들리는 눈빛들. 이렇게까지 말을 해도 아무도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웃으면서 말했다.
“아! 어서요~ 저 오늘 가는 거 아니라고요~ 녹화 준비해야죠. 늦었어요!”
시간은 벌써 3시를 지나려 하고 있었다.
덕군은 억지 미소를 짓고, 양팔로 사람들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자자. 어서, 녹화 준비합시다~”
* * *
저녁 7시 30분.
보뉘하뉘 녹화가 끝난 지 꽤 되었다.
탁 피디와 조승헌은 초조한 얼굴로 대기 중이었다.
“아~ 씨. 왜 이렇게 안 와?”
“…….”
“말도 없이 집에 간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좀 전에 화장실 갔다가 대기실에 있는 거 봤어요.”
“그럼 빨리 오라고 얘기 좀 하지.”
“출연진과 대화 중이더라고요. 말 걸기가 좀 그래서…….”
“…….”
덕군은 보뉘하뉘뿐만이 아니라, 교육 방송을 들썩이게 하는 출연자다. 존재감 자체가 평범한 출연자와 달랐다.
“피디님께서 후배한테 연락 좀 해 보시죠.”
“누구?”
“정동희 씨요. 후배잖아요.”
“…….”
만나면 후배라며 살갑게 대했던 정동희도 이젠 어려워졌다. 덕군과 정동희. 그 두 사람이 제작진에게 뭔가를 한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부턴가 그냥 어려워졌다.
“탁 피디님, 어서 전화를.”
“재촉하지 마~! 때 되면 오겠지. 아직 집에 안 갔다며!”
탁 피디는 자존심이 있었다. 조승헌 앞에서 대학 후배에게 쫄은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똑똑.
“…….”
문 두들기는 소리에 두 사람은 숨을 죽였다.
‘올 게 왔구나.’
후우―
서로 심호흡을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이제 아주 중요한 일이 벌어지려 한다, ‘보뉘하뉘’의 운명이 달린.
“들어오세요~”
철컥.
정동희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에 덕군이 따라서 들어왔다.
“하하, 어서 와~ 여기 앉게.”
탁 피디는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맞이했다.
정동희는 계면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출연자들이 어디서 뭔 소식을 들었는지, 움직일 틈을 안 줘서요.”
“형, 재계약 얘기 전달할 때 오프더레코드라고 말 안 했었어?”
이건 분명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딱히 그런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
말은 덕군에게 했지만 정동희의 날카로운 눈빛은 탁 피디를 쏘아보고 있었다.
“기본을 굳이 말하지는 않으니깐.”
“…….”
탁 피디는 식겁한 표정을 짓다가, 헛기침을 크게 하고 웃었다.
“흠! 흠! 하하. 저녁 시간이 지났는데 출출하지? 우리 식사하면서 대화할까?”
덕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어차피 피디님께서 원하는 답을 못 드릴 텐데, 염치가 있죠. 어떻게 밥까지 얻어먹습니까.”
덕군의 말에 탁 피디와 조승헌은 시작부터 의욕을 잃었다. 하지만 탁 피디는 다시 주먹을 불끈 쥐고 의지를 다졌다.
‘덕군은 무조건 잡아야 해, 무조건! 국장님께서도 승인한 거니까. 비즈니스는 돈이지. 자신 있게 계획대로 가자.’
척.
탁 피디는 다리를 꼬고, 고개를 뒤로 살짝 젖혔다.
“재계약을 안 하겠다고? 후회할 텐데?”
조승헌은 탁 피디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불안해졌다.
‘이 양반이 왜 이러지? 포기한 건가?’
정동희 또한 당혹스러웠지만, 어쨌든 갈 길은 정해져 있기에 할 말을 했다.
“뭐, 후회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보뉘를 놓지 못했을 때의 후회가 더 클 것 같아서 이렇게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
“아무쪼록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탁 피디는 여전히 거만한 얼굴이었다.
“이런 일방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내가 더 말하지 않을게. 이거 상당히 싸가지 없는 거야. 알고 있지?”
“모릅니다. 재계약 시기가 와서 안 하겠다고 한 것뿐이니까요.”
정동희는 탁 피디의 고압적인 자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중요한 비즈니스 순간에는 선배건 뭐건 없었다.
꿀꺽.
탁 피디는 당황했으나, 애써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흠! 우리 얘기도 들어 봐야 할 거 아니야?”
“…….”
“덕군에게 어떤 대우를 할 수 있는지 말이야.”
지금 정동희와 덕군에게 처우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아무리 좋은 제안이 와도, 보뉘하뉘가 매일 방송하는 건 변함이 없다.
가수 일도 겸할 수 있게 주 5회 방송이 주 1회 방송으로 바뀔 리는 없지 않은가.
“의미 없는데.”
덕군이 다 들리게 중얼거렸지만, 탁 피디는 못 들은 척했다.
정동희는 덕군의 무릎을 두드리고는 탁 피디에게 말했다.
“네, 들어 보겠습니다. 말씀하시죠.”
씨익.
탁 피디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뜸을 들였다. 큰 선물을 받고 좋아할 아이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처럼.
‘왜 저러는 거야?’
덕군은 지금 그의 이런 미소가 마음에 안 들었다.
“지금 회당 출연료가 30만 원이지?”
정동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50만 원으로 올려 줄게.”
조승헌은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너무 파격적인데?’
교육 방송에서 출연자에게 회당 출연료 50만 원을 제안한 적은 없었다. 아니, 지금까지 받은 출연료 30만 원도 역대급 대우였다.
더군다나 덕군은 아직 중학생인 미성년자다.
정동희 또한 놀랐다.
‘회당 출연료 50만 원이면, 월 천만 원이잖아? 와, 이건 좀…….’
확고했던 마음이 살짝 흔들리는 순간.
탁 피디는 흔들리는 정동희의 눈빛을 보고 득의만면한 표정이었다.
“어때? 다시 생각해 볼 마음이 들었는가?”
정동희는 덕군의 눈치를 봤다.
“덕군아…….”
하지만 덕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형, 내가 탁 피디님에게 직접 얘기해도 돼?”
“응?”
덕군은 탁 피디에게 바로 물었다.
“계약 기간은요?”
“1년이지.”
“한 10년 해 줄 수 있어요?”
“뭐어?!”
탁 피디는 황당한 얼굴로 덕군을 바라봤다.
“하하, 얘는 여기서 농담을.”
“아니면 5년.”
농담이 아니었다.
“스포츠 선수들 보면 장기 계약을 하잖아요. 그게 왜 그런 건데요? 최전성기에 조직에 충성해도, 기량 떨어지면 바로 바꿔 버리니까 그러는 거 아닌가요?”
“…….”
“저는 지금 전성기인데, 보뉘하뉘에 발이 묶입니다. 방송도 매일 있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죠. 5년 계약해 줄 수 있어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덕군은 이 조건으로도 계약할 마음이 없었다. 탁 피디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야아…… 아무리 잘나가는 프로그램도 1년 뒤를 장담 못 하는데,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재계약하지 않겠습니다.”
* * *
“야아~”
탁 피디는 꼬았던 다리를 풀었고, 목소리의 톤이 부드러워졌다.
“너무 그러지 말고, 딱 1년만 더 하자. 응?”
“…….”
“동희한테 대략 설명은 들었어. 가수 준비할 거라며?”
언제 얘기한 거지? 난 정동희를 바라봤다. 내 궁금증을 읽은 듯 그는 내가 묻기 전에 대답했다.
“탁 피디님이 주말에 연락 자주 했다고 했잖아. 그때 설명드렸어. 사유는 말씀드려야지.”
탁 피디가 말했다.
“왜 어렵게 가려고 해? 네 입지를 적극 활용해야지. 보뉘로서 노래 부르면 되는 거잖아.”
“…….”
“코너 하나 만들어 줄 의향도 있어. 제목도 생각해 봤는데, ‘탱글탱글 노래방’, 이런 거 어때?”
탁 피디의 눈빛이 진지했다. 간절함마저 느껴졌다. 코너 이름까지 생각해 본 걸 보면 고심을 꽤 했나 보다.
“보뉘야, 나 좀 살려 주라. 지금 너 나가면 안 돼.”
좀 전에 보이던 거만한 자세는 완전히 사라졌다. 무릎만 안 끓었을 뿐, 거의 비는 수준.
그가 진정성 있게 말하니, 내 말투도 자연히 수그러들었다.
“피디님, 죄송해요…….”
“죄송하면 가지 마~ 죄송하단 말, 하지 마~ 하지 마~”
조승헌이 내 팔을 붙잡았다.
“보뉘야, 우리 제작진 모두 진심이다? 너 없는 보뉘하뉘는 상상할 수가 없어. 지금 최전성기인데 빠지겠다는 게 말이 되니.”
“…….”
때가 되었고, 나아가야 한다.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사정을 하니 힘들다. 어찌 됐든 2년을 함께 해 왔던 동료들 아닌가.
난 탁 피디의 손을 꼭 잡았다.
“그만해 주시면 안 될까요?”
“출연료 두 배로 하자. 60만 원.”
“피디님…….”
“더 올려 줄까? 그럼 럭키 세븐으로다가, 70만 원으로 할까?”
“…….”
“아니면 77만 원……?”
언제는 출연료 규정 테이블이 있어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더니.
계속 올라간다. 100만 원까지 갈 기세다. 이럴 줄 알았으면 1년 전에 재계약할 때도 튕겨 보는 건데.
어쨌든 뒤늦은 후회고. 관두기로 마음먹은 이상, 지금은 의미 없다.
“출연료 때문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덕군아아~!”
탁 피디는 버럭 소리를 질렀고.
“제발~ 좀~!”
조승헌은 이제 뒤에서 날 끌어안았다. 이런, 백허그를…….
“하아…… 진짜.”
난 난감한 표정으로 정동희를 바라봤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여 정동희와 나눈 얘기가 있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두 사람의 표정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지옥에 떨어졌다가 바로 천국으로 올라온 듯.
“시기는 최대한 조율해 드릴게요. 저도 지금 당장 관두는 건 예의가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거든요.”
탁 피디는 아쉬워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단, 조건이 있는데, 이건 보뉘하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제안드리는 조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