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흔들리지 않는다.
덕군은 정동희와 눈빛을 마주했다.
‘겸업이냐, 전환이냐.’
덕군 또한 정동희가 전역하는 날을 기다렸고, 자기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왔다.
정동희에게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듯 보였다. 덕군은 우선 그의 얘기에 집중했다.
“형은 항상 선택권을 주네.”
“그럼~ 가장 중요한 건 너의 의지니까. 하지만 형이 바라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노력은 하겠지.”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얘기해 봐. 난 지금 이런 얘기 하는 것만으로도 기대 돼. 무려 2년을 기다렸다고.”
“짜샤~ 2년 아니야~ 21개월이야.”
정동희는 웃으며 말했다.
“우선 겸업에 대해 얘기를 하자면…… 아마 너도 예상할 텐데.”
“…….”
“보뉘를 계속 하면서 가수 활동을 하는 거야.”
덕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정동희는 얘기를 이어나갔다.
“벌써 재계약을 한번 했잖아. 역대 보뉘가 재계약 한 경우는 잘 없어. 특히, 두 번을 재계약을 한 경우는 없었지. 덕군이 이번에 재계약을 해서 3년을 채우게 되면 보뉘하뉘의 기록이 되는 거야.”
“그게 의미가 있어?”
“엄청난 의미가 있지. 보뉘하뉘는 장수 프로그램이고, 보뉘는 초통령이잖니? 형이 봤을 때는 보뉘하뉘가 앞으로도 꽤 오래 할 것 같거든.”
정동희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보뉘의 레전드가 되는 거지. 뭐…… 이미 레전드인 것 같긴 하지만. 하하.”
“흠…….”
“그게 방송가에서는 꽤 의미가 있더라. 너의 또 다른 네임드가 되기도 하는 거고.”
“교육 방송에서 재계약을 하려고 할까? 요즘 탁 피디님이 날 보는 눈빛이 좋지 않은데.”
“그래, 형도 낌새는 눈치챘다. 근데, 탁 피디님한테는 선택권이 없어. 아니, 선택권이 원래 있어야 하지만, 지금은 다른 데로 넘어가 있지.”
“어디로?”
“시청자한테.”
“…….”
“보뉘의 인기 못 느끼냐? 뭐, 보통 이럴 때 당사자는 잘 모른다고 하더라. 근데, 옆에서 봤을 때는 너 지금 엄청나.”
지금 보뉘의 인기는 최전성기. 각종 프로그램에서 섭외 전화가 빗발치고 있으며.
갈라쇼, 살리도 : 아포칼리스, 갈팡지팡 경찰서 등 인기 코너의 시청자의 선택은 이제 인기 투표가 되어 버렸다.
최근 보뉘의 승률 100%.
동급이어야 하는 하뉘가 이제 들러리 취급을 받는 상황이다.
“탁 피디님은 감성보다 이성이 앞서는 사람이야. 그리고 자기 생각이 강해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 무조건 덕군과의 재계약을 바라고 있을 거야.”
쭉―
정동희는 술잔을 털어 넣고 말했다.
“그러니까, 주변 생각은 할 필요 없어. 선택권은 너한테 있으니까. 네가 원하는 쪽으로 가면 돼.”
“그래, 어쨌든 보뉘를 이어 가면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된다 이 말이네?”
“그렇지.”
“흠…….”
덕군은 턱에 손을 괴었다.
“연예인으로서 말이지.”
덕군은 ‘연예인’을 힘주어 말했다.
“형 생각엔 내가 보뉘를 하면서 가수 활동을 해 나갈 수 있다고 봐?”
“할 수야 있겠지.”
그는 술잔을 천천히 비운 후, 이어서 말했다.
“다만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
“두 가지를 동시에 했을 때, 대중들이 날 보는 시선은 어떨까? 가수로서 제대로 봐 줄까? 보뉘 이미지가 너무 강할 텐데?”
“그건 네가 하기 나름 아니겠냐?”
“글쎄…… 아무리 잘해 봐야 ‘보뉘가 노래도 잘하네?’ 이 수준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이 말에 정동희는 대꾸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형, 그럼 ‘전환’에 대한 것은…….”
정동희는 얘기 시작 전에 ‘겸업’과 ‘전환’에 대해서 얘기했다.
“네가 짐작하는 대로야. 그건 뭐 설명할 필요 없잖아.”
“…….”
“이젠 보뉘를 내려놓고, 가수에 올인 하는 거지.”
생각은 해 봤지만, 막상 말로 들으니 묵직하게 다가왔다.
‘보뉘를 놓다. 가수에 올인한다.’
“덕군아, 말이야 쉽지, 이거 생각보다 정신적으로 타격이 클 수 있어. 보뉘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네 뒤에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는 거잖아.”
“…….”
“이별의 아픔을 가장 빨리 잊는 방법은 다른 사람으로 빈자리를 채우는 거라고 하지. 그게 다 이유가 있어. 지금 보뉘는 덕군뿐이라고 난리지만 새로운 사람이 뽑히면 금세 잊힌다?”
멘탈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얘기다. 사람이 손에 쥔 걸 놓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형은 여자 친구도 안 사귀어 봤으면서 비유를 해도…….”
“얀마, 영화 보면 알어~”
정동희는 32세지만 모태 솔로다.
“그래, 형의 말은 다 이해했어. 무슨 말인지도 알겠고. 근데 난 형 생각이 궁금한데. 어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정동희는 곧바로 대답했다.
“난 네가 딱 1년만 더 했으면 좋겠다.”
“보뉘를 말이지?”
“그래.”
“왜 딱 1년이야?”
정동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앞서 설명한 대로 1년만 더 하면 레전드 보뉘가 돼. 하지만 아직 네가 학교도 다니고 있으니 겸업은 도저히 시간이 안 되고…… 1년만 이대로 보뉘를 하고, 그 이후에 가수에만 집중하는 걸로…….”
“그러니까 앞으로 1년 동안은 가수를 하지 말자?”
“뭐, 그렇게 되겠지?”
덕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오케이! 알았어, 형. 나 결정했어.”
“벌써?”
“응.”
“하긴~ 명백하잖아~”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정동희를 똑바로 보고 또박또박 말했다.
“보뉘 이제 그만할래.”
* * *
“…….”
내 대답을 들은 정동희는 술잔을 든 채로 얼어 있었다.
“왜? 내 선택을 따르겠다며?”
“응? 어어.”
레전드 보뉘로 남고, 유명세를 바탕으로 가수 데뷔를 화려하게 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현재 출연료로 월에 600만 원 정도 받고 있으며, 각종 연예인 할인 및 에누리 찬스 등 경제적으로 도움받는 부분이 많다.
게다가 점점 공중파 및 대형기획사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커리어를 끊는다는 것. 내 손에 가득 들린 것들을 놓는다는 것.
쉽지 않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것들을 보고 보뉘를 시작한 게 아니었다.
내 원래 목표는 연예인으로 성공하는 게 아니라 가수로 성공하는 것이다.
만약 기대만큼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이왕 다시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걸 참으며 손에 좀 쥔거 놓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항상 다짐해 왔던 것처럼, 때가 되면 용기 있게 나아갈 것이다.
이렇게 해야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왜, 왜 그렇게 쉽게…….”
“당연히 쉽지. 원래 이렇게 하기로 했던 거잖아?”
“야, 난 네가 이 정도로 성공할 줄은 몰랐지.”
“뭐야~ 난 잘될 거라며? 항상 입버릇처럼 말해 놓고는~”
“지금은 그냥 잘된 수준이 아니잖아. 너가 지금 10대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탑 오브 탑급인데.”
난 고개를 저었다.
“형, 그만할래. 이 정도면 됐어.”
“…….”
“원래 가려고 했던 방향이 이쪽이 아니잖아.”
“너무 급한 거 아니니? 너 아직 어려.”
“아니, 이건 급한 거 아니야. 즉흥적인 선택이 아니니까.”
“…….”
“이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와 다른 문제야. 그냥 초심을 지키는 거라고.”
난 확신을 담아 말했고.
정동희는 내 눈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하여간 희한하다니까. 한없이 어른스러운 녀석이 이럴 때 보면 무모한 아이 같고…….”
난 빙그레 웃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순수하게 행동하면 아이처럼 보이는 걸까?
“덕군아,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천천히 생각을…….”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형. 난 결정했어. 이건 이제 그만 얘기하자.”
“와…… 고집 있네.”
정동희는 꽤 당황스러워했다.
“어떻게 나랑 상의도 없이 그렇게 딱 결정하고…….”
“형이 나보고 결정하라며?”
“네가 이렇게 선택할 줄은 몰랐지! 항상 영악하고 어른스러웠던 놈이니까.”
“하하. 내가 예상 밖으로 행동해서 당황하셨어요?”
“그래, 완전.”
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형이 날 잊은 거 아니야? 난 중요한 순간에는 항상 도전하는 쪽을 택했었는데.”
“…….”
“보뉘도 나한테는 도전이었어.”
도전해서 성공했다는 걸 전달하고 싶었다. 굳이 풀어서 설명하지 않아도 정동희라면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와…… 할 말 없게 만드네.”
쭉―
정동희는 술잔을 비운 후.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고민하는 것 같아서, 난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한참이 지난 뒤.
“하아~”
정동희는 고개를 올리고 싱긋 웃었다.
“요 녀석이 형 전역 날 아주 당황스러운 선물을 주네.”
“하하.”
“별수 있냐?”
그리고 정동희는 핸드폰을 꺼내어, 한참을 조물락거렸다.
잠시 후, 내게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
“봐 봐. 결심이 섰을 때는 저질러야 해. 그래야 뒤돌아보지 않거든.”
탁 피디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난 읽은 후 정동희에게 엄지를 치켜세우고 소리쳤다.
“와~ 우리 형, 남자다잉~?”
“짜샤, 형 4년 공부 관두고, 이태리에서 튄 남자야~”
[탁 피디님, 정동희입니다. 덕군 재계약하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녹화일 등 세부 협의는 월요일에 만나서 하시죠. 그럼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지금은 프라이데이 나잇.
탁 피디에게는 이거 빅 엿일 텐데.
“형, 너무한 거 아니야?”
“알아서 잘 받아들이시겠지. 그리고 재계약 시점 임박해서 빨리 알려야 하기도 해.”
“아무리 그래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는 빼지.”
“괜찮아.”
위이잉― 위이잉―
[탁 피디님]
전화 진동음이 울렸지만, 정동희는 조용히 핸드폰을 덮었다.
* * *
다음 날, 토요일 오전.
덕군과 정동희는 대학로 연습실에서 만났다.
“사장님~ 굿모닝입니다~”
“여어~ 김 가수 왔는가?”
대학로의 연습실을 임시 사무실로 쓰기로 했다.
“사무실 어떤가?”
“내 집 같고 좋구먼유~”
“그랴?”
두 사람은 낄낄대며 웃었다.
“사장님~ 전역하시자마자 주말에 출근시키고. 너무한 거 아니에요?”
“출근은 자기가 시켜놓고, 왜 사장님 탓을 하는가?”
“사장님 나빠요~”
그들은 또 낄낄댔다.
이제 시작. 꿈과 희망으로 부풀어 마냥 행복하고 좋았다.
“형~ 탁 피디님한테 또 연락 안 왔어?”
“안 오긴, 어젯밤 내내 전화기에 불이 났다. 월요일에 만나서 말씀드리겠다고 메시지 보냈는데도 계속 전화하시네.”
씁쓸한 미소를 지었고, 덕군은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에구, 우리 형 고생이 많았구나?”
정동희는 불쌍한 표정으로 덕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고, 덕군은 그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또 서로 한참을 낄낄대었다.
“덕군아, 신곡 작업부터 끝내자. 거의 다 됐잖아. 내일까지 끝내는 걸로. 어때?”
“좋지! 빡! 집중해서 끝내 버리자고.”
“사비(후렴)랑 2절 가사는 다 썼니?”
군 복무 중일 때 1절 가사만 써서 편지로 보냈었다.
“당연하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오호~ 좋았어, 어디 보자.”
덕군은 그 자리에서 볼펜을 들어, 연습장에 바로 적었고.
정동희는 종이에 적히는 가사를 유심히 보았다.
“오…….”
슥. 슥.
“이런 가사를 썼다고?”
정동희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고. 덕군은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아빠랑 사이 좋아졌다더니. 진짜구나?”
장하다는 듯 덕군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정동희는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잘했네~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