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그가 돌아왔다(2)
“이상하다~ 뉘앙스가 그게 아니었는데?”
정동희는 웃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저 몰래 들어온 거 아니에요. 아까 문 두들기는 소리 들으셨죠?”
“…….”
“저 진짜 엿들은 거 아니에요.”
탁 피디와 조승헌은 입맛을 다셨다.
“덕군이 뭐 노조위원장? 이게 무슨 소리예요?”
탁 피디는 입맛을 다셨다.
‘이거 원 말하기도 부끄럽고.’
조승헌이 웃으며 말했다.
“그냥~ 우리끼리 농담으로 한 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니까.”
“괜찮으니, 얘기해 보세요.”
정동희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덕군이 제 얘기는 잘 듣거든요? 스태프와 출연자 간에 오해가 없어야죠. 얼핏 듣기에 그간 소통이 잘 안 되었던 거 같은데, 얘기를 해 주시면…….”
탁 피디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덕군이 화내는 거 아니겠지?”
“화낼 만한 얘기면 제가 순화해서 전달하면 되죠. 아니면 전하지 않거나요.”
“그렇지. 역시 후배님이 말이 통하네.”
탁 피디는 이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출연료라는 게 방송국 내부규정이 있다고.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근데 그걸 가지고 타 방송국과 비교해 가면서…… 너무 하잖아?”
“덕군이 출연료 얘기를 했었어요? 이상하네…… 출연료에 대해서는 욕심 없는데.”
“흠. 자기 거 말고, 다른 사람 거로.”
“네?”
탁 피디는 얼마 전에 있었던 노재섭과 단역들의 출연료 인상 건을 얘기했다.
“아…… 동료들 일에 나섰구나? 의외네, 덕군답지 않게.”
정동희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게 다가 아니야~ 경쟁 프로에서 출연 제의 받았다고 협박을 하는데, 이건 상도가 아니잖아. 그리고 누가 뽀뽀뽀 따위 신경 쓴대? 주 시청자층이 다른데.”
누가 봐도 신경 많이 쓰고 있는 태도였다.
정동희는 그의 말을 천천히 곱씹은 후 대꾸했다.
“흠…… 네, 어떤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했기에 그런 말까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탁 피디는 뜨끔했다.
먼저 고압적인 자세로 나간 건 본인이었기 때문에.
“그 말만 들었을 때는 덕군이 선 넘었네요. 이건 제가 사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하. 그렇지?! 그렇다니까~ 역시 동희가 말이 통해.”
“그리고 출연료 건은요, 타 방송사에 비하면 어떤가요?”
“응?”
“어차피 조사하면 다 나오잖아요~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 주세요.”
탁 피디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좀 적은 편이긴 해. 근데, 우리는 다른 메리트가 있으니까.”
“다른 메리트? 뭐요?”
정동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자, 탁 피디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말했다.
“교육 방송이잖아. 어디 가서 여기 출연한다고 하면 내세우기 좋잖아.”
정동희는 황당함에 그를 바라봤다.
“진심이세요?”
“에이~ 알잖아~ 그런 거~”
“출연자들이 정규직이에요?”
허를 찌르는 말에 탁 피디의 미소가 싹 사라졌다.
“피디님 입장만 생각하셨네요. 이해가 부족하셨다아~”
정동희는 웃으면서 할 말은 다 했고. 대화 분위기는 좋지만 탁 피디는 쫄리는 기분이었다.
“뭐, 뭐 정규직은 아니지만 안정적이잖아. 프로그램이 쉽게 안 바뀌니까.”
“프로그램은 안 바뀌어도 출연자는 잘 바뀌잖아요. 어차피 분장을 진하게 하거나 탈 쓰는 캐릭터가 많으니 바꿔 봐야 티도 안 나고.”
“…….”
탁 피디는 정동희를 멍하니 보았다.
‘군대 갔다 온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사정을 잘 알어? 괜히 말 꺼냈네.’
정동희는 웃으며 물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세요?”
“없을 거…… 같아.”
“괜찮으니까. 있으면 더 하세요.”
“아니야. 다 했어.”
정동희는 모니터에 덕군 모습을 보고 일어났다.
“저 그럼 이만 일어나볼게요. 저 아직 덕군도 안 봤어요. 교육 방송 오자마자 피디님께 먼저 인사드리러 온 거예요.”
“아…… 그래. 그건 고맙네.”
“수고하세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덜컹.
정동희는 나갔고.
탁 피디와 조승헌은 멍하니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 * *
리허설 중 브레이크 타임.
“수민 누나!”
난 하뉘를 불렀다.
요즘 자꾸 내 눈을 피한다. 보뉘와 하뉘의 티키타카가 중요한데, 자꾸 피하려고 하니…….
“누나. 누나.”
“…….”
“누나~!”
난 급기야 하뉘를 큰 소리로 불렀고.
“왜에…….”
이제야 날 보는데,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누나 왜 이래?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
“왜 자꾸 사람을 똑바로 안 보는 거야?”
이상한 낌새가 있어 왔지만, 최근 들어 더 심해졌다.
“몰라. 이상하게 널 보면 동생같이 보이지가 않아서.”
“그게 뭔 소리야? 하하. 그럼 내가 오빠처럼 보여?”
“…….”
노재섭 사건 이후로 이런다. 내가 너무 어른스럽게 행동했었나?
아무리 그래도 하뉘와 나는 3살 차이다. 10대의 3살 차이는 굉장히 크다. 고등학교 2학년과 중학교 2학년 사이.
“그거 기분 탓이야~ 그리고, 우리 녹화해야 하잖아. 보뉘하뉘는 텐션이 중요한데, 누나가 불편해하는 게 느껴지니까. 뭔가 살아나지가 않아.”
“…….”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닐걸? 모니터 봐 봐.”
“덕군아, 근데…….”
하뉘는 날 힐끗 본 후 말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해? 지금 스태프가 지적한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되잖아?”
“내가 나오잖아. 우리가 나오잖아.”
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내 방송이야. 누나 방송이기도 하고. 최선을 다해야지. 당연히 퀄리티가 좋아야지.”
하뉘는 잠시 생각하더니, 피식 웃었다.
“하여간, 내가 이래서…… 휴우~ 진짜 미치겠네, 왜 이럴까?”
상기된 하뉘의 얼굴. 난 그녀의 이마 위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누나, 혹시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야?”
“어머!”
내 손이 이마에 닿자 하뉘는 불에 덴 듯 깜짝 놀라서 물러났다.
“헛…….”
당황했다. 내가 좀 무례했나?
“노, 놀랐잖아.”
“아, 미안 누나.”
하뉘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아니, 미안할 건 아니고.”
이거 어째야 하는 거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때.
어디선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보뉘 군! 리허설 중에 왜 이렇게 잡설이 많습니까? 집중해야지!”
익숙한 목소리인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목소리 주인을 알 수 없었다.
“누가 리허설 중에 두리번거립니까?”
신입인가? 내가 아는 스태프 중에는 내게 이런 말 할 사람은 없다. 탁 피디도 요즘 좋은 말만 한다.
난 큰 소리로 말했다.
“누구세요? 나와서 얘기해 주세요!”
그때 스튜디오 밖 메인 카메라 뒤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
어?!
“혀엉~!”
“덕군아~! 하하!”
동희 형이다!
난 리허설 중임에도 스튜디오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하. 형~!”
“우리 보뉘 군~ 영광입니다~”
와락!
난 번쩍 뛰어올라서 정동희 목에 매달렸다.
정말 생각도 못 했다. 정동희가 스튜디오에 등장할 줄은…….
눈물이 찔끔 나왔다.
“형~ 저녁에 보기로 했잖아~”
“놀래 주려고 왔지~ 나 없을 때 네가 어떻게 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했고.”
“하하~ 형~ 잘 왔어~”
난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고.
그는 내 등을 토닥여 준 뒤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는데.
“덕군아, 형이 잠깐 봤는데.”
“응.”
“하뉘가 너 좋아하는 거 같거든?”
“뭐어? 에이~ 아니야~”
“얀마, 너만 모르지 여기 있는 사람 다 알어. 형은 한눈에 봐도 알겠더만.”
난 하뉘가 있는 쪽을 살짝 돌아보았는데, 눈이 마주쳤다. 하뉘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그렇게 보라고 할 때는 안 보더니, 딴짓하고 있으니까 보네?
“하뉘 누나는 신건 좋아하는데?”
“그야 옛날얘기지. 사춘기 소녀들은 원래 잘 바뀌어.”
“아…….”
난 하뉘의 팬심을 본 기억이 뚜렷해서, 나에게 관심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었다.
“그러니까 집중하라고. 푸시하지 말고, 잘 다독이면서 해 봐. 형이 봐도 좀 어색하더라. 보뉘랑 하뉘는 투닥거리는 맛이 있어야 재밌는데.”
“어떻게 다독여?”
“하하.”
정동희는 크게 웃고는 내게 말했다.
“너 잘하는 거 있잖아~”
그리고 날 빤히 바라보는데. 그의 말에 난 깜짝 놀랐다.
“어른스럽게 말이야. 어른이 사춘기 소녀 다독이듯.”
이 형 뭐지? 나 2회차인 거 알고 있나?
“어른…… 스럽게?”
“그래~ 네가 나보다 더 어른스럽잖아.”
난 가만히 정동희의 눈을 바라보았는데. 다른 뜻은 없어 보였다.
“일단, 알았어.”
리허설 중이고, 녹화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형 이제 집에 갈 거야?”
“아니, 일해야지. 너 녹화 끝날 때까지 있을 거다.”
“왜? 피곤할 텐데 집에 가서 좀 쉬지. 옷도 갈아입고.”
정동희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군 복무 때문이긴 했지만 형이 없어서 그동안 너 혼자 힘들었잖아. 오늘부터 옆에 있어 줘야지.”
든든하다. 정동희가 이제 계속 옆에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 * *
하뉘의 속마음을 알고 나니, 쉽게 녹화를 마칠 수 있었다.
그냥 배려해 주고 이해해 주려했다. 물론 기대를 품게 만드는 말과 행동은 조심했다.
“형~!”
군복을 입은 정동희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 빨리 나왔네?”
“당연하지. 형, 나 배고파.”
“그래~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뭐 먹을까?”
“뭐든 너 먹고 싶은 거 먹자. 형이 쏠게. 오랜만에 취미 생활 좀 하자.”
부잣집 아들내미 정동희는 ‘쏘는 게’ 취미인 사람이다. 그게 왜 좋은 걸까? 어쨌든 옆에 있는 사람은 땡큐다.
“LA갈비 먹고 싶어.”
“알았어, 가자!”
갈빗집.
정동희는 소주잔을 기울였고, 난 잔이 비워질 때마다 채워 주었다.
“형이 혼자 따라 마셔도 된다니까.”
“아니야, 5년만 기다려. 그때부터는 같이 마셔 줄 테니까.”
“참나. 중딩이 하는 말 하고는. 그래~ 무쟈게 고맙다~”
한참을 먹다가 정동희가 넌지시 말했다.
“최근에 방송국에 무슨 일 있었니? 탁 피디님이 얘기하시더라.”
“아, 피디님 만났었어?”
“응. 오자마자 인사드렸지.”
“일전에 형이 조심하라고 말했던 아저씨 있지?”
난 노재섭과 관련해 있었던 일을 설명하였고, 정동희는 묵묵히 듣다가 말했다.
“잘했네. 근데 경쟁 프로에서 섭외받은 얘기까지 한 건 좀 심했다, 야.”
“응. 맞아. 심했어. 근데 그땐 어쩔 수 없었어. 탁 피디님이 너무 말이 안 통해서.”
“그래~ 그랬겠지.”
정동희가 살짝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난 뜨끔했다. 그는 내게 부정적인 얘기는 전혀 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정도만으로도 경각심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아~ 배부르다~”
정동희는 잔을 비우고, 배를 두들겼다.
“덕군아~”
“어 형.”
“이제 형이 나왔으니까, 본격적으로 움직여 봐야지.”
“기다리고 있었어~”
이 말에 정동희는 씩 웃었다.
“보뉘를 2년 했고…… 아직 재계약 전이지?”
“응. 방송국에서 하자는데, 좀 기다려 달라고 했어.”
“그래.”
정동희는 날 빤히 바라봤다.
“덕군은 트롯 가수가 되고 싶잖아.”
“…….”
“지금 시점에선 방향성부터 정해야 해.”
술기운에 얼굴에 홍조가 어렸지만, 눈빛만은 또렷했다.
“겸업이냐, 전환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