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그가 돌아왔다(1)
정동희는 송사무엘과 함께 위병소를 향해 걸어갔다.
21개월간 살았던 곳.
결국 이날이 오기는 왔다.
흙먼지가 날리는 연병장.
막사로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평행봉.
낡고 깨진 슬레이트 지붕의 막사.
PX와 공중전화기. 조그만 노래방.
걸어가면서 부대 안의 시설들을 눈 속에 담았다.
건물도 몇 개 없어서, 눈 감고도 다닐 이곳을 드디어 떠난다.
대한민국의 남자로 태어난 의무는 이제 끝이다.
―진군!
―형~ 잘 가요~
―고생 많았어요~
전우들이 위병소까지 마중 나왔다.
특별한 허가가 없으면 나갈 수 없는 바리케이드. 정동희와 송사무엘은 오늘부터 그 반대가 된다.
민간인이 된 그들은 특별한 허가가 없으면 바리케이드를 지나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정동희는 전우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배웅 나와 줘서 고마워. 몸 건강히 군 생활 잘해라~”
송사무엘도 전우들을 꼭 안아 주었다.
“절대 다치지 마~ 그리고 너 인마, 쓸데없이 애들 괴롭히지 말고.”
한 병사의 배를 쿡 찌르면서 말했고, 그는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에이~ 제가 후임을 왜 괴롭혀요~
―형들 가면 이제 군 생활 어떡해…….
―하아…….
전우들에게 존경을. 간부들에게 사랑받던 두 모범 병사. 전우들은 보내기가 아쉬웠다.
정동희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전우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어서 들어가. 이제 진짜 갈게.”
억지로 손을 풀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손꼽아 기다려온 전역 날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까.’
―형들 잘 가요!
―휴가 나가서 전화할께!
―여기서도 할게! 콜렉트 콜!
―동희 형! 나중에 방송국 구경시켜 줘!
전우들의 인사에 손만 흔들어 답례할 뿐. 뒤돌아보지 않았다.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 * *
소요산에서 전철을 탔다.
청담역까지 긴 지하철 여행을 해야 한다.
자리에 앉은 뒤, 송사무엘은 정동희에게 말했다.
“기분이 좀 그렇다. 그치?”
평일 낮의 1호선 종점 출발이라 그럴까? 지하철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안 그래도 가슴에 찬바람이 쌩쌩 부는데, 썰렁한 빈자리들이 가슴을 더 헛헛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러게. 후련할 줄만 알았는데.”
정동희는 지하철 창밖 풍경을 보며 멍하니 보다가.
씩 웃으며 송사무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네가 있으니까 기분이 훨씬 낫다. 31살 먹은 전역자가 나뿐만이 아니라서.”
“뭐어? 하하.”
의정부역을 지나치면서 전철 안에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 중 유일하게 군복을 입은 두 사람은 외딴섬 같았다.
“이태리 언제 가냐?”
송사무엘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대답했다.
“글쎄.”
“글쎄? 아직 계획이 없다는 거야? 야, 31살이나 먹었는데 그렇게 느긋하면 어떡하냐?”
송사무엘은 웃으며 대답했다.
“야, 야, 오늘 전역했다. 좀 시간 좀 가지면 안 되냐? 좀 놀자~”
“일반인 같으면 그러라고 하지. 근데 넌 음악 하잖아. 신체 나이 무시 못 한다~?”
음악, 운동 등 예체능 계열은 전성기가 정해져 있다.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나이 들면 한계에 부딪친다.
“나이 먹고도 대성하는 피아니스트 있거든?”
“그거야 커리어로 먹고 들어가는 거고. 나이 먹고 데뷔하는 거장이 어딨냐?”
“너 자꾸 팩폭할래?”
“나니까 이런 소리 하지.”
전역 날 적적했던 분위기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두 친구는 투닥거리고 있었다.
“오늘 당장 이태리 복귀 스케줄부터 잡아. 사무엘아~ 넌 너무 긍정적인 게 탈이야. 하긴 뭐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으니.”
“하하하.”
송사무엘은 이 말에 큰 소리로 웃었다. 전철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바라보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앗. 너무 크게 웃었나.”
“야, 부끄러워.”
“안 웃게 생겼냐? 너무 긍정적인 게 탈이라고? 그게 초긍정주의자 정동희가 나한테 할 말이냐?”
“…….”
“얀마~ 내 걱정 말고 너나 잘해. 나야 하던 거 하면 되지만, 넌 새로운 길을 가야 하잖아.”
정동희는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어릴 적부터 피아노만 했던 정동희. 이제 본격적으로 제작자의 길을 가려 한다.
“안 무섭냐?”
“글쎄.”
정동희는 이제 발 디딜 틈 없이 전철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직업.
덕군이라는 보석을 갈고 닦아서 이 대중들 앞에 선보인다.
무섭다기보다는…….
“두근거린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은데?”
송사무엘은 희열로 가득한 정동희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래, 어쩌겠냐. 네 인생인데.’
* * *
교육 방송 로비.
정동희는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이곳으로 왔다.
군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남자가 들어오니, 자연스레 시선이 집중되었다.
안주머니에서 교육 방송 출입 패찰을 꺼내었다. 처음 덕군과 방송하러 온 날, 탁 피디에게 받았었다.
게이트에 대고 들어가려는데.
“잠시만요!”
경비원이 막아섰다.
“네?”
“실례지만 어떻게 오셨습니까?”
“보뉘하뉘 녹화 때문에 왔습니다. 여기 출입증도 있는데.”
정동희는 죄지은 것처럼 소심하게 출입증을 보여 줬다.
경비원은 출입증에 있는 21개월 전 정동희의 사진을 보았다.
‘말총머리의 매끈한 구릿빛의 이태리 스타일 남성’
그때보다 더 새까매진 얼굴에 짧은 헤어스타일. 사진 속 모습과는 차이가 컸다.
“본인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아닌 거 같은데…….”
“맞아요.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하다 보니…….”
경비원은 출입증과 정동희의 얼굴을 보며 고심했다.
분명 교육 방송의 출입증은 맞으나, 최근에 출입하는 걸 본 기억이 없는 사람이다. 게다가 출입증의 얼굴하고 너무 달랐다.
아무래도 경비원은 몇 가지 더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만 이쪽으로 오시죠.”
정동희는 경비원을 따라 데스크로 갔다.
“보뉘하뉘 녹화 때문에 왔다고 하셨죠? 혹시 출연자십니까?”
“네? 아 출연자는 아니고요. 관계자인데.”
“관계자요?”
“네. 뭐…… 매니저라고 해야 하나?”
경비원은 말을 들을수록 이상했다.
‘매니저라고 해야 하나? 매니저면 매니저지. 해야 하나는 뭐야?’
경비원은 출입자 명단 철을 꺼내 들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정동희는 출입증 패찰을 보이며 말했다.
“정동희입니다.”
“어디 보자…… 보뉘하뉘, 정동희…….”
찾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출입자 명단 가장 위에 있었으니까. 이름의 비고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덕군 소속사의 제작자.]
“헛!”
경비원은 깜짝 놀라서 정동희를 바라봤다.
‘덕군이면 보뉘잖아? 그러니까 보뉘 소속사의 사장님이라고?!’
그리고 위아래를 훑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칼 군복.
‘취향이 특이하신가?’
“저, 저, 신분증 좀…….”
경비원은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가 떨렸고. 정동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정동희’
경비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맞네. 실수했다. 하아~ 감히 보뉘 군의 제작자님에게’
“충성!”
“네?!”
정동희는 갑자기 경례를 붙이는 경비원이 너무 황당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네.”
경비원은 게이트 앞까지 안내해서, 본인의 출입증으로 게이트 문을 열어 주었다.
“죄송합니다! 뵌 기억이 없어서…… 복장도 그렇고요. 오늘부로 확실히 기억해 두겠습니다!”
“네~ 괜찮습니다. 그러실 수 있죠.”
정동희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경비원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보뉘 군이 사장님 닮아서 그렇게 예의가 바르군요.”
“하하. 그래요? 감사합니다.”
사장님이라 불리는 게 어색했지만, 정동희는 그냥 대답했다.
“교육 방송 직원들 모두는 보뉘를 사랑합니다! 화이팅입니다!”
“하하. 네~”
엘리베이터가 열릴 때까지, 경비원은 파이팅을 여러 번 외쳤다.
“파이팅!”
정동희 또한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친 후, 엘리베이터에 탔다.
‘교육 방송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 같은데? 덕군이 그렇게 사랑받나?’
* * *
똑똑.
“…….”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지만, 탁 피디와 조승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보뉘하뉘 리허설 체크 중이라 정신이 없었다.
똑똑.
조승헌은 모니터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들어오세요!”
정동희가 조심스럽게 들어왔지만, 누가 왔는지 고개를 돌려 보지도 않는다.
지금 바쁘다는 걸 눈치채고, 아무 말 없이 뒤에 가서 조용히 앉았다.
“하뉘 대사가 오늘 좀 약하지 않아?”
“그러게요. 보뉘 대사에 세게 받아쳐야 하는 부분인데.”
“대사 내용 문제인가?”
“아니요. 내용 자체는 괜찮은데…… 하뉘가 보뉘의 눈을 못 마주치는 것 같은데요.”
“왜?”
“글쎄요, 뭐 보시면 대충…….”
리허설 중에 하뉘는 자꾸 몸을 배배 꼬면서, 보뉘의 눈을 피했다. 나란히 서 있음에도 자꾸 곁눈질로 보뉘를 힐끗거리는 게 보였다.
탁 피디는 자세히 그 모습을 관찰하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쟤 왜 저래? 뭐 마려운가?”
“리허설 내내 마려울 리는…….”
탁 피디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보뉘하뉘에서 가장 경계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핑크빛 무드.’
“하뉘가 이제 곧 19살이지?”
“네.”
“바꿔야겠네.”
예상했던 일이라 조승헌은 놀라지 않았다.
“보뉘 뽑았던 것처럼 오디션 하실 건가요?”
탁 피디는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아니야. 말 잘 듣는 애 뽑는 게 좋겠어. 괜히 투표했다가…….”
“보뉘 말씀하시는 거죠? 뭐…… 노조위원장 다 됐죠.”
탁 피디는 대답은 않고, 모니터 속 보뉘를 보았다. 여느 때처럼 리허설을 주도하고, 스튜디오를 장악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제목은 ‘보뉘하뉘’인데, 언제부터인가 보뉘만 있고 하뉘는 사라졌다. 프로그램 제목을 ‘보뉘와 친구들’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을 생각이 들 정도로 최근 보뉘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얼마 전에 노재섭과 라이브 쇼를 진행한 이후부터는 단역 출연자까지도 완전히 휘어잡고 있다.
보뉘하뉘 ‘노조위원장’이 된 것 같았다.
시청자와 출연자들의 절대적인 지지. 적어도 ‘보뉘하뉘’ 내에서는 스태프들도 어쩌지 못하는 거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대단한 탁 피디 또한 덕군에게는 꼼짝 못 했다. 거물도 거물이지만, 그로 인해 역대급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기에 함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도권을 뺏겨 버린 이 상황이 썩 탐탁지는 않았다.
“저…… 우리 덕군이 좀 아쉬운 점이 있나요?”
“음?”
낯선 목소리에 탁 피디는 뒤를 돌아봤다가.
“어이쿠! 깜짝이야!”
소스라치게 놀라서 벌떡 일어났고.
“뭐, 뭐야?!”
조승헌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시꺼먼 군복을 입은 군인이 뒤에 떡하니 앉아 있으니.
“누, 누구세요? 허락도 없이!”
조승헌이 말을 더듬거리면서 물었고, 정동희는 웃으며 대꾸했다.
“아, 저예요, 동희예요.”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동희?!”
탁 피디는 인상을 찌푸리고 정동희를 바라보았고.
“네, 네. 너무 오랜만이라 못 알아보시나? 하하.”
오랜만이기도 하지만, 군복 입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와~ 동희야!”
이제야 탁 피디는 경계심을 풀고, 정동희와 악수했다.
“어쩐 일이야? 휴가 나왔어?”
정동희는 차렷 자세를 하고, 경례를 하며 외쳤다.
“진군!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하핫.”
“오~~ 전역!”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해졌다. 특히 탁 피디는 이빨 8개를 드러내며 웃을 정도로 좋아했다.
“잘 왔다~ 잘 왔어~”
“하하. 감사합니다. 뒤에서 잠깐 들었는데요. 보뉘가 왜요?”
“아…….”
탁 피디는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모니터 속 덕군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너무 잘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