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몰라봐서 미안했어
관객석 통로로 무대를 내려가는 덕군과 하뉘.
―우와아~!
환호성 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카메라만 보고 생방송을 해 왔지, 시청자 반응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덥석.
하뉘가 손을 떨길래, 덕군이 꼭 잡아 주었다.
덕군 또한 보뉘하뉘 라이브를 관객들 앞에서 하는 건 처음이지만, 각종 지방 행사, 전국민노래자랑 등 현장 경험이 많다.
하지만 하뉘는 생판 처음이었다.
보!
―보고 싶어 보뉘하뉘
하!
―하루 종일 보뉘하뉘
관객들의 떼창.
본인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하뉘는 불안했다. 저예산 소극장 공연이라 이어 마이크 같은 건 없었다.
‘이게 진짜 라이브구나…… 아우, 심장 떨려.’
살아 숨 쉬며 뭐 하나에도 반응하는 진짜 라이브.
서장 아저씨는 무대 중앙에 나와 춤추면서 오프닝 송을 함께 부르고 있었다.
표정이 행복해 보인다.
―오프닝 송에 경찰서장이 왜 나오지?
―좀 이상하다.
관객들 중 일부는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노래 따라 부르느라 정신이 없다.
―보고! 또 보고! 또 또 보고 또 보고!
소극장을 가득 채우는 떼창. 이젠 관객들은 전체 가사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보뉘 하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보고! 또 보고! 또 또 보고 또 보고!
보뉘 하뉘는 이제 무대까지 내려왔다.
보뉘와 하뉘는 경찰서장의 양옆에 섰고, 세 사람은 007빵 춤을 추었다.
오프닝 송은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달으면서, 관객들이 모두 일어났다.
이제 노래뿐만 아니라 춤까지 다 따라 추고 있다.
―보뉘~ 하뉘~
관객들은 박자는커녕 호흡 하나 틀리지 않는다. 그저 완벽하다.
무대 앞 세 사람과 관객들은 시작부터 오프닝 송을 통해 하나가 되었다.
―보뉘하뉘 얍!
―우와아아~~!
이제 시작인데.
분위기는 본무대 끝나고 앵콜송 마친 것 같았다.
하뉘는 처음에 긴장했던 모습은 사라졌고, 흥분으로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경찰서장은 꿈을 이룬 것처럼 마냥 행복했다.
그리고 덕군은…….
이런 열렬한 반응과 환호가 기쁘기도 하지만, 생각이 복잡해졌다.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나? 이들에게는 진심인 보뉘가 나한테는 과정일 뿐인데…….’
보뉘를 해 온 지 어느덧 2년.
정동희의 전역 날이 가까워질수록 이제 보뉘와 헤어질 날이 가까워져 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물론 정해진 날짜는 없다.
하지만 때라는 건 찾아오기 마련이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
그리고 덕군은 그때에 이르면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얻은 두 번째 인생인데. 분명 때가 되면 용기 있게 나아갈 것이다.
* * *
“친구들 안녕~”
“반가워요~”
덕군은 하뉘와 함께 반갑게 인사했고.
“에헴~ 친구들, 우당탕탕 경찰서에 오신 걸 환영해요~”
노재섭도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와아아~!
―보뉘다! 보뉘다!
―하뉘 언니 너무 이뻐요~
―어머. 어머. 어떡해. 너무 잘생겼어~ 미쳤어~
관객들 모두 보뉘와 하뉘에게만 난리였다. 하지만 노재섭은 개의치 않았다. 그 정도는 예상했었으니까.
“형사 친구들~ 어떤 문제가 생겨도 꼭 해결해 주길 바라요~”
하뉘는 볼에 바람을 넣고 말했다.
“근데~ 오늘 너무 평온한데요? 친구들과 열심히 일하고 싶은데!”
“하하. 하뉘, 걱정하지 마요. 우리 갈팡지팡 경찰서에 문제가 안 생길 일은…….”
위잉― 위잉―
덕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이렌이 울리며, 날카로운 기계음 목소리가 들렸다.
[사건 발생! 사건 발생! 누군가 고백 편지를 놓고 갔는데, 대상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서로가 자기 편지라고 우기고 있는데, 수신자를 찾아 주기 바란다.]
우르르르.
책상과 함께, 학생들 여럿이 나왔고, 그중 두 남학생이 다투었다.
―이건 나에게 온 편지라니까~
―그게 왜 네 편지야?
―명확히 날 지칭하고 있거든.
한 학생이 그 자리에서 편지 내용을 읽었다.
[그동안 몰라봐서 미안했어. 친하게 지내고 싶어~ 이따 만나자~♥ 내가 누군지 알겠으면 날 불러줘. 그럼 나타날게♥]
―여기 어딜 봐서 널 지칭하는데? 네 이름이 여기 어디 나왔어?!
―요즘 몰라봐서 미안했다는 말을 내가 요즘 많이 들었거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럼 어서 불러 봐! 이름 부르면 나타난다잖아.
―…….
본인이라고 우기던 친구는 소리 질렀다.
―미소야!
―…….
―순이야! 말자야! 영순아!…….
그 학생은 아무 이름이나 막 불렀고…….
그때 갈팡지팡 수사팀이 나타났다.
“우리가~ 간다!”
덕군이 손을 한쪽으로 펼치고 달려왔다.
“그 어떠한 사건도!”
그다음은 하뉘가 받았고.
“갈팡지팡 경찰서에 맡겨 주쇼~!”
경찰서장이 마무리 지었다.
빠밤!
“흠…… 제군들, 이 사건 해결할 수 있겠나?”
경찰서장의 말에 덕군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어려운데요.”
“편지가 너무 애매해요. 저 단서만으로 어떻게 수신자를 밝혀야 할지…….”
“사실 이게 고백 편지가 맞는지 의문이기도 해요.”
덕군의 의구심에 하뉘는 확신 있게 말했다.
“보뉘 형사. 이 편지가 고백 편지는 맞아요. 하트가 두개 있잖아요.”
“그걸로 확신을?”
“여자는 하트 두 개는 쉽게 보내지 않아요.”
“아…… 그렇군요? 역시 하뉘 형사! 대단해요! 하하!”
경찰서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흠…… 그래. 그렇다면 두 형사 지금 바로 출동하게!”
“네!”
덕군과 하뉘는 돋보기를 들고 무대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금세 다시 경찰서장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서장님!”
“어! 보뉘 형사.”
“포기입니다!”
“아니, 이렇게 쉽게?”
하뉘가 턱을 괴고 말했다.
“아닙니다. 이리저리 궁리를 해 보았으나, 도저히 우리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입니다.”
“하아…… 그렇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고백 편지를 그딴 식으로 써서는 공권력을 낭비하게 한단 말인가!”
“면목 없습니다.”
경찰서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닐세. 자네 탓이 아니지.”
경찰서장은 고개를 숙이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궁리했다.
“흠…… 그렇다면…….”
덕군과 하뉘는 두 손을 모으고 경찰서장을 바라봤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나서는 수밖에.”
덕군과 하뉘는 동시에 소리쳤다.
“경찰서장님이 직접!”
보뉘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안 돼요~ 서장님이 수사를 나가면 이 경찰서는 누가 지킨단 말입니까?”
“맞아요, 맞아요! 서장님께서는 더 큰일을 하셔야 합니다.”
경찰서장은 신음 소리와 함께 말했다.
“흠…… 아닐세. 집히는 바가 있어서 그렇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나만 믿게. 출동!”
경찰서장은 하늘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고.
“우왓! 서장님이 출동하신다!”
보뉘와 하뉘는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정말 노재섭이 짜 준 대로 경찰서장 들러리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 ♪♬ ♪♬♪♬♩
셜록홈즈 배경음 소리가 들리고. 조명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움직였다.
경찰서장은 돋보기를 들고 무대 곳곳을 살피다가. 무대 한쪽에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찾았어!”
“뭡니까! 서장님!”
“수신자는 누굽니까?!”
경찰서장은 고개를 저으며 덕군과 하뉘에게 다가왔다.
“하아……. 이럴 수가!”
“왜 그러시죠?”
“수신자는 바로…….”
두구. 두구. 두구.
긴장되는 북소리.
덕군과 하뉘는 경찰서장의 입만 바라보았다.
“나였어.”
“네?”
“내가 바로…… 고백 편지의 수신자였다고!”
“아니…… 근데 그걸 왜 돋보기를 통해 알게 되신 건지…….”
흡!
말을 뱉은 후 덕군은 입을 황급히 닫았다. 습관적으로 나온 것이다.
‘아, 애드리브 하지 말랬는데.’
경찰서장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덕군을 향해 말했다.
“돋보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기보다는,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추리를 했고,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이지.”
“아~ 그렇구나! 수신자가 경찰서장님이셨구나!”
덕군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다.
“아~ 그러면 어서 고백 편지를 보낸 사람을 불러 보실래요?”
“어서요! 너무 궁금해요!”
“도대체 누가 이 매력적인 경찰서장님을 몰라봤던 걸까요?!”
답을 알고 있는 덕군은 벌써부터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훗.”
경찰서장은 고개를 살짝 떨구고.
저벅. 저벅.
관객석 가까이 다가갔다.
“왜…… 몰라봤어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관객들은 수군거렸다.
―뭐야…… 왜 저래?
―좀 느끼하지 않아?
―발라더야?
“이제…… 당신을 부를게요. 나와주세요.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어요.”
경찰서장은 큰소리로 외쳤다.
“친구들~!”
―…….
“친구들~~!”
여기서 관중들이 ‘네~’하고 대답해야 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경찰서장은 귀에 손을 대고, 관객석을 향해 다시 한번 불렀다.
“친구들~~! 불렀잖아! 나타나 줘야지. 하하…….”
마지막 웃음이 서글펐다.
고백 편지를 보낸 적 없는 관객들은 여전히 아무런 대꾸가 없었고.
“네에~!”
결국, 보다 못한 덕군이 대신 대답했다. 경찰서장은 다시 한번 관중들을 불렀다.
“친구들~”
덕군은 다 함께 대답하라며 손짓하고 다시 한번 대답했다.
“네~!”
경찰서장은 용기를 얻고,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나도 너희들을 좋아한다고! 친구들~”
드디어 이번에 관중들과 덕군과 하뉘 모두가 한목소리로 크게 대답했다.
‘네~~!’
이 코너를 시작으로 60분 동안.
단역들이 기획한 코너들이 진행되었다.
오늘만큼은 주인공인 그들.
보뉘와 하뉘가 있기에 그들은 더욱 빛나는 주인공이 되었다.
* * *
다음 주 월요일.
아…… 어제 푹 쉬었는데도 온몸이 뻐근하다.
주말에는 푹 쉬어야 하는데, 토요일 공연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나이 좀 먹었지만, 아직 성인의 체력은 아니다.
대기실을 향해 걸어가는데.
―덕군 안녕~!
―어서 와~
―점심은 먹었니?
단역들이 날 향해 웃으며 먼저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평소엔 내가 먼저 아는 척해도 시선을 피하거나, 마지못해 인사를 받았었다.
덜컹.
대기실로 들어가니.
―어머, 덕군 왔다.
―여기 앉어. 의자 따뜻하게 데워 놨어.
“네?!”
뭘 데워 놓기까지…… 지금 겨울이라 좀 춥기는 하지만.
―사과 좀 먹어.
아주머니 단역이 사과를 곱게 썰어서 내밀었다.
“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지난주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방송국에 오면 사무실에 들어오는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집 안 현관문을 들어온 것 같았다.
보뉘하뉘 20명이 넘는 배우 중에 나와 하뉘를 제외하면 모두가 단역이다.
그들의 태도가 달라지니 스튜디오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피디, 조연출 등 스태프가 잘해 주는 것과는 완전 달랐다.
무엇보다도.
“덕군아~”
대본 연습 중이던 노재섭이 날 발견하고는 곧바로 튀어왔다.
단역들의 대장 격인 노재섭.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날 꼭 껴안았다.
“케켁. 숨 막혀요.”
나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적대심을 갖고 있던 사람.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내가 이해 못 한다고 해서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 전생에 못 깨달았던 걸 15살인 지금 깨달았다.
이번 일을 통해 나도 많이 배웠다.
그에게 나가 달라고 했었지만 지금 떠날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지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분위기를 보니 그를 더 압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는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우리 주인공~ 어서 와. 오늘도 잘 부탁해.”
날 보는 그의 눈빛에 진심 어린 신뢰와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