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나는 네가 아니니까(2)
하뉘에게 연습실이 어딘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노재섭에게 내가 직접 물어본다면 당연히 안 알려 줄 것이다.
그는 주인공을 하고 싶어 하니, 내가 오는 걸 꺼려 할 게 분명하다.
“연습 장소 물어보니까 아주 좋아죽더라. 대학로에서 연습한대.”
하뉘는 내 부탁대로 연습 장소를 알아봐 주었다. 예상대로 어렵진 않았다.
“이랬다가 나 나중에 해코지당하는 거 아니겠지?”
“괜찮아~ 내가 잘 알아서 할게.”
“솔직히 너도 걱정돼.”
하뉘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날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니? 거기 다 너 싫어하는 사람들뿐인데, 혼자 갔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
걱정해 주니 고마웠다.
“누나, 태움이라는 걸 당해 본 적 있어?”
“뭐? 태움? 그게 무슨 뜻이야?”
노재섭은 나의 직장 상사도 아니며, 나보다 권력자도 아니다. 그리고 하청처럼 갑을 관계도 아니다.
그에게 태움을 당할 일은 없다.
하지만…… 노재섭. 그리고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
어찌 됐든 보뉘하뉘를 하는 동안은 나의 동료다. 그리고 나중에 어떻게 만날지 모르는 일. 이 업계는 생각보다 좁다.
여러 재능을 갖고 태어났으며, 이번 생에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아무리 밝게 자랐어도…… 트라우마가 좀 남아 있나 보다.
나도 이 일이 이렇게 신경 쓰일 줄은 몰랐다.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날 그렇게 싫어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돌덩이가 얹힌 듯 가슴에 답답함을 느꼈다.
얼굴도 모르는 팬이 날 싫어한다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난 아무렇지 않았으니까.
“날 위한 행동이야.”
“…….”
“노재섭 아저씨가 아니라, 날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반드시 위험을 감수해야 해.”
전생에서는 피했었다.
그 당시 김 부장이 워낙 슈퍼 파워 개꼰대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정면으로 맞닥뜨릴 생각도 안 해 봤었다.
이젠 그러고 싶지 않다.
맞설 것이다.
“누나도 같이 가 줄까? 정말 혼자 괜찮겠어?”
“진심이야?”
“…….”
하뉘는 그날 이후로 노재섭을 무서워하고 있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했고, 난 웃으며 말했다.
“훗, 괜찮아. 나 혼자 갔다 올게.”
“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 * *
연습실 앞.
휴우-!
적들 뿐인 곳에 혼자 들어가려니 긴장되었다.
‘아니야, 그냥 내 동료들이야.’
♪♬♩ ♪♬ ♪♬♪♬♩
마침 연습실 안에서 들려오는 보뉘하뉘 오프닝 송.
보뉘가 부르는 부분에서 노재섭의 목소리가 들린다.
덕군은 입술을 여러 번 찢으며 웃는 연습을 했다.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
‘좋아, 됐어. 들어가 보자.’
덜컹!
문을 활짝 열면서, 덕군은 노래를 부르며 들어갔다.
보! 보고 싶어 보뉘하뉘~
하! 하루 종일 보뉘하뉘~
-…….
-뭐야, 쟤가 왜 저기서 나와?
-하뉘가 온다며? 하뉘 대신 보뉘가 오기로 한 거야?
노재섭은 마이크를 든 채로 얼어 버렸다.
황당했다. 눈에 보이는 장면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 이 자식이 여기 왜 왔지?’
보고! 또 보고! 또 또 보고 또 보고!
덕군은 엉덩이를 씰룩이며, 007빵 자세로 ‘또 보고’ 총을 쏜 후.
그 자세 그대로 노재섭을 가리켰다.
보고! 또 보고! 또 또 보고 또 보고!
노재섭은 덕군의 손짓에 맞춰 얼떨결에 하뉘의 파트를 했다.
‘젠장,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뒤이어 다른 대원들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춤을 췄다.
덕군이 갑자기 나타나서 노래를 불렀지만,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보뉘~ 하뉘~ 보뉘하뉘 얍!
오프닝 송이 끝난 후.
-…….
연습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짝! 짝!
덕군이 크게 박수를 쳐서 주위를 집중시켰다.
“다들 잘하긴 하는데, 지금 박자가 좀 빠른 거 아세요?”
10여 명의 대원들은 모두 덕군을 바라봤다.
“음…… 차라리 반주 속도를 올리죠? 실제보다 좀 더 빠르게 하는 게 낫겠어요.”
덕군은 손짓을 하며 설명했다.
“라이브는 방송보다 루즈하게 느껴질 수 있거든요. 출연자들 못지않게 관객들의 텐션도 중요합니다.”
덕군은 음향을 맡은 사람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얘기하는 거 이해하셨죠? 비트 좀 올릴 수 있죠?”
음향 파트는 덕군을 향해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자, 바로 한 번 더 가 보죠.”
노재섭과 대원들은 여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파트는 나중에 나누기로 하고, 서장 아저씨는 일단 저랑 같이 불러요.”
♪♬♩ ♪♬ ♪♬♪♬♩
곧이어 오프닝 송 반주가 나왔다.
확실히 속도가 빨라지면서, 노래, 율동과 반주의 속도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보뉘하뉘 특유의 텐션도 올라왔다.
여기 모여 우리 만나
오늘도 좋을 거란 느낌적인 느낌
원조 보뉘의 상큼함.
껍질 간 레몬 하나가 연습실 안에 떨어져서, 탱탱거리며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노재섭은 황당했지만, 그래도 할 건 다 했다. 어떤 상태에서든 춤과 노래가 나오도록 연습을 해 놓은 것이다.
‘아저씨가 진심이구나? 연습 많이 했네.’
오프닝 송을 하면서 덕군은 노재섭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속으로 많이 놀라고 있었다.
보뉘~ 하뉘~ 보뉘하뉘 얍!
“예에~”
덕군은 엔딩과 함께 밝게 소리쳤고.
대원들의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연습하려고 부른 거네.
-맞아, 이렇게 자연스러울 리가 없잖아.
-와…… 근데 확실히 다르긴 하다.
-뭐가?
-진짜와 가짜의 차이.
-덕군이 괜히 초통령이 아니야. 스튜디오에서만 잘하는 게 아니었어.
-뭔가 든든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노재섭은 불편해졌다.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초를 치고 난리야. 아무래도 하뉘와 짠 거 같은데.’
덕군은 밝게 소리쳤다.
“자~ 우리 두 번만 더 해 볼까요?”
“네에~!”
당장이라도 덕군을 끌어내고 싶지만, 지금은 대원들이 모두 집중하고 있어서 어려웠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 ♪♬ ♪♬♪♬♩
음악이 나왔고, 연습은 다시 시작됐다.
‘이따가 보자.’
노재섭은 입술을 꾹 깨물고 스텝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 * *
“자~ 쉬었다 가겠습니다.”
10번을 넘게 한 후에 덕군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덕군아~ 수고했어.
-고마워~
덕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연습실 한쪽 구석에 앉았고.
척.
노재섭이 앞에 와서 섰다.
덕군은 그를 올려다보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앉아요.”
“…….”
노재섭은 선 채로 잠시 노려보다가 덕군의 앞에 앉았다.
“너 뭐냐?”
“…….”
“여기 왜 온 거야?”
“연습하러 왔죠.”
“난 널 부른 적이 없는데?”
“보뉘가 있는 무대잖아요. 지금 대한민국에 보뉘는 한 명밖에 없는데요?”
이 말에 노재섭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 열받게 하려고 온 거냐? 그렇게 날 무시하고 싶어?”
덕군은 잠자코 노재섭을 바라봤다.
‘이상하게 꼬였네. 무시하는 말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열받게 하러 온 거 아니에요. 같이하려고 온 거지.”
“왜 같이해? 누가 같이하재?”
“하뉘 누나한테 같이 하자고 했다면서요?”
“그래, 하뉘한테 그랬지, 너 말고.”
덕군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보뉘는 저예요. 저는 보뉘라는 캐릭터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요. 대한민국의 누구든 보뉘를 떠올리면 저를 생각할 테니까요.”
부들부들.
노재섭은 주먹 쥔 손을 떨고 있었다.
“뭘 계획 중이신지 얘기 들었어요. 보뉘 캐릭터는 아저씨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제가 허락 못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훼방 놓으려고 왔다는 거지?”
노재섭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가! 당장 나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고, 뒤에서 쉬고 있던 단원들이 모두 바라봤다.
피식.
덕군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추시죠. 뒤에서 저 많이 씹고 다니시는 거 같던데. 이런 모습 보이시면 제가 피해자처럼 보이잖아요.”
“…….”
노재섭은 뒤에 단원들 눈치를 본 후 입을 꾹 다물었다.
“잠깐 나갈래요?”
덕군은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건물 뒤 공터.
찰칵!
흡~ 휴우~
노재섭은 담배 불을 붙였다.
흡~ 휴우~
냄새 참 고소하네. 난 전생에는 피웠지만, 지금은 담배 안 피운다.
미성년자이기도 하지만, 목 관리를 위해 성인이 되어도 담배는 안 피울 생각이다.
하지만…… 몸이 기억한다, 이 고소한 향을.
“눈 감고 뭐하냐?”
“담배 연기는 이쪽으로 뱉어 주세요.”
노재섭은 잠시 고민하더니.
“한 대 줘?”
“네? 아니요. 담배 안 피워요.”
“이미지 관리하냐? 담배 안 피우는 놈이 그러고 있어?”
“진짜 안 피워요. 냄새만 좋아해요.”
“이상한 놈이네.”
노재섭은 담배를 연달아서 피웠다.
“왜 나오라고 했냐?”
난 노재섭을 바라봤다.
“아저씨, 나 싫어하죠?”
“그걸 이제 알았냐?”
“네. 너무 늦게 알게 되었어요. 정들기 전에 알았으면 간단했을 텐데.”
난 노재섭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날 싫어해요? 제가 아저씨한테 실수한 게 있었나요?”
“…….”
“만약 있었다면, 듣고 사과할게요. 뭐든 말씀해 보세요.”
노재섭은 말할 듯, 말 듯. 입만 우물쭈물거렸다.
난 기다렸다.
뭐라도 말해 주길.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냥…… 싫은 건가?”
“…….”
“제가 실수한 건 없는 게 맞죠?”
“넌…… 이해 못 해.”
그리고 노재섭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눈빛, 말투, 행동…… 그냥 다 맘에 안 들어.”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던데요?”
“…….”
노재섭은 또 말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난 내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판단했다. 한 사람을 위해 내 자신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가 내 인생에서 그 정도로 중요한 사람도 아니다.
그럼 이제 일을 해야겠다.
“선택권을 드릴게요.”
“선택?”
“네, 이런 식으로 공연할 수는 없어요. 보뉘하뉘 프로그램에도 안 좋고요, 서장 아저씨한테도 리스크가 커요. 제작진 모르게 시작이야 할 수 있겠지만, 제작진이 알게 되는 건 시간 문제에요.”
“…….”
“법적 분쟁까지 갈 수 있는 문제라고요. 탁 피디님이 프로그램 아이덴티티에 대해서 굉장히 엄격하다는 거, 아저씨도 모르지 않으시죠?”
노재섭은 얼굴이 샐쭉해져서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내가 봤을 때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왜 이렇게 급하게 했을까.
“그, 그럼. 선택권이 뭔데?”
“두 가지인데요.”
난 생각했던 걸 말했다.
“첫째, 저와 하뉘 누나까지 섭외해서 교육 방송에 저작권료 지불하고 제대로 공연한다.”
“미친, 그럴 돈 있었으면 내가 이 짓거리 했겠냐?”
노재섭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방법을 찾으셔야죠. 그리고 저와 하뉘 누나의 출연료는 공연 끝난 후에 받아도 돼요. 이건 하뉘 누나도 동의한 거니까.”
“하뉘가 출연하겠대?”
“네, 제가 출연하면요.”
“…….”
노재섭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다른 선택은 뭔데?”
“지금 당장 모든 걸 관두는 겁니다.”
노재섭은 피식 웃으며 뱉듯이 말했다.
“참나, 참 쉽네. 젠장할, 아주 간단한 거네?”
지금 그의 말이 어이없었다.
쉬워? 쉽다고?
꾹꾹 눌러 왔던 게 터졌다.
난 눈을 부릅뜨고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쉽다고요? 잘 알면서 왜 그렇게 안 했어요?”
노재섭은 눈을 깔았다.
난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정정당당하게 하세요.”
“…….”
“어른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