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창작의 길
아주 어릴 적 신바람 선생님께 얼핏 들었던 이후, 아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다.
신기하기도 하고 흥미로웠다.
정동희 또한 궁금해했다. 살짝 혀가 꼬인 목소리로 물었다.
“삼촌, 근데~ 큰삼촌이랑 덕군을 비교하면 하나도 안 닮았거든요? 덕군은 꽃미남 스타일이잖아요? 덕군을 보면서 큰삼촌을 떠올린다는 건 좀…… 하하.”
큰삼촌은 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자세히 보면 둘이 진짜 많이 닮았어. 그리고 덕군은 아직 어리잖아.”
큰삼촌은 피식 웃으며 정동희에게 말했다.
“너, 우리 형 어렸을 적 사진 본 적 없지?”
“당연히 없죠, 굳이…….”
정동희는 취기가 올라서일까, 아주 솔직했다. 평소에 아빠를 불편해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덕군은? 덕군도 본 적 없니?”
큰삼촌의 물음에 나 또한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도 뭐 굳이…….”
아빠의 어릴 적 얼굴을 굳이 찾아서 보고 싶진 않다.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
친해진 지 얼마 안 됐다.
지금도 싫어하지 않을 뿐이지, 좋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집 가거든 찾아서 봐 봐. 지금 덕군이랑 똑같이 생겼어.”
“…….”
“할머니가 너 TV에 나오면 잘 안 보려고 하시지?”
큰삼촌의 물음에 난 대답했다.
“어, 맞아.”
“그게~ 떠올라서 그러시는 거라니까? 진하 형이 TV에 나오는 것처럼 보여서.”
쭉―
큰삼촌은 잔을 비웠다.
“그 당시 할머니는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하신 것이지만, 아들의 재능을 꺾은 죄책감과 미안함이 남아 있으시거든. 말은 안 해도 우리 형제들은 다 알아.”
집에서의 할머니 모습을 떠올려 봤다.
큰삼촌의 말이 맞다. 유독 내가 TV에 나오면 자리를 피하든가 혹은 딴 행동을 하시면서 TV에 집중하지 않으려 했다.
“덕군이 TV에 나오는 거, 엄마와 형한테 트라우마일 거야.”
큰삼촌은 날 향해 싱긋 웃었다.
“한편으로는 꿈이기도 하지만.”
트라우마이면서도 꿈이라는 얘기.
어렴풋이 이해될 것 같기도 하다.
지금까지 자라 오면서 봤던 두 분의 모습을 떠올리면…….
난 분위기를 전환하려 했다. 아직 아빠 얘기가 더 궁금했다.
“삼촌~ 그럼 우리 엄마는? 엄마도 아빠를 쫓아다니던 그 여러 명의 소녀 중 한 명이었어?”
난 당연히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두 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압도적인 상위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으니.
“어, 맞어.”
“……응?”
“그 당시에 형수가 가장 열렬히 쫓아다니던 소녀였어.”
“…….”
믿기지 않았다. 근데 왜?
정동희 또한 완전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형수가 쟁취한 사랑이었지. 우리 형도 열 번도 넘게 찍으니까 결국 넘어가더라. 한 일백 번 찍혔나?”
이래서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하는 건가?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진취적인 여성일 줄이야. 그것도 아빠한테…….
“어느 여름날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아빠 나올 때까지 안 간다며 집 앞에서 기다리던 형수 모습을 아직도 눈에 선…….”
“삼촌, 그만.”
더 듣기가 불편했다.
과거는 과거로 묻어 두는 게.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빠한테…… 상상하기 싫다.
정동희가 큰삼촌에게 물었다.
“근데, 지금 두 분 관계는 왜 그래요? 그 대단한 큰삼촌이 큰숙모한테는 꼼짝 못 하는 거 보면…….”
“변하더라.”
그리고 큰삼촌 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결혼해 보면 알게 돼.”
그 이후로도 큰삼촌은 많은 옛날얘기들을 해 주었다.
호기심도 있었지만, 재밌기도 해서 나와 정동희는 그의 얘기에 심취했다.
그렇게 안산 오뎅바에서의 밤은 깊어 갔다.
* * *
다음 날. 일요일.
아침 먹고 오전에 큰삼촌 집을 나서려 했다.
좀 더 놀다가 가라고 큰삼촌과 다율이, 그리고 덕용이까지 붙잡었는데…….
일어나는 시간부터 놀아 주느라 진을 뺐더니, 아이들이 아무리 귀여워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교회 가야 해서요.’
때마침 정동희가 절묘한 이유를 대었고, 그래서 우리는 오전 중에 겨우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와…… 존경스럽다, 진짜. 애 키우는 게 장난이 아니네.”
정동희는 쩔은 얼굴로 말했다.
“형, 완전 피곤해 보여.”
“너도 마찬가지거든? 지금은 연예인처럼 안 보여.”
피식. 난 웃었고.
“하하.”
정동희 또한 이 상황이 어이가 없는지 큰 소리로 웃었다.
우리는 길을 걸으며 대화했다.
“어쨌든…… 한 건 했다. 그치?”
그렇다 속이 후련하다. 큰 숙제 하나를 끝낸 기분. 난 정동희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젠 곡에 대해서 어느 정도 확신이 들었어. 잘될 수 있을 거 같아.”
정동희는 빙그레 웃었고. 난 말을 덧붙였다.
“사실 난 처음부터 세 번째 곡이 좋긴 했어.”
“어쭈, 이제 와서 듣는 귀 있다고 생색내는 거야?”
“아니, 뭐 그렇다고.”
난 혀를 삐죽이 내밀며 말했다.
“형, 연습실로 갈 거지?”
안산에서 대학로까지 멀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지금 흥 올랐을 때, 진도를 빼고 싶었다.
“응, 가야지. 형도 지금 손이 근질근질하다, 곡 완성하고 싶어서.”
지금 만든 건 1분 30초의 샘플링 곡. 곡의 전개와 악기 편집 등 좀 더 손을 봐야 한다.
주요 멜로디와 베이스 리듬에 대해서는 확신을 얻었으니, 이제 좀 더 살만 붙여서 밀고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근데 그전에 갈 곳이 있어.”
“어디?”
“교회.”
“뭐어?”
난 황당해서 정동희를 바라봤다.
설마, 곡 작업에 또 특별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건가?
3살 아기한테 컨펌받는 짓까지 했으니 이상할 것도 없지.
“뭔데? 목사님에게 컨펌이라도 받아야 해?”
난 진지하게 물었다. 왠지 정말 그럴 것 같아서.
“아니, 주일이잖아. 교회 가야지.”
“…….”
“형 크리스찬이라고 얘기했잖아.”
“그건…… 군대에서 교회 악기 쓰려고 다니던 거 아니었어?”
이 말에 정동희는 피식 웃었다.
“처음엔 그랬지. 근데 어느 순간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왔어.”
오…… 갑자기 이질감 느껴진다.
이 홀리한 분위기 뭐야.
“덕군아, 너도 같이 가자.”
얼굴 가득 은혜 넘치는 모습.
별말 아닌데, 그의 말이 내 귀를 때렸다.
“응? 어어…….”
나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어차피 같이 움직이는데, 딱히 어디 있을 때도 없고.
“오래 안 걸리지?”
“1시간이면 끝나.”
* * *
1시간이라고 하더니, 그보다 30분을 더했다.
근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좋은 말씀 속에 평안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많이 피곤했었는데, 힐링되는 기분.
너무 잔 것 같아서, 교회를 나서며 말했다.
“이래도 되는지 몰라.”
“처음엔 그럴 수 있어.”
처음에? 이 형이 은근슬쩍 날 전도하려고…….
긴 지하철 여행 끝에 대학로 연습실에 도착했다.
벌써 오후 3시.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신들린 듯 곡 작업을 했다.
프로듀싱된 1분 30초짜리 샘플 곡을 완전한 곡으로 만들었다.
멜로디 라인도 좀 손 보았고, 악기 세팅도 하였다.
정동희가 하는 작곡 과정 중에 난 옆에서 들으며 피드백을 해 주었다.
피드백하고 또 피드백하고.
이 과정을 반복했으며, 뼈대가 만들어져 있는 곡이기에 작업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저녁이 되어 허전해 보이는 부분엔 악기 추가를 했다.
곡 재생시간은 3분 4초.
늦은 밤까지 몇 번을 반복해 들으며 미세한 부분까지 조정을 계속해나갔다.
“덕군아, 너 집에 가야 하지 않니?”
“말씀드렸어. 괜찮아. 차 끊기기 전에만 가면 돼. 이럴 때는 끊는 거 아니야.”
난 필요하면 밤이라도 샐 각오였다.
밤 11시가 다 되었을 무렵.
곡 작업은 끝났다.
‘덕용이의 선물’
가제. ‘덕용이의 선물’로 부르기로 했다.
“이제 가사만 쓰면 되겠네.”
“그러게.”
난 정동희를 보았다.
“가사도 형이 쓸 거야?”
“아니? 난 가사는 못 써.”
“그래? 그럼 누구한테 의뢰하지…….”
신바람의 지인에게 알아볼까?
아니면 오랜만에 필승엔터테인먼트에 연락해 봐야 하나?
트롯은 가사가 매우 중요하다.
모든 노래가 그렇겠지만, 특히 트롯이 그렇다.
머리에 꽂혀야 하며, 현실적이며, 인간사 희로애락이 들어가야 한다.
흠…… 히트한 트롯 곡의 작사가를 찾아가는 것도 방법일 것 같고.
돈은 좀 들겠지만.
하아…… 돈이 문제구나.
“왜 의뢰를 해?”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데, 정동희가 말했다.
“응?”
“당연히 네가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야! 히트곡 ‘흙장난’ 작사가님이 왜 본인 곡 작사를 남에게 의뢰하냐? 하하.”
하…… 흙장난.
그래, 그 곡을 내가 작사하긴 했지.
나만 아는 사실이지만, 그 작사는 사실 100% 창작이라고 보기 어렵다.
“형, 그게…… 그땐 그냥 얼떨결에 한 거였고, 이번엔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아니야, 아니야.”
정동희는 단칼에 거절했다.
“내 곡에 너 말고 다른 사람 작사를 입히고 싶지 않아.”
“…….”
“단순히 너의 데뷔곡만이 아니야. 형이 군 생활 전부를 바쳐서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곡. 내 첫 아이나 마찬가지라고. 내 아이에게 내가 원하는 옷을 입혀 주고 싶어. 아~ 지금 생각해도 흙장난 가사는 정말…….”
정동희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웃었다.
“형, 그게…….”
아, 이걸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정동희는 내 말을 더 들으려 하지 않았다.
“형 전역 전에 한 번 정도는 더 휴가 나올 수 있을 거 같은데. 늦어도 그전까지는 완성되어 있겠지?”
그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연습실을 나서며 말했다.
“형이 돈 줄 테니까, 집에는 택시 타고 가. 너무 늦었다.”
* * *
그 이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평소처럼 학교생활 열심히 하고, 보뉘로서 방송도 잘하고 있다.
하지만…….
가슴속에 얹힌 돌덩이.
데뷔곡 작사.
처음엔 책상에 앉아서 한참을 고민했었다.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트롯 히트곡들을 분석해 보기도 하고.
유사한 전개에 내용만 살짝 바꿔서도 만들어도 봤다.
그래도 뭔가 나오는 게 없다.
계속 시행착오를 겪다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흙장난’처럼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잠시 고민은 했지만, 그건 곧바로 관두었다.
정식 데뷔곡이다. 잘 만들어진 멋진 창작곡에 남의 옷을 입히고 싶지는 않았다.
“덕군아. 요즘 무슨 일 있니?”
가을의 월요일 밤.
난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없어요.”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난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계속 작사를 생각했다.
‘대부분의 노래 가사는 남녀 간의 사랑 얘기잖아. 만남 혹은 이별. 특히 이별 노래가 많지. 곡이 경쾌하니까 설레는 그리움을 표현하면 어떨까. 음…… 나비 누나한테 물어볼까? 나 만나기 전에 어떤 기분이냐고.’
데뷔곡이니 아무래도 가장 대중적인 주제인 ‘사랑’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 이번 무대는 성진이 무릅니다. 동동주 한 잔!]
가요 무대를 시청 중이었다.
동동주 한 잔?
신곡인가? 처음 들어 보는데. 제목 참 재밌다.
노총각 아들 장가가던 날
앓던 이가 빠졌다며 덩실더덩실
춤을 추던 우리 아버지
아버지에 관한 노래?
가사가 굉장히 현실적이네.
아빠가 너무 싫다며
가슴에 대못을 박던
못난 아들을 달래 주시며
따라 주던 동동주 한 잔
헉!
내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아버지를 주제로 가사를 쓸 수도 있겠구나! 동동주 한 잔의 가사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때.
두 달 전 큰삼촌 댁에서 들은 아빠 얘기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고.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왔어! 왔어!”
“아이구, 깜짝이야. 덕군아? 왜 그러니?”
가사를 쓰기 전이지만.
노래 제목부터 떠올랐다.
‘복지리 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