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학교의 얼굴(2)
웅성. 웅성.
―예술단장 되는데, 조건이 필요해?
―재원예중 최고 명예직인데…….
―콧대가 높은 건가, 싸가지가 없는 건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황나비가 말했다.
“좋아, 수락할게.”
“어?”
난 황나비의 말이 황당했다.
“제가 무슨 조건을 말할 줄 알고 그러죠?”
공식적인 자리라 황나비에게 존대를 했다.
“어떠한 조건이든. 우린 예술단장으로서 덕군이 필요하니까.”
“…….”
“예술단장은 선출하는 게 아니라, 정해지는 거야. 명예직이 아니라, 봉사직이라고 생각해. 다음 예술단장은 덕군밖에 없어.”
국회의원 뽑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말하는 황나비와 뒤에 선 중학생들이 과하다고 느껴졌지만.
그만큼 학교와 예술단이라는 조직을 각별히 생각하기에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그라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아, 알았어요. 너무 거창하게 얘기하지는 마세요. 갑자기 하기 싫어지니까.”
어차피 하기로 결심한 일, 빨리 진도를 나가야겠다.
“그럼 간단하게 조건 얘기할게요.”
난 황나비와 선배들. 선생님들을 둘러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예술단장이라고 해서 모든 학교 행사에 참여하는 의무는 없어야 합니다.”
“……?”
―이게 무슨 소리야?
―예술단장이 학교 행사에 참여하지 않겠다니?
황나비 또한 납득하기 어려운 듯 설명을 구하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제가 학교 행사를 가볍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제안이 오기 전부터 저는 보뉘로서 방송 일을 하고 있었고, 그 일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기도 하고요.”
“…….”
“게다가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도움을 드리느라 이미 몸이 두 개라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데, 예술단장이 되어 지금까지의 예술단장님처럼 학교 모든 행사에 관여한다? 불가능합니다.”
설명을 듣는 사람들의 표정이 수그러지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거절했던 거예요. 예술단장이란 직책을 안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결국 못 하겠다는 거잖아?”
학교 행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고, 어쩔 수 없는 내 상황을 설명했다.
황나비는 내가 완곡하게 거절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니요. 조건이라고 했잖아요. 제 상황과 여건에 맞게 참여하겠다는 뜻이에요. 행사 준비는 틈이 나면 관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가 정해진 모든 행사에 참여하라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해는 하지만, 수긍하기 어려운 표정들. 이해한다. 예술단장, 즉 학생 대표가 학교 행사에 의무 참여를 못 하겠다니.
민요 쌤이 말했다.
“예술단장은 학교의 얼굴이야. 도저히 불가능하니?”
“네, 그리고 학교 행사의 대부분 늦은 오후나 저녁에 하잖아요? 보뉘하뉘 녹화 시간과 겹칩니다.”
“아…….”
“그럼 이를 어째…….”
납득은 하지만 학교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상황.
선생님들과 황나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못 한다는 핑계를 대려고 말 꺼낸 게 아니다. 난 그렇게 무책임하지 않다.
“저, 그래서 한 가지 생각한 대안이 있는데.”
“뭔데?”
황나비는 반색하며 날 바라봤다.
“부예술단장직을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 * *
“저를 반드시 예술단장으로 임명하시고자 한다면 이게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배들은 수군거렸다.
―없던 직책이잖아?
―다른 임원들과 꼬이지 않나?
예술단은 예술단장 아래에 가창조장, 무용조장, 현악조장 등 파트별 임원들이 있다.
하지만 부예술단장이라는 직책은 없다.
황나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덕군의 대리인을 세워 달라는 거지?”
“대리인이라고 하면 당사자가 듣기 안 좋을 테니까요. 조력자라고 하죠.”
“흠, 알았어. 잠깐 상의 좀 할게.”
황나비와 선배들. 선생님들은 모여서 잠시 얘기를 나눴고.
난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았고.
황나비가 대표하여 말했다.
“좋아, 덕군의 조건 받아들일게. 근데 부예술단장은…….”
“제가 정했으면 합니다. 제 조력자니까 저와 잘 맞는 사람으로.”
황나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누군데?”
“서연우입니다.”
“어? 연우?! 너어~!”
연우라는 말에 황나비의 얼굴이 빨개졌다.
“왜 하필 연우야?”
“…….”
“안 돼. 안 돼. 안 돼.”
지금껏 예술단장으로 체통을 잘 지키고 있던 황나비는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둘이 더 붙어 다닐 거 아니야? 내년 되면 나도 학교에 없는데! 안 돼. 안 돼.”
황나비는 나를 대놓고 좋아하고, 서연우는 나를 은근히 좋아한다.
어린 친구들이라 속마음을 잘 숨기지 못한다. 눈에 훤히 보인다.
서연우는 나와 학년이 같고, 같은 반이다 보니 아무래도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황나비는 그걸 질투했었다.
“너, 이런 식으로 복수하기야?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상의 없이 나를 예술단장으로 지명했다고 황나비에게 신경질 부렸었다. 내가 그걸 담아 놓고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아니야. 복수 아니고 진심이야.”
“더 싫어~!”
급기야 옆에 선배들이 폭주하는 황나비를 말렸다.
―나비야, 진정해.
―서연우가 어때서?
―야, 야, 나비가 서연우 경계하잖아.
―왜?
―왜긴 왜야…….
아직까지 이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있었나? 눈치 되게 없네.
결국 민요 쌤이 나섰다.
“예술단장, 좀 진정하시고요.”
씩. 씩.
황나비는 날 표독스럽게 바라봤고, 난 못 본 척 먼 산을 보았다.
민요 쌤이 내게 물었다.
“덕군아. 연우와는 얘기가 된 거니?”
황나비의 반응이 재밌어서 장난치고 싶어졌다.
“네, 저랑 상의할 시간이 많을 거라니까 좋다고 하던데요?”
“야아~!”
거짓말은 아니다. 서연우는 싫다고 하지 않으면 좋은 것이다.
부예술단장으로 옆에서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을 때,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었다.
평소 틱틱대는 서연우의 행동을 고려했을 때, 아주 좋다는 의미였다.
“그럼 됐네.”
“선생니임~!”
황나비는 앙칼지게 소리쳤지만, 선생님은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술단장, 다른 대안 있어? 다음 예술단장은 덕군이 해야 하잖아.”
“그래도…….”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일 그르치지 마.”
황나비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고, 민요 쌤은 황나비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혼자 난리야…….”
헉, 이 말은 좀 쎈데?!
난 놀라서 황나비를 바라봤고.
“너무해요!”
황나비는 울먹이며 연습실을 뛰쳐나갔다.
* * *
일주일 뒤.
전교생 앞에서 정식으로 임명을 받았다.
아직 2012년 여름이지만, 현재 예술단장과의 인수인계와 공연 기획 경험을 위해 반년 빨리 임명한다.
‘2013년도 예술단장으로 임명함’
임명장을 받은 날 저녁.
덕군은 가족들에게 임명장을 보여 주었고, 하나같이 모두 기뻐했다.
특히 부모님이 좋아했는데, 어머니는 밤인 걸 아쉬워했다.
“미용실 언니랑 윗집 새댁한테 자랑해야 하는데…….”
김 부장 또한 퇴근하고 집에 오자마자 임명장을 보고는…….
“우와~ 아들, 대단하네?”
입에 귀에 걸릴 정도로 좋아했다.
부장 승진했을 때보다도.
“하하, 그렇게 좋아?”
덕군 또한 김 부장이 좋아하는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다들 이렇게 좋아하실 줄이야.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네. 예술단장 하길 잘한 듯.’
“아 좋지! 그럼! 대단해~”
김 부장은 신기한 듯 임명장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형광등에도 비춰 봤다.
좋은 건 이해하지만, 좀 과한 모습에 덕군은 의아했다.
‘서울대 차석으로 입학하신 분이 뭐 이 정도 가지고…….’
김 부장은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아빠는 학창 시절에 임명장 받아 본 게 없거든.”
“응? 정말?!”
덕군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글게 뜨고 김 부장을 바라봤다.
“학창 시절엔…… 임명장이 뭐냐,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김 부장은 덕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빠도 가수는 해 봤지. 아주 짧게라도.”
“…….”
“진짜 못 해 봤던 걸…… 우리 아들이 대신 해 주네. 고맙다~ 아들~”
김 부장이 좋아하니 기쁘기는 한데, 덕군은 궁금했다.
“더 얘기 좀 해줘 봐. 학창 시절이 어땠길래 그래?”
“…….”
감격한 탓에 말이 많았다고 생각했는지, 김 부장은 입을 닫았다.
옆에서 눈치 보던 막냇삼촌이 분위기를 끊었다.
“자, 자~ 오늘 같은 날 축배를 들어야지? 예술단장님! 음료수 뭐 먹고 싶어? 오늘 삼촌이 쏜다~!”
덕군은 빙그레 웃고는 김 부장에게 더 묻지 않았다.
‘나중에 기회가 있겠지.’
* * *
2013년도 예술단장이지만, 당장 7월에 있는 전공이습회부터 관여했다.
전공이습회는 여름방학 직전, 3박 4일 동안 진행되는 학생들 전공 정진을 위한 수련회다.
당연히 재원예중 예술단에서 주관해서 진행하며, 덕군은 황나비와 함께 장소 섭외, 스케줄, 커리큘럼 등 전 과정을 기획했다.
재원예중의 모든 행사는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하며, 선생님들은 지도교사로서 옆에서 거들기만 한다.
막상 해 보니, 손이 많이 갔고.
옆에서 황나비를 지켜보니, 예술단장의 역할은 핵심적이었다.
‘부예술단장 세우길 잘했어.’
보뉘하뉘 녹화 때문에 수련회를 가지는 못 했지만, 어쨌든 무사히 끝내었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가을의 토요일.
모처럼 집에서 쉬는 중이었다. 주말엔 간혹 신바람 만나서 노래 연습을 하는 거 말고는, 시체처럼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한다.
위이잉~
핸드폰이 울린다.
덕군은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피식 웃었다.
“와…… 또 나왔어?”
* * *
대학로 연습실.
덜컹.
정동희는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 군 생활 이렇게 해도 돼?”
나도 군 생활 해 봤지만, 말년쯤엔 이렇게 휴가를 자주 나왔었나?
요즘 너무 자주 만나는데, 간혹 군대에 있는 건지 청담동 집에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야아~ 너무 그러지 마. 나 한 달만에 나온 거야.”
“한 달? 2주 아니야?”
“정확하게는 3주.”
“와…… 진짜. 형네 부대 끝내준다. 나도 나중에 거기로 입대하고 싶다.”
“부대가 끝내주는 게 아니고, 형이 잘하는 거지. 포상을 잘 받으니까.”
정동희는 상병 때 행정병으로 보직이 바뀌면서 포상을 많이 받기 시작했다.
중대장 문서 작업을 돕다 보니 그렇다는데…….
“입대할 때 네가 했던 말이 맞았어. 중대장님이랑 친하게 지내니까, 잘 챙겨 주더라. 확실히 인사권자라 다르더만. 소대장님한테는 잘 보여봐야 영양가도 없었는데.”
“…….”
“덕군아, 형 반가운 거 맞지?”
“어, 반가워.”
“그럼 좀 웃어 봐.”
“아, 됐고. 연습실에서 왜 보자고 한 거야?”
주섬. 주섬.
정동희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었다.
“미디(midi)로 만들었거든?”
“군대에서? 컴퓨터로 곡 작업도 해?”
“아니~ 주말에 피씨방에서 했지.”
“어떻게?”
“외출.”
이젠 놀랍지도 않다.
군인이야, 민간인이야?
“야, 야, 병장이잖아.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고. 일단 들어 봐.”
폴더 안에 곡 파일 3개가 있었다. 정동희는 차례대로 들려주었다.
음~ 음~
아~~ 아~ 아~
난 허밍과 아무런 가사를 붙여서 멜로디를 따라 불렀고.
정동희는 미소 지으며 잠자코 들었다.
가지 마아~! 사랑아~~!
절대로! 절대로! 가지 마아~~!
곡의 클라이맥스 부분.
난 아랫배에 힘을 주고 한껏 소리를 질렀고.
“너…….”
정동희는 놀란 얼굴로 날 바라봤다.
“변성기 끝난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