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비밀 유지(2)
“네, 네. 고객님.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여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김 부장은 투덜댔다.
“아니, 점심시간이라 급하다니까? 장난하나.”
덕군에게 말했다.
“네가 보기에도 좀 이상하지 않냐?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게 고문관 스타일인데?”
덕군은 불편한 표정이었다.
‘자꾸 전생 생각나게 하네.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 사정이 있는 것이지.’
“하나도 안 이상해.”
“그래?”
“어, 내가 보기엔 아빠가 이상해. 너무 재촉 좀 하지 마. 일부러 늦장 부리는 거겠어?”
“그래도 고객이 바쁘다고 하면…….”
김 부장은 말을 더하려다가 멈추었다.
“관두자. 내가 너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잠시 후 여직원은 머리가 희끗한 남성분과 나타났다. 한눈에 봐도 상급자처럼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신화증권 개포점 지점장입니다.”
김 부장은 살짝 놀라서, 인사를 받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지점장은 웃으며 말했다.
“주식 2억 원 매수한다고 하셔서요. 제가 VIP석으로 모셔서 안내를 좀 드리려고 합니다.”
“안내요?”
김 부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다니깐…… 갈수록 태산이네.”
“아빠, 다 들려.”
너무 큰 소리로 중얼거리는 김 부장에게 눈치를 주었다.
“흠!”
김 부장은 감정을 누르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근무 중입니다.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해서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네네.”
“그냥 달라는 거 주세요.”
덕군도 옆에서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지점장에게 말했다.
“아빠 말씀대로 해 주세요. 바쁘신 분이에요. 그리고 저희는 이미 마음을 정하고 온 거라서요. 감사하지만…… 안내는 다음에 받는 거로 할게요.”
지점장은 안경을 고쳐잡고 말했다.
“아, 하지만 손님, 지금 와이씨엔터테인먼트 주가가 성장 가능성은 있지만 시가총액이 회사 가치에 비해 지금 많이 올라와 있는 상태고요. PER을 봤을 때…….”
지점장은 설득하려고 열심히 설명했지만, 김 부장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하아~ 거 주식 사기가 더럽게 어렵네.”
덕군 또한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음 다 정하고 왔고, 바쁘다고 말했음에도 눈치 없게 행동하는 게 맘에 안 들었다.
“아빠, 딴 데로 갈까?”
“그러자. 길 건너에 BK증권 있더만.”
뚝.
지점장은 그때 하던 말을 뚝 끊었고. 여직원에게 칼같이 지시했다.
“빨리 와이씨 2억 원 매수 처리해 드려! 바쁘다고 하시는데, 뭐 하는 거야?!”
* * *
1주당 가격 19,200원.
총 10,416주 매수.
총 매수가 199,987,200원.
준비한 2억 원 꽉 채워서 매수했다.
“아빠, 컴퓨터 좀 익혀 놔. 요즘엔 누가 영업소 와서 주식 매수를 해.”
“매수할 일이 또 있겠냐? 어쩌다 한번 있는 일, 뭐 하러 배우느라 에너지 소비를 하냐. 그냥 와서 해 달라면 되지.”
“적어도 이렇게 촉박하게 안 해도 되잖아.”
“음…….”
휴우~
덕군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이제 다 끝났다.
싸인이 내년에 강동스타일 음반 발매만 해 주면 된다.
환생한 이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전생과 다른 점은 거의 없었다.
전생의 모든 일을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연평도 포격 사건 등과 같은 굵직한 사건들은 동일하게 발생했다.
강동스타일 정도의 빅이슈라면 반드시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작년에 싸인이 와이씨와 전속 계약을 하기도 했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곡을 간절히 응원하게 되네.”
덕군은 마음을 담아 기원했다. 강동스타일이 성공적으로 발매하여 전세계적 히트를 치기를.
“무슨 곡 말이냐?”
김 부장은 옆에서 덕군을 힐끔 보며 물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훗, 짜식 열심히 하고 있구만.”
김 부장은 주식 2억 원을 매수한 이 극적인 상황에서도 덕군이 음악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래서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는 건가.
“아빠, 어서 회사 들어가야지?”
“너, 밥은 어떡하냐?”
점심시간이 이제 거의 끝나간다.
“지금 시간이 없잖아. 이따가 수업 마치고 방송국 가면서 대충 때워야지 뭐.”
김 부장은 덕군의 키가 신경 쓰였다.
키가 작은 건 아니며 엄밀히 보면 평균 키인데, 덕군은 5학년 때까지 또래 중에서 키가 큰 편에 속했었다.
6학년부터 다른 아이들에 비해 키가 뒤처지기 시작했는데.
방송 활동 때문에 힘들어서 발육이 더뎌지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었다.
“학교에는 아빠가 전화해 놓을 테니, 밥 먹고 가.”
덕군은 이 말이 의외였다.
‘뭐야, 아빠답지 않게.’
김 부장은 하늘이 무너져도 학교 수업은 빼먹지 말아야 한다는 주의였다.
“싫어. 방송 때문에 매번 수업도 다 못 듣는데. 난 수업 들을래.”
마침 5교시는 덕군이 좋아하는 전공 실기 수업.
요즘 민요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고, 학교 수업을 통해 노래 연습을 하고 있기에 이 시간만큼은 빠지기 싫었다.
하지만, 김 부장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덕군 아빠인데요. 지금 덕군이 저랑 같이 있거든요? 수업에 좀 늦을 것 같아서요…….”
“아빠!”
“네~ 고맙습니다.”
덜컥. 전화를 끊은 뒤 김 부장이 물었다.
“뭐 먹을래?”
“뭐야?! 맘대로? 나 수업 듣고 싶다니까?”
“어허~”
김 부장은 도끼눈을 뜨고 덕군을 바라봤다.
“까불지 말고, 어서 밥 먹고 가.”
덕군은 가만있다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럼 아빠도 같이 먹고 가.”
* * *
바람이 선선해졌다.
여름이 어느덧 지나가고, 나뭇잎에 점점 붉은색 물이 들어 가는 가을.
10월의 주말.
몇 번을 가려고 마음먹었으나, 이래저래 하다 보니 정동희에게 면회 간다고 말한 지 벌써 3개월이 지났다.
“덕군아~ 아직 멀었니?”
“다 됐어요!”
이러다가 군복무 하는 동안 한 번도 못 갈 것 같아서.
가족들의 힘을 빌렸다.
가족들에게 가을 나들이 겸 다 함께 가자고 제안했고.
가는 날짜를 한 달 전에 박아 놨다. 갈 수밖에 없도록.
“어이구~ 우리 손주, 늠름하겠네~”
할머니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정동희는 여자 연예인이나 미모의 친구들과 함께 면회 오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나.
나와 함께 가는 여성은 우리 엄마와 할머니.
데려갈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니다. 하뉘도 내가 가자고 하면 갈 것이고, 황나비와 서연우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난 처음부터 여자 친구들을 면회에 데리고 갈 생각은 없었다.
정동희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군대를 갔다 와 봐서 안다. 젊은 여성을 군인들이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그리고 어떤 상상을 하는지.
내 지인들을 그 대상으로 두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왜 안 된다는 거야? 나도 가고 싶다니까?”
그래서 지아 누나도 못 가게 막고 있었다.
“누나는 동희 형이랑 별로 친하지도 않잖아.”
“왜 안 친해?! 너처럼 붙어 다니지만 않을 뿐이지, 나도 친하거든?”
“아, 안 돼! 누나, 가지 마.”
“얘가 왜 이래? 진짜?”
아빠는 내 의도를 아는 눈치였고, 그래서인지 말리지 않고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대신 엄마가 내게 핀잔을 주었다.
“덕군아, 도대체 무슨 심보야. 동희가 니꺼니? 왜 친척 형을 두고 질투를 하고 그래?”
“……네에?!”
어머니의 말이 너무나 황당했다.
“동희가 지아랑 친하게 지내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아니거든요?!”
내가 정동희와 아무리 가까이 지냈어도 이런 오해를 살 줄은 몰랐다.
“그럼, 저리 비켜. 지아야, 어서 갈 준비해라.”
“어머니~ 거기 누나가 가면 안 된다니까요?”
“어허, 혼난다?”
어머니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러면 어쩔 수 없다. 난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 안 되는데…….”
“치, 까불고 있어!”
지아 누나는 내게 주먹을 올려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올해 17세인 지아 누나.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만 봐도, 이젠 소녀보다는 숙녀에 가깝다. 심지어 이쁘기까지 하다.
“하아…… 안 내켜.”
난 고개를 저으며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 * *
할머니, 김 부장, 어머니, 지아 누나, 덕군.
이렇게 5명을 꽉 채운 악센트는 연천군을 향해 출발했다.
“강남 사니까 이런 게 불편하네. 예전에 월계수동 살 때는 경기 북부는 금방이었는데. 그쵸? 호호.”
어머니는 오랜만의 나들이로 기분이 좋아 보였고.
덕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이~ 어머니, 그거 하나 빼고는 편한 게 더 많잖아요~”
“호호, 그런가?”
지아 누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도 월계수동이 더 좋았어. 곰팡이도 없고.”
“…….”
지아 누나는 김 부장을 많이 닮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옳은 말만 하는 스타일.
“누나는 굳이 지금 그런 말을…….”
“왜? 맞잖아?”
“…….”
마침 그때 차는 동부간선도로로 월계수동을 지나고 있었고,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연천군.
한탄강을 건너며 주변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북한과 가까워서인지 아니면 자연환경 탓인지.
이 음침하고 쎄한 기운.
덕군은 창밖을 보며 전생에 군복무 시절을 추억하고 있었다.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
정동희에게 받은 주소를 네비를 찍고 왔지만, 지명도 명확하지 않고 근처에 부대가 많아서 헷갈린다.
김 부장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천천히 운전했다.
“덕군아, 부대 번호가 뭐랬지?”
“1672부대야.”
“1672…….”
왔던 곳을 몇 번을 더 뺑뺑 돌아가, 겨우 찾았다.
김 부장은 부대 안으로 차를 몰며 중얼거렸다.
“예나 지금이나 부대 찾아가기는 참 힘들어.”
“원래 진지 구축 목적이 그러니까.”
“뭐라고?”
덕군이 무심결에 던진 한마디에 김 부장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응? 아니야. 뭐 해? 위병소에서 문 두들기잖아.”
위이잉―
창문을 내리자.
“진군!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정동희 일병 면회하러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위병 조장은 이런저런 절차를 밟은 후 바리케이드를 열어 주었다.
* * *
덕군과 가족들은 점심시간에 맞춰서 도착했다.
면회 장소를 향해 걸어가는데.
지아 누나에게 군인들 시선이 집중됐다. 여기서 가장 이쁘고 젊었으니까.
“나 옷에 뭐 묻었나? 왜 이렇게들 쳐다보지?”
지아 누나는 불편해했고.
덕군과 김 부장도 불편했다.
면회소.
가족과 연인. 친구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
그리움과 반가움이 교차된 장소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행복해 보였다.
우리는 싸 온 음식들을 탁자 위에 펼쳐 놓고 정동희를 기다렸다.
“하하, 우리 손주가 할머니 온 거 보면 깜짝 놀라겠구먼~”
“네, 많이 놀랄 거예요.”
덕군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면회 온다는 말만 했지, 나 혼자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었다.
잠시 후.
정동희가 면회 장소에 나타났고.
“동희 형~”
“하핫, 덕후야~”
정동희는 완전히 들뜬 얼굴이었는데.
기대하는 눈빛으로 덕군 옆에 있는 사람들을 재빨리 살폈다.
“정 일병~ 어서 와라~”
덕군 옆에서 손을 흔드는 김 부장.
“엇……?”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할머니.
“어이쿠~ 우리 손주 장하다!”
“……어어?”
반갑게 다가오던 발걸음이 느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