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비밀 유지(1)
일주일 뒤.
덕군은 녹화를 마친 후 집에 와서, 김 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까지 가능한 자금을 다 모은 뒤, 내일 함께 증권사를 가기로 했었다.
‘최소 1억 원은 모았겠지.’
와이씨 주가가 얼마나 올랐었는지는 기억 못 한다.
다만 굉장히 많이 올라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다는 것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최소 2배 정도는 올랐으니까, 놀고먹는 대학생이 알 정도가 아니었을까?’
분명히 오르는 건 확실한데…….
그 정도는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덜컹.
김 부장이 들어왔다.
“다녀오셨어요?”
“형~ 왔어?”
어머니는 현관 앞에 나와서 김 부장의 서류 가방을 받아주었다.
“식사는요?”
“먹고 왔어.”
“출출하면 밥 차려 줄게요.”
어머니는 여느 때처럼 밥 차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김 부장은 그런 어머니가 안쓰러워서 핀잔을 주었다.
“아니야, 됐어. 집에서 저녁 먹을 것 같으면 연락한다니까?”
“그럼 어서 씻고 쉬세요.”
“흠.”
김 부장은 안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덕군과 눈이 마주쳤고.
덕군은 그에게 눈짓을 보냈다.
김 부장은 그런 덕군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내일이 D―day잖아.”
“…….”
“돈 준비됐지?”
“흠…….”
“씻고 얘기 좀 해.”
“알았다.”
이 일은 극비리로 진행 중이다.
김 부장은 아들 말에 휘둘려서 투자한다는 사실이 바깥에 알려지길 꺼려 했다. 물론 그는 아들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고, 그만큼 믿음이 있기에 결정한 일이지만 외부 사람이 보기에는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덕군 입장에서는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방해꾼이 늘어날 것으로 보았다. 본인 판단에 확신이 있지만, 어찌 됐든 아직 미성년자니까.
이런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 자연스럽게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일이 된 것이다.
* * *
김 부장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이쿠, 깜짝이야.”
덕군이 깜깜한 방 안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불 꺼 놓고 뭐하냐?”
“기밀 유지.”
“얀마. 이러는 게 눈에 더 띄어.”
탁!
김 부장은 천장 등 스위치를 켰다.
덕군은 팔짱을 끼고 물었다.
“비밀 유지 잘하고 있지?”
“너야말로?”
두 남자 다 한 입으로 두말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서로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김 부장은 옷을 갈아입으며 물었다.
“이렇게 급해야 했냐?”
“어, 급해.”
“왜?”
“주식은 시간이 금이잖아.”
와이씨 주식이 오른다는 확신은 있다. 대략 언제 오를지도. 그러나 저점은 모른다. 최대한 빨리 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얼마까지 준비했어?”
김 부장은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이천.”
“……뭐어?!”
‘2,000만 원?! 두배 오른다고 해 봐야 겨우 4,000만 원인데. 세 배까지 봐도 6,000만 원?’
이 정도 수익도 적지는 않지만, 이 대가족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아빠는 소고기 회식이나 하자고 투자하겠다는 건가?’
황당한 덕군과는 달리, 김 부장은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미성년자 아들의 말을 믿고, 2,000만 원을 투척하는 통 큰 아빠의 모습.
“왜 너무 많냐?”
“아니…… 아빠.”
덕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최소 1억 원은 모았어야지.”
“……뭐어?!”
김 부장은 눈을 크게 떴다.
“아빠,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새가슴이네? 내가 확실한 거라고 했잖아. 믿는다고 하더니 결국 진심은 이거였어?”
김 부장은 자존심이 상했다.
“야, 이천만 원 큰돈이야. 우리 집…… 아니다, 어쨌든 적은 돈 아니라고.”
대출 이자에 생활비까지. 집 사정상 최대한 모을 수 있는 돈이 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자세한 사정 얘기까지 덕군에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이 돈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데?”
“뭐?”
“없어지면 우리 집 식구들 길거리에 나앉는 거야?”
김 부장은 황당한 눈길로 덕군을 바라보았다.
‘얘가 연예인 생활하더니, 돈이 우습게 보이나? 아니면 그 정도로 확신할 뭔가가 있어서 저러는 건가.’
덕군은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다.
“아빠, 인생의 찬스라고! 두 번 올 기회가 아니야. 무리할 때는 좀 무리해야 해. 날 믿어. 딱 1년이라고! 1년!”
“…….”
“영혼의 밑바닥까지 끌어올려서 모은 돈이 2천만 원이라면 내가 더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난 산성물산 부장님이 준비할 수 있는 돈이 겨우 2천만 원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덕군은 말하는 중간중간 계속 김 부장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김 부장의 승부욕을 알기 때문에.
김 부장은 어금니를 깨물고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얼마나 있어야 하는데?”
“많을수록 좋아. 많이 투자할수록 우리 집은 풍요로워지는 거야.”
김 부장은 미간을 찌푸리고 덕군을 보았다. 정말, 덕굴의 얼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로 확신해?”
“어, 완전 확신해.”
“흠…….”
김 부장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알았다. 증권사 가기로 한 건 다음 주로 미루자. 자금을 더 모아보마.”
“알았어.”
덕군은 방을 나가며 생각했다.
‘휴우~ 확신 있는 일을 설득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구나.’
* * *
일주일 뒤.
‘신화증권 개포점.’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김 부장과 덕군은 증권사 앞에서 만났다.
“아빠가 알아서 한다니까.”
“안 돼. 내가 봐야 해.”
덕군은 혹시라도 김 부장이 증권사 직원의 말에 현혹되어 다른 주식을 사거나, 파생상품에 투자할까 봐, 현장에서 지켜보려 했다.
물론, 김 부장이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안다. 하지만 전생의 경험을 통해 직장생활만 오래 한 사람들은 꽤 순진한 면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가족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일.
좀 과할지라도 꼼꼼하게 챙기려는 것이다.
“자금 얼마나 준비했어?”
이번엔 자금 상황 체크를 위해 사전에 만나지 않았다.
김 부장은 덕군의 의도를 확실히 알았고, 덕군 또한 김 부장이 같은 얘기 두 번 하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안다.
서로 바쁘게 사는데, 시간 낭비는 필요 없었다.
“2억 원.”
덕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 부장을 바라봤다.
“오…….”
덕군의 놀란 표정을 보며, 김 부장은 피식 웃었다.
“짜식, 놀라기는.”
“아니, 왜 잘할 수 있으면서 진작 안 그랬어? 이렇게 유능하신 분이?”
덕군은 김 부장의 어깨를 두들기며 장난스럽게 말했고.
‘일수 뜯기는 것도 아니고 뭐야? 이 태도는.’
“손 치워.”
“흠.”
덕군은 김 부장을 따라 증권사로 들어갔다.
‘2억 원…… 두 배면 4억. 3배면 6억 원. 그 정도면 조그만 집 한 채 정도는 살 수 있겠어.’
앞장선 김 부장이 물었다.
“싸인의 신곡이라고 했지?”
“응, 맞아.”
“제목은?”
“강…….”
덕군은 하마터면 대답할 뻔했다.
‘제목을 말하면 안 되지. 내가 와이씨 관계자도 아니고 제목까지 안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제목을 내가 어떻게 알아?”
“뭐야, 방금 대답하려던 거 아니었냐?”
“아니야.”
증권사 안으로 들어가자 보안요원이 맞아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신화증권입니다. 번호표 받고 잠깐만 대기하시면 금방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대기 번호 223번.
창구에 쓰인 번호판은 198번.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한다.
“…….”
증권사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부자. 참 어색해 보였다.
한집에 살고, 피로 이어진 사이지만. 이렇게 나란히 앉았던 적은 거의 없었다.
덕군은 눈에 띄게 불편해했고, 김 부장 역시 어색해했다.
“흠. 아빠.”
“얘기해.”
“돈 어떻게 모은 건지 물어봐도 돼?”
“…….”
“일주일 사이에 2,000만 원이 2억 원이 됐는데. 궁금하잖아.”
“…….”
김 부장은 얘기를 해 줄까 말까 하다가.
‘어차피 못 알아들을 텐데 뭐.’
“전세자금대출 받았다.”
“으잉?!”
덕군은 김 부장의 말이 황당했다.
“전세자금대출? 이사 온 지가 언젠데 그걸 왜 지금 받어? 전입신고 이후에는 불가능한 거로 알고 있는데.”
전생에 집은 안 사 봤지만, 전세와 월세는 많이 살아 봐서 잘 알고 있다.
김 부장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너가 전세자금대출을 어떻게 아냐?”
“응? 그냥. 요즘 부동산에 관심 있어서 책 좀 읽었어.”
덕군은 대충 얼버무렸고, 김 부장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내 아들이긴 하지만 이럴 때 보면 정말 신기하다니까.’
“흠. 어쨌든. 네 말도 맞긴 한데. 계약서를 갱신하면 전세자금대출이 가능하다.”
“그럼 이 집 구할 때는 무슨 대출을 받았던 거야?”
“신용대출.”
“왜? 전세자금대출을 안 받고? 그게 이율이 더 좋을 텐데?”
김 부장은 여전히 전문성 있게 대답하는 덕군이 황당했지만, 일단은 대답했다.
“담보대출 같은 걸 안 좋아한다. 이렇게 담보로 뭔가를 건 것은 생애 처음이다.”
덕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하여간 아빠 참 독특해.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야. 담보가 싫어서 이율 높은 신용대출을 받았었다니. 근데 그것도 신용을 담보로 대출받는 건데…….’
정말 이해는 안 갔지만 개인 기호 차이라고. 그냥 그러려니 했다.
“어쨌든 다행이네. 사채 끌어 쓴 건 아니어서.”
“너 사채도 아냐?”
띵동! 223번.
대답할 거리가 궁색했는데, 마침 전광판에 번호가 떴다.
“우리 차례다. 어서 가자.”
덕군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안녕하세요~ 고객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여직원은 김 부장과 덕군을 번갈아 보았다.
‘훈훈한 부자네?’
빼어난 외모에 여직원 입가에 절로 웃음꽃이 피었다.
김 부장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증권 사러 왔습니다.”
“네~ 거래하신 적 있으신가요?”
“아니요, 처음입니다.”
“네에~ 그럼 증권 계좌부터 개설해 드릴게요. 신분증 좀 주시겠어요?”
약관 설명하고, 종이를 넘기며 사인하고, 또 사인하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
“네~ 계좌 개설되셨습니다.”
“되셨습니다? 계좌가 윗사람인가? 말을 이상하게 하시네.”
“아…….”
여직원은 살짝 당황했지만, 계속 말을 이어갔다.
“구매하실 증권이 어떻게 되실까요?”
“증권이 윗사람이에요? 이해가 안 되시나? 그냥 구매할 증권이 뭐냐고 말하면 되지.”
김 부장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자꾸 틱틱대었고.
옆에 있던 덕군이 그를 쿡쿡 찔렀다.
“아빠, 여기 아빠 회사 아니고, 저분 부하 직원 아니야. 적당히 해.”
“끄응…….”
김 부장은 신음 소리와 함께 입을 꾹 다물었고.
덕군은 여직원을 향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누나,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회사만 열심히 다니시는 분이라…… 아빠 말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한 대로 하세요.”
여직원 얼굴이 붉어졌다.
‘미소 뭐야…… 녹는 거 같잖아.’
괜히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이고 손톱을 뜯었다.
김 부장은 못마땅한 듯 보다가, 말했다.
“와이씨엔터테인먼트 증권 매수할 건데요.”
“아! 네네. 몇 주 매수할 예정이신가요?”
“몆 주인지는 모르겠고. 2억 원어치 주세요.”
“아~ 네~ 매수금액 2억 원 말씀이시…… 네?!”
여직원은 놀라서 소리쳤지만.
김 부장과 덕군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
여전히 멍하니 있는 여직원에게 김 부장이 말했다.
“다시 말씀드려요? 아니면 2억 원어치 못 삽니까?”
여직원은 황당해서 입술을 떨었다.
‘아니, 뭐 구멍가게 와서 물건 사는 것도 아니고…….’
“아, 아닙니다. 매수 가능하십니다.”
김 부장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여직원을 향해 말했다.
“그럼, 빨리 처리해 주세요.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