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조금의 기쁨이라도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스태프! 지금 리허설 하면서 말씀드린 조명과 음량 반드시 체크해 주세요. 특히 보조 광선이요!”
덕군은 시계를 힐끔거리면서도 쉬지 않고 계속 말했다.
“출연자들은 오늘은 더 이상 연습하지 마시고, 내일까지 푹 쉬셔야 합니다. 밤에 놀러 다니지 마시고요. 꼭 공연 전날 다치는 사람 있습니다.”
덕군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모두 수고하셨…… 아, 아니지. 예술단장님?”
최종 리허설에서 사회뿐만이 아니라 디렉팅까지 세세하게 개입했다.
덕군은 최종 리허설 마무리 인사까지 하려다가, 번뜩 정신이 든 듯 예술단장 이찬우를 찾았다.
“감독님, 찾으셨습니까?”
이찬우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고.
덕군은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 형, 놀리지 마.”
“하하. 와~ 너 뭐냐?”
“내가 좀 심했나? 하다 보니까 부족한 부분이 보여서 얘기를 한다는 게…….”
덕군은 파김치가 되어 있는 3학년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무대만 오르면 눈 돌아가는 이 버릇…… 어떻게 좀 해야 돼.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니었는데.’
이찬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고맙다. 우리는 아마추어고, 스태프들 또한 방송국 분들과는 아무래도 수준 차이가 있거든.”
“…….”
“확실히 방송 프로라 그런가? 다르네. 보면서 많이 배운다, 야.”
“에이~ 프로는 무슨. 내가 주제넘었어.”
이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덕군에게 이찬우가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이걸로 안 될 거 같아.”
“뭐가?”
“앞으로 네 도움 좀 쭉 받아야겠어. 그냥 예술단에 들어와라.”
예술단은 2학년 가을에 선정하여 3학년부터 학교를 대표하여 공연을 다닌다.
그러니까, 재원예중의 에이스들이 예술단이 되는 것인데.
생각지 못한 제안에 덕군은 가만히 이찬우를 바라보았다. 이제 입학해서 민요 배운 지 겨우 두 달 되었다.
“형, 농담하지 마.”
“진담인데.”
덕군은 순간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생각했다.
‘무대에 서는 건 좋지만 지금 이찬우 의도는 무대에 공연자로 서 달라는 게 아니잖아? 이리저리 불려 다니면서 사회를 보고 싶지는 않아. 지금 보뉘도 비즈니스니까 하는 건데. 그걸로 충분해.’
지금은 이 주제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아, 방송국! 시간 됐다. 형! 나 먼저 갈게.”
“잠깐, 덕군아!”
“내일 늦지 않게 올게~ 수고해~!”
“야~!”
이찬우가 불렀지만, 덕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원예술관을 빠져나갔다.
* * *
난 이찬우가 쫓아올까 봐 걸음을 재촉했다.
아, 큰일 날 뻔했다.
전통음악회 사회자 된 것처럼 얼렁뚱땅 넘어갈 뻔했네.
어느 정도 재원예술관에서 멀어졌을 즈음, 숨을 돌리고, 학교 정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야!”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뒤돌아봤더니.
“여태 기다리고 있었는데, 본 척도 안 하고 가냐?”
서연우였다.
다행이긴 한데, 난 황당해서 바라봤다.
“언제 나 기다린다고 했었어? 내가 기다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어쨌든 내가 기다렸잖아.”
서연우의 자기 주도 화법.
대화에는 인과 관계라는 게 필요한데, 서연우의 말에 개연성이란 없다.
이럴 때 몇 번 짚어 준 적이 있는데, 자기 세계관이 너무 뚜렷해서 받아들이질 않는다. 아니, 못한다.
두 달간 함께 학교생활 하면서 이런 서연우의 성향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 맨날 봐야 하는 사이, 어쩔 수 없는 건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쉽게 말하면 포기.
“아, 그래. 근데 왜?”
“너, 방송국 가야 하잖아.”
“어.”
“연습 늦게 끝날까 봐 데려다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지.”
“니가 왜?”
난 서연우를 보았다.
봄보다는 따뜻한 5월의 오후.
훈훈한 바람이 서연우의 어깨 위 머릿결을 날렸다.
투명한 피부에 홍조가 어렸고, 봄이 얼굴에 핀 것 같았다.
14살의 풋풋한 아름다움이 서연우에게 자리 잡아 있었다.
솔직히 하뉘보다 이쁘다.
“친구니까 그렇겠지, 뭐.”
“뭐?”
“아, 몰라. 어서 와.”
서연우는 앞장서서 걸어갔고, 난 멀뚱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따라갔다.
정문 앞에 기다란 검은색 외제 차가 있는데, 그 옆에서 정장 차림의 아저씨가 서 있었다.
그 남자는 연우를 보고 아는 척했다.
“연우야~ 왔니?”
아무리 봐도 아빠로 보이지는 않았다. 너무 젋다. 그리고 오후 1시에 딸 마중을 오지는 않을 테니까.
“아저씨, 아침에 말씀드렸던 거요. 부탁드려요.”
“그래~”
서연우는 차 문을 열어 준 뒤 말했다.
“가서 방송 잘하고, 내일 봐.”
“뭐야? 나 혼자 가라고?”
“그러면? 난 수업 들어야 하는데?”
“…….”
아, 졸라 불편하다. 그냥 혼자 버스 타고 가는 게 낫지. 남의 집 차를 주인 없이 혼자 타다니.
“얘야~ 어서 타렴.”
아저씨가 운전석에 앉아서 말했다.
기다리게 하기가 뭐해서 결국 난 문을 열고 탔다.
그리고 서연우에게 말했다.
“고마운데, 담부턴 이런 거 하지 마.”
“싫은데? 그리고 고마워할 거 없어. 내가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내가 좋아서? 무슨 뜻이지?
말을 뱉고 나서 서연우도 아차 싶었는지, 곧바로 뒤돌아서는 본관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 * *
오늘은 방송이 좀 일찍 끝났다.
평소에는 7시 생방송 종료 후, 오늘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는 등 피드백 회의를 한다.
근데, 오늘 방송은 너무 스무스하게 진행돼서, 딱히 피드백 거리가 없었다.
마침 내일 학교 행사도 있는데 빨리 잘 끝났다고 생각했다.
어서 집에 가서 쉬려고 짐을 챙기고 있는데…….
“덕군!”
조승헌이 출연자 대기실로 들어왔다.
“네, 피디님.”
“오늘 수고했어. 이젠 뭐 방송이 아니라 노는 거 같아. 하하.”
조승헌은 출연자 대기실엔 잘 안 찾아온다. 괜히 불안했다. 오늘은 퇴근을 빨리했으면 하는데.
“감사합니다. 이게 다 피디님 덕분이죠. 그럼 즐거운 저녁 시간 보내세요!”
난 빨리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고.
“뭐야~ 말 걸자마자 끝인사를 하네? 하하.”
난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괜히 어깨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아 목이야~ 뻐근하네?”
일부러 피곤한 척하며 짐을 챙겼다.
“동희는 잘 지내니?”
“잘 지내고 있겠죠?”
“응? 소식 몰라?”
“몰라요.”
“편지 안 해?”
“에이~ 남자끼리 무슨 편지예요? 징그럽게.”
“전화는?”
“부대 배치받고 한 번 통화했어요.”
조승헌은 신기하다는 듯 날 바라봤다.
“뭐냐? 한 몸처럼 붙어 다니더니?”
그러게 말이다. 나도 뭔가 싶다. 난 정동희가 부대에 가면 전화를 자주 할 줄 알았다.
근데 연락 없다. 내가 부대에 전화할 수도 없고…….
사실 난 정동희에게 약간 삐진 상태였다.
“군대가 적성에 맞나 보죠. 뭐, 무소식이 희소식 아니겠습니까?”
“허허, 하여간 쪼그만 게 말하는 거 하고는.”
난 불안한 눈빛으로 조승헌을 바라보았다.
“더 하실 말씀은?”
“응?”
“끝이죠?”
이런 내 질문에 조승헌은 살짝 당황해하며 말했다.
“어…… 그냥 너 녹화하는 거 보다가 문득 동희 생각나서.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온 거야.”
휴…… 다행이다.
“너 근데 되게 거리 둔다? 내가 뭐 잘못했냐?”
“원래 포식자는 피식자 마음을 알 수 없는 법이죠.”
“뭐? 포식? 피식?”
일 시키는 사람이 일 받는 사람 심정을 어떻게 알겠나?
아무리 편하게 대해 줘도 난 피디들 보면 불편하다.
난 조승헌을 향해, 꾸벅 인사하고 출연자 대기실을 나섰다.
“저 일이 좀 있어서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 * *
“다녀왔습니다~”
“어이쿠, 아들~ 어서 와. 오늘 일찍 왔네?”
어머니가 현관문까지 나와서 반겨 주셨다. 항상 이러신다.
저녁 7시 반.
오늘은 진짜 일찍 온 것이다. 이 시간에 온 적은 거의 없다.
“네~ 이런 날도 있네요.”
“마침 잘 왔다. 막 저녁 식사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손 씻고 와, 어서 밥 먹자.”
“네~”
손 씻고 식탁으로 왔더니.
아빠가 있었다.
“어? 웬일이야?”
“왔냐?”
요즘 아빠는 줄야근이라 나보다 더 늦게 온다. 개포동으로 이사 오면서 바뀐 변화 중에 하나다.
원래 아빠는 칼퇴주의자였는데…… 내 생각엔 대출이자, 교육비 등에 생활이 쪼들리면서 야근수당이라도 챙기려고 그러는 것 같다.
평일 저녁 밥상에서 보는 아빠의 얼굴.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했다.
“어서 들어라.”
“응.”
식탁 앞에 둘러앉은 우리 가족.
월계수동에서는 항상 7시에 온 가족이 모여서 식사를 했었는데.
이제 그건 보기 드문 광경이 되어 버렸다.
밥 한 수저 떠 넣으며, 힐끔 아빠의 얼굴을 보았다.
완전히 찌들어 있다.
지난 1년보다 이사 온 후 3개월 동안에 더 늙은 것 같다.
어머니도 피곤해 보인다. 더 생활비를 아껴야 하고, 식사도 여러 번 차리셔야 하니까.
아빠가 물었다.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는 거냐?”
“응.”
“그래, 잘해야지.”
아빠는 현관문 쪽을 힐끔 보고는 말했다.
“혹시 몸 불편한 곳은 없고? 예를 들어 목이라든지.”
이사 온 곳은 30년이 넘은 오래된 집이다. 외풍이 너무 심해서, 겨울을 나는 동안 내내 현관문이 울었다.
별짓을 다 해도 현관문에 물방울이 맺혀서, 현관문 주변은 곰팡이로 항상 새까맣다.
아빠가 지워 내고, 세제를 발라도 그때뿐이다. 며칠 지나면 다시 새까만 곰팡이 꽃이 핀다.
“응 불편한 데 없어. 난 괜찮아.”
분명 기관지에 안 좋은 환경이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난 잘 때 빼고는 집 안에 잘 있지를 않으니 별다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이래서 집은 살아 봐야 안다니까.”
아빠가 자책하는 투로 말하자,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애비 어릴 적에는 더 심한 집에서도 살았었다~ 괜찮다.”
“…….”
아빠는 대꾸 없이 어두운 표정으로 묵묵히 밥만 먹었다.
그의 어두운 표정을 보면서 생각했다. 역시, 같이 살아 보지 않으면 모른다.
난 전생에 지금의 내 아빠, 김 부장이 이렇게 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대기업 부장이라고 해서, 월급이 좀 많다고 해서 다 잘사는 건 아니다. 사람은 각자 처한 환경이 다르니까.
아빠가 이제 부장이 되었으니 몇 년 더 지나면 집 형편이 나아질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월급에 비해 더 많은 책임과 의무를 지고 살았다.
“아빠, 요즘 힘들어?”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밥 먹어라.”
월계수동에 살 때는 가난해도 부족함이 없었는데, 지금은 가난하고 힘들어 보인다.
내가 성공해 인기 있는 가수가 된다면 나로 인해 모두 잘살게 되겠지만, 그에 대해선 조금의 의심을 않지만.
지금도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난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그건 찬찬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일단 지금은…… 가족들에게 기쁨을 주자.
“내일 말이야.”
무대에 서는 것도 아니고, 사회자이기 때문에 부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학교에서 행사를 하거든? 초, 중학생들과 지역 주민을 위한 국악 음악회인데, 내가 사회를 봐. 공연 첫날이라 서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토요일 공연은 내일 뿐이라서.”
아빠는 밥 먹는 걸 멈췄다.
“뭐? 사회를 본다고?”
표정이 심각해 보였다.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한 건가?
오해하지 않도록 난 재빨리 설명했다.
“3학년들 행사야. 1, 2학년들은 출연 안 하는데, 난 특별히 요청을 받은 거야. 뭐…… 이유는 짐작하지?”
내가 보뉘니까.
그제야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서 구경할래?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는 어때요?”
아빠가 대표로 대답했다.
“당연한 얘기를 하고 있어? 몇 시까지 가면 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