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무대에 서 달라(2)
집 앞으로 나오니, 좁은 빌라촌 골목 사이에 새하얀 외제 차 한 대가 서 있다.
“휴우~”
난 한숨을 쉬고 지켜봤다.
이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도 황나비는 정말 자기 멋대로다.
‘전통음악회’ 연습실에서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내게 집 전화번호를 물어봤지만 난 알려 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아냈는지 다음 날부터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 가족 중 황나비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항상 모든 전화를 내가 받을 수 없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황나비 때문에 핸드폰을 사야 하나 고민이 생길 정도였다.
뒷좌석 창문이 내려가며, 황나비의 해맑은 얼굴이 나타났다.
“뭐 해? 어서 타!”
“아~ 거 오지 말라니까.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5분 거리인데 차를 왜 타?!”
어느 때부터인가 나도 황나비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기 시작했다.
황나비가 나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냥 얼굴이 예쁜 푼수로 보인다.
“자기야, 자꾸 이럴 거야? 우리 엄마 기다리시잖아.”
그때 앞 좌석 창문도 열렸다.
황나비의 엄마가 운전석에서 앉아 있었다.
“아들~ 어서 타, 뒤에 차 오겠다.”
나비 엄마는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날 아들이라고 불렀다.
황나비가 누굴 닮아서 이렇게 잘 들이대는지 나비 엄마를 만났을 때 바로 알아차렸다. 심지어 외모도 비슷하다.
좁은 골목을 외제 차가 꽉 막고 서 있는 게 부담스러웠다.
내가 안 타면 안 움직일 것 같아서, 결국 탔다.
덜컹.
난 조수석에 앉았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황나비가 말했다.
“뭐야? 이건 무슨 매너야? 숙녀를 뒤에 혼자 앉혀 두고?”
어이가 없어서 난 말했다.
“누나야말로 무슨 매너야? 어른이 운전하는데 조수석 비워 두고.”
“칫. 엄마가 괜찮다고 했거든~”
차는 출발했다.
황나비는 당황하여 말했다.
“엄마, 뭐야? 덕군 뒤로 아직 안 왔는데?”
“내 옆에 있잖아. 그럼 된 거지.”
“뭐야? 경쟁자가 또 있었어?!”
도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건지…….
근데 이 모녀에 나도 익숙해져서 이 정도 농담에는 신경도 안 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황나비는 날 남자 친구처럼 대했고.
나비 엄마는 한 명의 열혈팬이었다.
언젠가 나비 엄마와 단둘이 있을 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과한 친절은 이상했다.
“보통 드라마에서 보면 부잣집은 딸내미가 가난한 집 아들 만나는 거 싫어하던데. 아무리 저희가 어리긴 하지만…… 아줌마는 나비 누나가 저한테 이러는 거 안 불편하세요? 아, 물론 나비 누나랑 저는 아무 사이가 아니지만요.”
이 물음에 나비 엄마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었다.
“부자는 왜 부자가 되는지 아니?”
그때 잠깐이지만, 푼수기가 다분한 부잣집 아줌마에게서 고수의 눈빛을 봤다.
“가치 투자를 잘하기 때문이야.”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난 당시에 아무 말도 못 했었다.
잠시 옛 생각을 하는 사이…….
“힝~ 벌써 다 왔어.”
차는 학교 정문 앞에 도착했다.
걸어서 5분 거리이기 때문에 차로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난 차 문을 열며 말했다.
“아줌마~ 데려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냥 엄마라고 하라니깐? 불편하면 어머니라고 불러도 좋고.”
“…….”
난 대꾸하지 않았다. 이 모녀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댄다.
황나비도 내리자, 나비 엄마는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이따가 또 데리러 올게~ 수업 잘 들으렴~”
“조심히 가세요~”
그리고 우리는 정문으로 들어갔다.
“자기야~”
“쫌!”
황나비의 부름에 난 정색하고 말했다.
“누나, 학교에서는 장난치지 마. 보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이제 학교 다닌 지 좀 되어서 첫날 때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난 보뉘다. 학생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구설수에 오르기 쉽다.
“헤~”
황나비는 혀를 쏙 내밀고는 말했다.
“알았어~ 오늘은 최종 리허설이니까 연습실에 올 거지?”
전통음악회는 내일부터 공연을 시작하며, 오늘 최종 리허설을 한다.
난 시작할 때 이찬우에게 예고했던 대로 연습에 참석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래도 최종 리허설은 가 봐야겠지.
“가야지.”
“얏호~”
황나비는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를 질렀다.
* * *
2교시 마친 후, 담임 쌤에게 말했다.
“선생님, 전통음악회 최종 리허설이 있다고 해서요.”
“그래, 알고 있다. 연습 가야 하지? 다른 선생님들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 걱정 말고. 그럼, 수고하거라~”
“네, 감사합니다.”
1학년인 내가 전통음악회에 출연하는 건 학교 전체에 이미 다 소문이 나 있어서, 선생님께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재원예술관. 오전 10시.
50여 명 정도의 학생들 모여서 최종 리허설 준비로 한창이었다.
그 분주하던 학생들이.
―우왓! 덕군이다!
―덕군 왔어~
내가 연습실에 얼굴을 살짝 내밀자마자, 일동 집중했다.
“안녕하세요~”
난 선배들에게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갔고.
선배들은 연습을 멈추고 자연스럽게 내 주변으로 모였다.
“연습들 하세요~ 왜 이래? 정말.”
마지막 ‘왜 이래. 정말.’은 나 혼자 중얼거린 것이다.
선배들은 날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그중에 단연 황나비가 돋보였다.
불과 2시간 전에 함께 등교했는데, 며칠 만에 만난 사람처럼 너무 빨라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덕군~ 어서 와.”
선배들 틈 속에서 이찬우가 나타났다.
“형~”
난 다가가서 이찬우의 손을 맞잡았다. 같은 학교 다니지만, 학년이 다르니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
“이야~ 넌 연습 안 나올 거라더니, 진짜 최종 리허설 때 나타나네?”
“응, 난 뱉은 말은 지켜.”
이찬우는 선배들에게 말했다.
“자! 사회자 왔으니까. 바로 최종 리허설 시작한다. 실제와 똑같이 가는 거야!”
“알겠어!”
선배들은 분주히 리허설 준비에 들어갔고.
이찬우는 날 한편으로 부르며 말했다.
“덕군아, 이리로 와 봐. 순서 설명해 줄게.”
전통음악회 지도교사인 민요 쌤도 있었다.
“덕군 왔구나~”
“안녕하세요~”
이찬우는 민요 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게 설명을 해 주었다.
“자 이게 순서지거든? 일단 갖고 있어.”
제16회 전통음악회
1. 정악 합주, 취타
※ 악기 소개 : 이유정 교사
2. 가야금 제주
3. 무용, 부채춤
4. 해금 제주, 한범수류 해금 산조
5. 관현악, 얼씨구야
6. 관현악, 고래가족(동요 번안)
7. 성악과, 갑돌이와 갑순이
흠…… 민요 쌤이 지도교사라서 악기 소개를 하는 거구나.
순서가 많은 것도 아니고, 딱히 걸릴 만한 부분은 없어 보였다.
“형, 어떤 느낌으로 가야 해?”
“응? 어떤 느낌?”
“그러니까 발랄하게 가야 하는지, 아니면 묵직하게 가야 하는지.”
“아…….”
“큐 시트는?”
이찬우는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네가 뭔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공연 기획은 나도 첨이라.”
“…….”
이찬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공연 퀄리티 올릴 생각만 했지. 순서나 연출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 안 해 봤어. 오늘 최종 리허설 보고, 그냥 네가 알아서 하면 안 되겠니?”
난 곰곰이 생각하고 물었다.
“알았어, 이거 하나만 얘기해 봐. 형은 전통음악회 경험이 있잖아? 분위기가 가볍고 재밌게 가야 해, 아니면 좀 정중하고 묵직하게 가야 하는 거야?”
이찬우는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했다.
“그 중간? 상황에 맞게?”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는 ‘알아서 해 주세요’라는 요구나 마찬가지다.
기획자가 이렇게 애매하게 대답하면 연출하기가 힘들다.
아마추어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알았어, 일단 최종 리허설 진행해 보자. 내가 판단해서 할게.”
“오케이! 아주 든든하다.”
그러니까 소개 멘트부터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다 짜야 하는 것이다.
사회만 봐 달라더니 이게 뭐야.
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최종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정악 합주 자리해 주세요.]
* * *
정악 합주 리허설이 끝난 뒤, 덕군은 마이크를 잡았다.
“지금 주 광선이 너무 세거든요? 정악 합주는 무대에 서는 사람이 많은데, 뒤에는 그림자 져서 명암이 너무 극명하게 드러나요.”
덕군은 무대 위로 직접 올라가서 주 광선으로 그림자 지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특히 이 부분에 보조 광선으로 잡아 주세요. 분위기가 은은하게 드러나고 연주자들 전 인원의 얼굴이 드러나도록요.”
세 번째 공연 무용, 부채춤이 끝난 뒤에도 덕군은 무대 위로 올라왔다.
“무대에 인원이 많이 서면, 보조 광선이 적절히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덕군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니, 정악 합주 때도 말씀드렸는데, 같은 얘기를 또 해야 합니까? 스태프! 집중해 주세요.”
덕군이 나서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별로 관여 안 할 듯하더니, 막상 리허설이 시작하니 덕군의 눈빛이 달라졌고.
그 덕분에 스태프뿐만 아니라 3학년들도 긴장하여 리허설에 임했다.
리허설이 끝난 뒤.
“휴우~”
덕군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
“출연자! 스태프! 잘 들으세요!”
덕군은 선배라고 하지 않고, 출연자라고 말했다.
“최종 리허설이 장난입니까? 지금 몸 사리는 분들 몇몇 계시는데, 안 보일 것 같아도 다 보입니다. 최종이란 말 모르십니까? 마지막 리허설인데 실제 무대라고 생각하고 해야죠. 본무대에서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리허설 하지 마세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덕군은 한곳을 날카롭게 바라봤다.
“특히 무용이요. 점프 제대로 안 뛰는 사람 보이는데, 특정 짓지 않을게요. 한 명 빼고는 다 대충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황나비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덕군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황나비는 리허설이고 뭐고 덕군이 보고 있으니, 뼈가 부서져라 힘껏 췄다.
“그리고 스태프들! 보조 광선 잘 맞추고, 시작할 때 조명 너무 밝게 하지 말라고요. 그리고 가야금 제주 시에 게인(볼륨) 좀 올리라고 했으면 그 수준을 잘 기억하셔야죠! 해금 제주 때도 똑같이 올려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두 악기 자체의 볼륨이 다른데!”
재원예술관 안은 덕군의 불호령에 얼어붙고 있었다.
“이런 리허설을 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제대로 되어야 최종 리허설이죠. 지금 바로 다시 갑니다. 정악 합주 위치해 주세요.”
덕군의 한마디에 3학년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이찬우가 다가왔다.
“덕군아, 이제 점심시간인데…….”
“형.”
덕군은 이찬우를 매섭게 바라봤다.
“나 약간 실망했어. 전국민노래자랑에서 봤던 준우승자 이찬우는 이런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형 완벽주의 아니었어? 무대 집중한다고 대화도 안 하려 했잖아? 내가 그거 보면서 많이 배웠었는데.”
“…….”
“지금 리허설 상태를 보고 밥이 넘어가? 무대는 장난이 아니잖아. 아무리 무료라도 사람들이 우리 보러 오는 거라고. 무대에 올랐으면 프로처럼 해야지.”
이찬우는 벙찐 표정으로 덕군을 바라봤지만, 덕군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지금 빨리하면 나 방송국 가기 전에 한번 더 할 수 있어. 끝나고 식사하자.”
“넌?”
“난 신경 쓰지 마. 난 지금 밥 먹으면 체할 거 같아.”
“…….”
“내가 서는 무대인데. 이게 말이 돼?”
덕군은 마이크를 잡고 소리쳤다.
“정악 합주! 빨리 위치 잡으세요! 혹시 연습 오늘 처음 하세요? 왜 이렇게 자리 잡는 데 오래 걸려요?! 내일이 본무대인데!”
이찬우는 그런 덕군을 가만히 보다가 피식 웃었다.
“짜식…… 빡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