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첫 출근(3)
터벅. 터벅.
덕군은 무대 중앙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조금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었다.
하뉘는 그런 덕군을 보며 생각했다.
‘신고식인데 이렇게 침착하면 재미없는데.’
골려 주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덕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주 능숙했다.
덕군은 카메라를 응시하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말했다.
“친구들~ 한번 놀아 볼까요?”
덕군의 목소리 톤이 바뀌었다.
깜찍하고 과즙미 터지던 보뉘의 높은 목소리는 사라졌다.
청아하면서도 말끝에 쇳소리가 살짝 나는, 탁하면서도 톡 쏘는 목소리.
“제가 좋아하는 장르가 있는데, 이렇게 멍석 깔아 준 거~ 그거 한번 불러 보려고요~”
짝! 짝!
덕군은 박수를 몇 번 치고서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스태프가 유선 마이크를 따로 건네주었고.
덕군은 자연스럽게 줄을 두 번 돌려서 왼손에 잡았다.
‘무슨 곡을 할까? 음…… 주 시청자는 초등학생이니까 맞춰서 가자. 가볍고 신나는 거로.’
“보뉘!”
그때 스태프가 핑크 반짝이 재킷을 덕군에게 건네었다.
“아하~ 이제 준비가 됐군요?”
덕군은 빠르게 재킷을 입고 소리쳤다.
“즈아~ 분위기 살리고! 허니허니 가겠습니다!”
스태프들은 당황하여 수군댔다.
―허니허니가 뭐야?
―나도 몰라! 빨리 검색해 봐, 생방송이잖아!
예상했던 반응이다. 덕군은 스태프들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바로 행사 멘트를 시작했다.
“오늘~ 첫 출근. 많은 생각을 하면서 왔습니다. 우리 친구들과 어떤 시간을 보낼지, 그리고 어떤 추억을 만들어 갈지, 아주 매우 여러 가지 행복하면서도 기분 좋은 생각을 하면서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는데요?”
하뉘는 덕군이 이상해 보였다.
‘갑자기 분위기 뭐야? 가요 7080도 아니고. 일부러 저러는 건가? 컨셉인가?’
“하뉘도 좋고, 스태프도~ 좋고. 우리 하트맨~ 앞으로 잘 부탁해요? 후훗, 친구들에게 앞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릴 걸 약속드리면서어~!”
덕군이 지방 무대에 설 적에 시간을 때워야 할 때 자주 사용했던 행사 멘트를 변형한 멘트였다.
특이점이 있다면 미사여구를 중첩되어 사용하는 건데, 주요 단어만 몇 개 바꾸면 어디서든 써먹을 수 있다.
‘오늘~ 경북 영주에. 많은 생각을 하면서 왔습니다. 우리 어머님들과 어떤 시간을 보낼지, 그리고 어떤 추억을 만들어 갈지, 아주 매우 여러 가지 행복하면서도 기분 좋은 생각을 하면서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는데요!’
몇 년 전에 뛰었던 ‘영주 풍기 인삼 축제’에서 했던 멘트에서 두 곳만 바꾼 것이다.
‘경북 영주’를 ‘첫 출근’.
‘어머님들’을 ‘친구들’로.
이런 식으로 멘트를 이어 나가는데, 스태프가 덕군을 향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이제 MR이 준비가 된 것이다.
“오케이~ 감솨. 감솨. 감솨.”
흠!
덕군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살짝 헛기침을 했다.
‘지금 변성기니까 무리하지 말자.’
‘허니허니’는 여성 가수의 노래지만, 덕군은 원키로 불렀었다.
“선생님~ 남자 키로 변경 부탁드립니다. E 키면 될 거 같아요.”
스태프는 오케이 사인을 보낸 후, 바로 반주가 나왔다.
“허니허니~ 갑시다!”
* * *
밤바바바 바밤! 밤바바바밤 바밤!
밤 바바바바 바바바밤!
찰싹~ 찰싹~
덕군의 엉덩이가 돌리고 튕기고. 돌리고 튕기고.
에어로빅 아줌마들보다 더 잘 돌아갔다.
밤바바바바~ 바! 바바바박!
전주가 끝남과 동시에 덕군은 흔드는 걸 멈추고 마이크를 세차게 잡으며 카메라 앵글을 바라봤다.
허니 허니 허니 나를 사랑허니 정말 나를 사랑허니
왔니 왔니 왔니 내게 다가왔니 정말 내게 온 거니
빠른 노래에 살랑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단 두 마디에 스튜디오는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둘이 그냥 이대로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다가 아아~~~~!
마지막 ‘아~!’ 부분.
그 하나로 사랑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듣는 사람은 다 알 수 있었다.
덕군은 정말…… 뜨겁게 불렀다.
온몸과 목소리, 표정으로 노래를 표현해 내는 능력.
역시 덕군다웠다.
‘앗싸~ 우리 덕군 잘한다!’
보호자 자격으로 연출진 뒤에 서 있던 정동희가 그런 덕군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동이 터 올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 주면 돼~
‘허니허니’는 2009년에 나온 노래인데, 빠르고 댄스곡 같은 느낌이다.
가사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뭔가 사연 있는 여성분이 짧고 뜨겁게 사랑하고 아침에 헤어짐을 추구’하는 건데.
통상 ‘원나잇’, 교양 있는 우리 말로는 ‘하룻밤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원곡 가사는 교육 방송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덕군은 순간적으로 센스를 발휘하여, 원곡 가사 ‘그리고 미련 없이 우리 그냥 헤어져’를 바꿔서 불렀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옆에 있어 줘~우워우워~~!
그리고 손가락 하트와 함께 입술을 살짝 내밀며 윙크를 날렸다.
‘어머…….’
두근. 두근.
하뉘가 얼굴이 빨개졌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생각했다.
‘안 돼, 안 돼, 저런 꼬맹이한테!’
말은 그러면서도 덕군의 무대에 홀딱 빠져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알지 알지 알지 이제 내 맘 알지 후회 없는 사랑 원해
오기 오기 오기 내게 오기 전에 먼저 내 맘 이해해 줘
밤바바바밤 바밤!
밤바바바밤 바밤!
마지막 전주 부분. 덕군은 보뉘하뉘를 준비하며 선보여 왔던 필살기 247댄스로 무대를 장악했다.
노래가 끝나 갈 무렵, 다른 출연자들과 스태프 모두는 그저 넋을 잃고 덕군의 무대를 지켜볼 뿐이었다.
오디션 중에 1차 자기소개 영상에서 노래를 부르긴 했었지만, 아주 짧았었다.
전국민노래자랑 최연소 우승자이며, 무대 실력이 출중하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직관과 방송은 달랐다. 직접 두 눈으로 보니 눈이 까뒤집힐 정도였다.
당신 내 맘 이해해 줘~~~!
밤바바바밤 바바밤!
헉. 헉.
분홍색 반짝이 재킷을 입은 덕군.
한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높이 뻗었다.
그 자세로 무대를 마쳤다.
덕군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아, 속이 다 후련하네!’
생방송임에도 불구하고 세트장에는 정적이 흐르다가.
휘이익~!
높은 휘파람 소리와 함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우와아아~!
―보뉘! 보뉘!
―덕군! 덕군!
* * *
“어머나…….”
덕군의 담임 선생님은 집에서 ‘보뉘하뉘’를 시청 중이었다.
평소 보뉘하뉘를 시청하지 않았지만 제자가 오늘 첫 방이라고 해서 본 거였는데.
‘허니허니’는 선생님도 아는 노래였다.
“어떻게 저 노래를 저기서 부를 생각을…….”
분명 무대는 더할 나위 없이 멋졌지만, 야릇한 가사와 골반 돌림이 한 사람의 교사로서는 좀 불편하게 느껴졌다.
“엄마, 뭔데 그래?”
고등학생 딸이 다가와서 물었다.
“아~ 보뉘가 엄마 반 제자거든.”
“우와~ 진짜?”
딸은 TV 속 덕군을 뚫어져라 보다가.
“엄마 반 학생이면 초등학생이라는 거잖아.”
“그치.”
“초등학생이 보뉘가 되기도 하는구나? 아, 그러면 방금 노랫소리는 쟤가 부른 거였어?”
반짝이 재킷을 입고 하뉘와 대화 중인 보뉘를 보았다.
“응. 근데 초등학생이 이런 노래 불러도 되니?”
“에이~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 봐. 뭐 어때? 저보다 심한 노래가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은유적 표현이잖아~”
“그래? 엄마 제자라서 더 예민하게 들리는 건가? 호호.”
“응. 맞아. 그럴 거야.”
딸은 덕군을 뚫어져라 보다가, 피식 웃었다.
“초딩들 난리 나겠네. 이쁘게 생긴데다가 노래도 잘하고. 그리고 되게 똘똘해 보이네.”
“응, 공부도 잘해.”
딸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쉽네~ 내가 3살만 어렸어도 남자 친구 삼는 건데.”
“…….”
선생님은 아무리 자기 딸이라도 이 말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 * *
“와~ 보뉘~ 정말 깜짝 놀랐어요!”
“하하. 고마워요~”
하아…… 아직도 숨이 찬다.
신고식으로 내가 원하는 무대를 준비해 줄 줄은 몰랐다.
하뉘가 이 신고식을 주도한 것 같은데…… 선의로 보이진 않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고맙다.
보뉘 역할은 내게 비즈니스다.
오디션도, 지금 MC석에 서 있는 것도.
하지만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건 내게 노는 것.
정말 후련하게 제대로 몸을 풀었다.
역시 노래는 사람들 앞에서 불러야 제맛이다.
“아잉~ 이럴 줄 알았으면 딴 걸 시킬걸~ 보뉘가 전국민노래자랑 최우수상 출신인 걸 깜빡했지 뭐예요~”
“하하, 제가 당황하지 않아서 속상하신가 봐요?”
뼈 있는 농담을 던졌고, 하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난 이어서 말했다.
“하긴~ 서프라이즈니까 제가 당황했으면 더 재밌었겠죠? 그래도 친구들~ 무대 재밌었죠? 다음에 또 기회가 있다면 보여 드릴게요~”
어쨌든 지금은 비즈니스니까, 스무스하게 넘어갔다.
두둥~
갑자기 조명이 어두워지고.
세트장 안에 음산한 분위기가 퍼져 가기 시작했다.
[살리도 : 아포칼립스]
“꺅~ 보뉘! 사람이! 사람이!”
보뉘하뉘는 이런 식으로 예고 없이 코너를 훅 들어간다.
하뉘가 소리치며 무대 한편을 가리켰다. 그곳엔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주, 죽은 건가?”
“조, 좀비의 공격을 받은 것 같아!”
난 하뉘를 뒤에 두고 사주경계를 취하며 말했다.
“조심해! 좀비가 아직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몰라!”
좀비는 없는 상황이었다.
괜히 연기하는 것일 뿐.
“보뉘! 저 사람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아?”
쓰러진 남자는 손가락을 살짝 까딱하고 있었다.
“가 보자!”
“안 돼! 만약 병 걸린 사람이라 감염이라도 된다면…….”
“걱정 마, 하뉘. 내가 지켜 줄게. 내 뒤에 붙어서 따라와.”
난 나보다 키가 큰 하뉘를 뒤에 두고,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사, 살려 줘…….”
하트맨이었다.
난 옆에 무릎 끓고 앉아서 물었다.
“무슨 일이죠?”
“떠, 떡을 먹다가, 목에…… 숨을 못…… 케켁! 꼴까닥.”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와 대화가 끝나자마자 하트맨은 고개를 돌리고 정신을 잃었다.
“보뉘, 어떡하지?!”
난 벌떡 일어나서 카메라를 향해 검지를 펼치고 말했다.
“음식이 먹다가 걸린 사람은 뒤에서 배를 안고 위로 쳐 올려야 해! 그걸 하임리히법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음식을 빼낼 수 있어!”
“아니야, 보뉘! 숨을 안 쉬잖아? 인공호흡을 먼저 해야지!”
“음식 먹다 걸린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한다고?”
“숨을 안 쉬잖아! 숨 안 쉬면 인공호흡이지!”
난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흠…… 아무래도 친구들에게 부탁해야겠군! 친구들! 인공호흡이 먼저일까? 하임리히법이 먼저일까?”
하뉘는 손을 꼭 쥐고 카메라를 향해 외쳤다.
“친구들! 신중한 선택 부탁해~!”
그리고 하뉘는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를 했다.
“어떡해! 새로운 친구 하트맨이 오자마자 죽어 가고 있어!”
질 수 없지! 나도 애드리브 한마디 던졌다.
“신장 개업을 했으면 떡을 돌려야지, 왜 본인이 먹어서는…… 쯧쯧.”
풉.
몇몇 아재 스태프가 웃었다.
[4. 3. 2. 1. 투표종료]
마이크 음성과 함께 투표 결과가 나왔다.
<떡 먹다 걸린 친구, 어떻게 해야 할까?>
하임리히법을 한다 : 65%
인공호흡을 한다 : 35%
난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자, 어서 하임리히법을 하자. 하뉘, 하트맨 일으킬 수 있게 도와줘!”
“알았어!”
커컥.
숨 막혀서 정신을 못 차리는 하트맨을 일으킨 후, 난 뒤에서 끌어안고 배를 위로 쳐 올렸다.
켁!
하트맨 입에서 핑크색 동그란 꿀떡이 나왔고.
나는 신나서 소리쳤다.
“와! 나왔어!”
하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살 수 있을까?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거 같은데?!”
[캔 유 필 마이 허트 비트?!]
허트 비비비트. 허트 비비비트
하트맨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살아난 건 알겠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하트맨, 송이수의 신고식은 이건가?
나와 하뉘는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고.
하트맨은 손으로 심장 박동을 표현하며 시동을 걸었다.
하임리히법이 통한 것이다!
완전히 살아났다.
“친구들! 고마워!”
리슨 투 마이 헐 비트! 웨이팅 포유!
하트맨은 좀비 몸짓에 하트 춤이 결합된, 요상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