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부장 아들은 트롯천재-136화 (136/250)

136화. 나의 이름은(2)

“애비야.”

“…….”

할아버지의 시선은 김 부장을 향해 있었다.

“내 말 안 들리니? 예명을 꼭 해야 하는 거냐고.”

김 부장은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쯧쯧.”

할아버지는 혀를 차고는 말씀하셨다.

“애들 가자는 대로 따라가는 게 어른이냐? 때론 싫어하더라도, 혹은 서운해하더라도 옳은 길을 가게끔 하는 게 어른이지.”

“…….”

“난 내 아들을 물렁하게 안 키웠는데. 뭐 하는 건가 싶네?”

처음이었다.

할아버지가 내 앞에서 김 부장을 까는 모습은.

부자 관계이지만, 항상 장남으로서 대우해 주셨다.

둘이 있을 때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앞에서는 아주 조금도 김 부장을 비난하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

항상 자애롭기만 하던 할아버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분위기가 더 얼어붙는 것 같았다.

특히 나와 정동희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런 할아버지의 모습은 본 적이 없어서.

“집안 어른들이 고심해서 지어 준 소중한 이름을 두고, 왜 다른 이름을 써야 하는 거냐? 그게 말이 되냐? 이름이 부끄러우면 대중 앞에 나서지 말라고 해!”

난 눈치를 보다가 끼어들었다.

“할아버지, 그게 아니고요. 말씀드렸잖아요? 이름을 바꾸는 게 아니라…….”

“어허!”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고.

난 찔끔 오줌 쌀 뻔했다.

“어디 어른들 대화하는 데 끼어들어!”

“…….”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인 거구나.

김 부장이 빡센 건 이유가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이렇게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실 줄은.

난 정말 끽소리도 못했다.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할아버지가 김 부장보다 한 수 위라는 걸.

“애비야, 어떻게 할래. 계속 이렇게 애들 장난 두고 볼 것이냐?”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은 무시하고, 오로지 김 부장만 다그치고 있었다.

김 부장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듣기만 하다가.

입술을 깨물고.

전혀 상상도 못 한.

아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13년간 볼 수 없었던…… 전혀 예상외의 전개를 보여 주었다.

“아버지, 제 생각에도 덕후는 예명이 필요합니다.”

“뭐어?!”

김 부장이 할아버지의 의견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 고지식한 김 부장이, 그의 아버지에게…….

“너, 지금 뭐라고 했냐?”

할아버지는 김 부장을 너라고 불렀다. 결혼한 아들을 대하는 존칭도 하지 않는 것이다.

흥분한 할아버지는 충혈된 눈으로 김 부장을 바라봤다.

꿀꺽.

거실을 감도는 정적 속에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김 부장은 고개를 들어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우리 덕후가 불특정 다수의 앞에 서야 하는 일을 하게 됐어요. 저는 제 아들이 이름 때문에 괜한 선입견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 * *

할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한 김 부장의 말은 계속됐다.

“저 역시 제 아들이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당당히 쓰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저희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요즘 덕후라는 말이…….”

“덕후가 왜!”

엇, 설마 모르시나?

하긴 어르신이니까 모르실 수도.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덕후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어요. 일본의 오타쿠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인데, 한 가지에만 집중하여 사회생활을 등진 이를 뜻하는 의미로 주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어떨 때 쓰냐면요…….”

2021년에는 ‘덕후’라는 용어가 독특한 취미에 집중한 이들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사용된다.

하지만 지금 2010년. ‘덕후’는 ‘오덕후’라는 용어와 통용되어 좀 부정적이며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김 부장의 설명을 묵묵히 듣고는.

허공을 보고 한숨을 몇 번 쉬었다.

“덕후가 그런 의미라니…… 그리고 왜 하필 일본이야?”

입을 삐죽이며 탄식을 내뱉는데.

김 부장은 그런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다가 살며시 말했다.

“저희가 덕후 이름 지을 때만 해도 그런 거 없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이렇게 된 거죠.”

“하아…….”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할아버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이마에 힘줄이 꿈틀거렸다.

“그래, 애비 말이 맞다.”

“…….”

“하지만 난 내 손주 이름을 그런 뜻으로 지은 게 아니야. 지금 안 좋은 의미가 겹치는 건 우연의 일치일 뿐이지.”

할아버지는 날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고 말씀하셨다.

“남자는 소신이야! 소신 있게 가자!”

“네?”

“덕후로 가! 남들이 뭐라 하든 무슨 상관이냐? 우리가 아니면 됐지!”

와…… 할 말을 잃었다.

진짜 꼰대다.

나도 모르게 김 부장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적 어떤 가정에서 자라 왔을지 조금은 상상되었다. 약간 불쌍하게 느껴졌다.

* * *

“할아버지! 싫어요! 제 이름이에요!”

난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영영 덕후로 살게 될 것 같았다.

“어허~”

“안 돼, 안 돼.”

여차하면 울 준비를 했다.

울 듯 말 듯 입을 씰룩거리자, 할아버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아이고……. 덕후야, 왜 그러냐.”

“싫다고요~ 이름을 바꾼다는 것도 아니고, 예명 하나 짓는 것도 안 되는 거예요?”

난 눈치를 보며 슬슬 시동을 걸었다.

신사적으로 갈 타이밍이 아니다. 지랄을 떨어서라도 예명은 반드시 짓고 말 테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침착하게 타일렀다.

“덕후야, 떼써서 될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단다.”

진짜 안 통한다. 콘크리트 벽과 대화하는 기분이다. 확실히 김 부장보다 한 수 위다. 아니, 두 수 위.

“할아버지! 진짜 왜 그래요!”

“지금은 날 원망하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고마워할 것이다.”

와…… 뒷목 잡고 쓰러질 것 같다.

아니, 이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야? 왜 조금도 들어 볼 생각을 안 하지?

답정너.

할아버지에게는 딱 답이 정해져 있었다. 귀에 쇠못을 박으신 것 같았다.

“…….”

김 부장은 착잡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고.

다른 이들도 할아버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혈압이 치솟아서 게거품이 가득해질 때쯤.

“저…… 어르신?”

신바람이 나섰다.

“응? 왜 외부인이 집안…… 아, 덕후의 선생님도 계셨군요.”

신바람은 넉살 좋게 씩 웃었다.

“예, 어르신. 오랜만에 다시 인사드립니다. 제가 덕후의 음악 선생님으로서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진중한 신바람의 태도에 할아버지는 신바람을 향해 정자세로 앉았다.

“네, 말씀하시지요.”

신바람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시작했다.

“제가 가수 생활을 20년을 넘게 했습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드리는 말씀인데, 가수에게 이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

“유명 가수가 되면 어떤 이름을 써도 상관없겠지요. 하지만 신인 가수는 방송 관계자와 대중의 눈에 띄기는 어렵습니다. 마케팅이 될 만한 모든 걸 고려해야 하는데, 그중에서 이름은 큰 몫을 차지합니다.”

“그렇소?”

“네, 저도 제 이름 덕을 많이 봤습니다. 지방 행사 등 무대가 생겼을 때, 신나는 노래가 필요할 때면 관계자들이 ‘신바람’을 떠올리거든요. 생각해 보십시오, 신바람이란 이름을 들으면 신나는 노래가 바로 연상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할아버지가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신바람은 틈을 주지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 덕후에게는 예명이 필요한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지금 이름은 플러스는커녕 마이너스가 되는 이름이거든요.”

꿈틀.

할아버지의 미간이 움직이자.

“아, 물론 이건 무대에 섰을 경우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와 상관없이 이름 뜻만 보면 너무 좋죠. 참 잘 지은 이름입니다.”

“…….”

“그러니까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무대에 설 때 불리는 ‘별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별거 아니에요.”

“아니던데요? TV에서 보면 가족들도 예명으로 부르던데요? 그냥 이름처럼 굳어지는 것 같던데.”

뭔가 술술 넘어갈 듯했는데.

역시 할아버지는 만만치 않았다.

신바람은 살짝 당황했다가, 곧바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말했다.

“음…… 그건 방송이라서 그렇습니다. 일상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정 마음에 걸리시면 이렇게 하면 어떠십니까?”

“어떻게요?”

“덕후라는 이름을 계승하는 예명을 짓는 겁니다.”

“덕후를 계승한다?”

할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신바람은 생글거리면서 말했다.

“네, 예명을 보면 덕후가 연상될 수 있게요.”

“흠…….”

오, 할아버지가 생각한다.

무조건 받아치기만 하시던 분이?

8살 트롯 여행 때도 노인정에서 느낀 거지만 신바람은 어르신들과 참 얘기가 잘 통한다.

신바람이 불러일으킨 변화.

“좋소,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

꿀꺽.

난 침을 삼키고 신바람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봤을 때는 지금까지 말한 건 임기응변이다. 생각해 둔 예명은 없을 거고, 지금 고민하는 것 같았다.

어려운 대화는 흐름을 잘 타야 한다. 다 계획이 있었다는 듯이 머뭇거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바로 보여 주어야 한다.

“……!”

신바람의 동공이 멈췄다.

그리고 펜을 들어 탁자 위에 놓인 종이 위에 크게 썼다.

[君]

“군?”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자.

신바람은 웃으며 말했다.

“네, 군입니다. 은덕 덕에 임금 군 자를 써서요. 덕군.”

‘덕군’

덕군? 덕군?!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지, 이 확정된 거 같은 분위기는……?

할아버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살짝 미소 지으셨고.

신바람은 그의 표정을 살피고는 날 불렀다.

“덕후야.”

“네?”

“넌 오늘부터 덕군이다.”

* * *

“푸하핫!”

그날 밤.

정진은 거실 이부자리 위에 누워, 한참을 낄낄대었다.

“덕군, 덕군. 야~ 기가 막히다, 진짜.”

“…….”

“덕은 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인가 봐~ 그치, 덕군아?”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덕후 아니면 덕군이었다.

그래도 ‘덕후’보다는 나은 것 같아서 가만히 있기는 했지만.

‘덕군’이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형, 많이 이상해?”

“처음엔 좀 어색했는데, 자꾸 부르니 괜찮아. 너, 트롯 가수 할 거잖아.”

“그렇지.”

“그러면 잘 어울려. 이름에서 구수한 느낌 들잖아. 입에도 착 달라붙고.”

정진은 허공을 보며 씩 웃었다.

“하여간 신바람 선생님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허술해 보이시는데, 이럴 때 보면 천재 같아 보이기도 하고. 하하, 하여간 허허실실의 최강자야.”

“…….”

“선생님 아니었으면 예명 못 지었을 거야. 나중에 이 예명으로 잘되면 선물이라도 해 드려.”

“그래야지.”

“덕군아.”

내가 좀 어색해하자, 정진은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형은 이렇게 부를게. 이래야 빨리 익숙해지지. 가족들은 덕후라고 부를 거 아니냐.”

“음…… 아마도 그렇겠지.”

정진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이고~ 좋다~”

그리고 몸을 움직여 내 옆에 찰싹 붙었다.

“얼마 만이냐? 너랑 같이 누워 보는 게.”

“음……. 5년 만?”

정진은 내일 아침에 노원구 행사가 있다고 하여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8살 트롯 여행 때는 한 달 동안 계속 붙어서 잤었는데.

새삼 옛 생각이 났다.

“덕군아, 우리 많이 컸다. 그치?”

“응.”

당시에 10살, 8살짜리 아이들이 앵벌이 하듯 지방 행사 다녔었는데.

정진은 동년배 중에서 예능 최고의 블루칩이 되었고, 난 EBC ‘생방송 톡톡 보뉘하뉘’의 보뉘가 되었다.

“가끔 방울형제가 그립기는 해.”

난 정진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형, 누가 들으면 한 서른 넘은 아저씨들이 옛이야기 하는 줄 알겠다.”

“하하!”

정진은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었다.

“짜식, 비유 하고는. 언젠가 함께 노래 부르고 활동할 날이 또 오겠지?”

“글쎄, 그거야 쉽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되는 거잖아?”

정진은 날 향해 씩 웃고는 이불을 들어 목까지 덮어 주었다.

“어서 자라, 내일 첫 출근이잖아.”

“응, 형.”

내일은 보뉘하뉘의 첫 촬영 날이며, 덕군으로 활동하는 첫날.

중요한 날 전에는 난 긴장되어 잠을 설치기 일쑤였는데.

정진이 있어서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