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연습은 실전처럼(1)
“진짜 사무엘 형?”
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송사무엘은 특유의 밝은 미소를 한껏 내보이며 웃었다.
“하하, 그래~ 형이야. 오랜만에 봤다고 얼굴 잊어먹은 건 아니지?”
와락!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포옹했다.
4년 만이다.
이 형들이 나 6학년 되면 나타나기로 말을 맞춘 건가?
아니면 이태리에 올해 무슨 사태가 터진 건가?
어째 이태리에 있어야 할 형들이 동시에…….
“와~ 형, 어떻게 된 거야? 형 이태리 유학 중 아니었어?”
“유학 중이지~”
어? 그럼 이태리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뭐야? 근데 왜 한국에 있어? 유학 마치고 온 거 아니야?”
“아직 하는 중인데?”
“하는 중?”
송사무엘이 뭔가 얘기하려는데.
“사무엘아.”
정동희가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왜?”
“나중에.”
송사무엘이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는데, 정동희가 눈을 찡긋했다.
둘이 뭐 하는 거야?
송사무엘은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흠! 어쨌든 형은 주요 과정은 마치고, 다음 과정 들어가야 하는데…… 한국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들어온 거야.”
“아~ 그럼 다시 돌아가?”
“응, 돌아가야지.”
혹시 정동희도 송사무엘과 같은 이유는 아니겠지?
아니야…… 그렇다면 큰고모가 이정도로 난리치시진 않았겠지.
“형 언제 온 건데?”
“며칠 안 됐어~ 동희 이 녀석이 오자마자 덕후 너 도울 일 있다고 부르더라.”
“하하, 그래?”
“그래~ 형도 너 보고 싶으니까 바로 오기는 했다만……. 하여간 동희는 지 자신보다 널 더 챙기는 거 같다니깐?”
그 말에 난 피식 웃었다.
“이게 일반적인 사촌 관계냐? 부자사이도 이 정도는 아닐 듯.”
송사무엘의 장난스러운 말에 정동희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송사무엘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근데…… 너희 둘, 잘되어 가고 있는 거야?”
그 물음에 정동희가 대답했다.
“당연히 잘되어 가지.”
“오호~ 그래?”
“그 시작이 ‘보뉘를 찾아라’야. 사무엘아, 네가 잘 도와줘야 해.”
사무엘은 ‘훗’ 하고 웃고서는 말했다.
“알았어, 그건 걱정 말고.”
그리고 송사무엘은 한마디 더 했다.
“빨리 잘되어야 어머님 마음이 풀리실 텐데.”
이 말에 정동희는 한숨을 쉬었다.
* * *
난 내심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근데 왜 송사무엘 형이 면접 과외 선생님이야? 형이 아이돌이었다는 건 기억하는데, 연습생이라고 하지 않았어?’
뜨끔.
송사무엘은 아픈 곳을 찔린 듯한 표정으로.
“덕후야, 아프다. 너무 사실 저격 하지 마라. 데뷔 못 한 건 형한텐 아직도 아픔이야.”
“뭐야? 형이 스스로 그만둔 거라고 하지 않았어?”
“잘 안 풀렸을 때는 원래 그렇게 말하는 거야.”
“아…….”
송사무엘은 이내 샤방샤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형은 예나 지금이나 참 여성스럽다. 표정도, 생긴 것도.
이렇게 긴 단발머리에 방금처럼 화사하게 웃으면, 여자로 오해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형이 연습생일 때, 함께 준비했던 형이 1대 보뉘였거든.”
“1대 보뉘? 진짜?!”
“그래~ 그 형이 좀 귀엽게 생겼는데…….”
송사무엘은 잠시 기억을 떠올리고는 말했다.
“아이돌 할 재목은 아니었거든? 근데 입담이 좋아~ 그래서 진로를 바꿨는데 잘 풀렸지.”
“지금은 뭐 하는데?”
“여러 가지. TV에서도 보이고…… 연예계 소식 전하는 프로그램 있잖아? 거기 리포터로 자주 나오더만.”
아, 왠지 누군지 알 것 같다.
“그 친구가 워낙 입담이 좋고, 순발력이 좋아서 지금보다 더 잘될 거라고 봐. 미래에는 국민 MC 중 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어.”
“에이~ 그건 좀 오바다.”
정동희는 그럴 리 없다고 말하지만.
“혹시 김태준 아니야?
내 말에 송사무엘과 정동희는 깜짝 놀라서 날 바라봤다.
“엇, 알어?”
김태준이 현재는 리포터만 하고 있지만, 훗날에는 더 잘된다. 분명 방송가에서 전문 MC 중 한 사람으로 자리 잡는다.
근데 난 이 사람이 1대 보뉘였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응, 연예계 중계 본 적 있거든.”
정동희가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그거 꽤 늦은 시간에 하지 않냐? 초딩이 밤에 잠도 안 자고 그걸 본다고? 그러다 키 안 커.”
역시, 정동희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안다.
“아빠 친구들 놀러와서 늦게 잔 적 있어~ 그때 한번 봤어.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사무엘 형, 그래서? 김태준이 뭐 어쨌는데?”
난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송사무엘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태준이 형이랑 연락하는 사이거든. 어제 전화해서 이것저것 물어봤지. 그 형이 2004년까지 보뉘였거든? 6년 전이니까 좀 오래되긴 했지만…… 방송 활동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보뉘하뉘 관계자들과 연락을 하고 지내나 봐.”
“아…….”
“그래서 알아봐 달라 그래서 정보 좀 얻었지. 들어 보니까 보뉘하뉘가 말이 교육 방송 프로그램이지, 아이돌 예능물에 가깝더만.”
송사무엘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돌은 형이 전문이고, 학원 경력이 엄청나잖니? 형이 또 입시 전문이었어. 형만 믿고 따라 와.”
송사무엘은 이태리 가기 전까지 영재음악학원 강사를 수 년간 했다.
“형이 합격시켜 줄게.”
* * *
“자, 우선 설명을 해 줄게.”
정동희는 EBC에 가서 들은 면접전형에 대해 얘기를 해 주었다.
“자기소개, 사진 촬영, 코너 진행 미션 이렇게 3가지를 본다고 해.”
난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자기소개를 또 해?”
“원래 이런 거 할 때는 매번 하는 거야.”
“사랑의 빠떼루 또 불러야 하나?”
정동희는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똑같은 거 하면 안 되지. 그리고 이번 자기소개는 아주 짧게 하는 거야. 이어서 말하면.”
난 다시 정동희 얘기에 집중했다.
“자기소개, 사진 촬영은 뻔한데, 코너 진행 미션이라는게 애매하거든. 그래서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까, 얘기를 안 해 주더라고. 그날 와서 확인하면 된다고.”
“아…….”
설명만 들어도 애매한데.
코너 진행 미션?
“후후.”
그때 송사무엘의 거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입시학원이 중요한 거야, 인마.”
“…….”
“정보를 알고 있잖아~ 맨땅에 헤딩 하지 않아도 되잖아~”
일부분 인정한다. 완전 생소한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나을지도.
송사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 이래서 태준이 형이 애드리브가 중요하다고 한 거였군, 흠…….”
정동희는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야, 뜸 들이지마. 나 공식적으로는 지금 편의점 와 있는 거야. 빨리 들어가야 해.”
송사무엘은 피식 웃고는 우리를 향해 물었다.
“너희들. 보뉘하뉘의 풀 네임이 뭐야?”
“…….”
“생방송 톡톡 보뉘하뉘 아니냐, 생방송! 생방송! 생방송! 여기에 동그라미하고 별 다섯 개 붙여.”
‘생방송’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쑤셔 넣으려는 듯, 몇 번을 강조했다.
“제작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애드리브, 즉 즉흥연기라고. 왜냐? 이쁘고 귀엽게 말하는 애들은 많거든. 그럴 만한 나이니까. 하지만 돌발 상황에서도 매끄럽게 이어 나갈 수 있는 능력!”
송사무엘은 검지를 펼쳐서 허공을 수십 번 찍으며 열정적으로 강연했다.
“이건 10대 아이들이 쉽게 갖추기 어렵거든.”
하긴 생방송이니까.
송사무엘의 말이 수긍이 갔다.
정동희도 고개를 끄덕이며 송사무엘의 말을 경청했다.
“긍정적이어야 하고, 쉽게 짜증 내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을 배려할 줄도 알아야 하지. 두뇌 회전도 빨라야 하고. 이런 여러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어야, 돌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지혜롭게 헤쳐 나간단 말이야.”
난 손을 살짝 들고 물었다.
“형, 돌발 상황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뭘까? 뭐 스튜디오에 쥐가 나온다거나, 갑자기 마이크 소리가 안 나온다거나 그런 거?”
그런 돌발 상황은 난 몇 번 경험해 봤다. 지방 무대 경험이 있으니까.
“으음~ 댓츠 노 노.”
학원 선생에 완전히 빙의한 송사무엘.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될 걸 굳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돌발 상황이란 대본대로 흘러가지 않는 걸 말하는 거야.”
“아…….”
무슨 말인지 이해됐다.
“물론 덕후가 방금 말한 것들도 돌발 상황이긴 하지. 근데 그런 일들은 잘 없잖아? 어쩌다 한번 생기는 일에 중점을 두어서 평가를 하진 않겠지.”
“그럼 대본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이 많다는 거네?”
“거의 항상 있대.”
송사무엘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태준이 형이 그러더라, 대본은 참고만 할 뿐, 거의 애드리브로 했었다고. 머리 쥐 나는 줄 알았대.”
“…….”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게 연습으로 될 일인가? 재능의 영역 같은데. 내가…… 애드리브를 잘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당장 투입이 가능한 신예를 원한대.”
“…….”
“대중에게 알려진 아이돌보다는 신선하지만 잘할 수 있는 신예. 참 어려운 말이지만, 그걸 원한다는 거야. 우리 덕후는 신선하잖아? 딱 조건에 부합되는 인재지.”
송사무엘은 날 힐끗 보며 말했다.
“애드리브만 잘하면 될 텐데.”
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왕 하기로 한 거, 일단 최선을 다해 보는 거지.
“형, 어서 연습시켜 줘.”
* * *
송사무엘은 나와 정동희에게 종이를 건넸다.
“자, 이건 대본이야.”
난 송사무엘이 건네준 걸 자세히 살폈다.
“덕후는 보뉘, 동희는 시청자 역할을 하는 건데.”
“아…….”
“시청자가 어떤 말을 할지는 모르는 거잖아? 동희의 대사에 따라서 덕후는 잘 반응해 나가면 돼. 실제 방송에도 유사한 코너가 있어.”
“오케이.”
“두 사람은 일단 대사 숙지를 먼저 하자. 긴 대사는 아니니까.”
정동희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외워서 하라고? 나까지?”
“당연하지! 연습은 실전처럼!”
다행히 우리 형제는 외우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타고난 공부 유전자 덕분에 암기는 쉽다.
“둘 다 준비됐어?”
나와 정동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긴장되네.
“덕후야, 잘 들어. 중요한 건 매끄럽게 연결시키는 거야.”
“…….”
“그게 첫 번째고, 재미 요소가 두 번째. 뭔 말인지 알겠지?”
“응, 알았어.”
“좋아! 그럼 시작해.”
김덕후 목소리를 가늘게, 아주 귀엽게…… 보뉘처럼 말했다.
“안녕하세요! 친구들~ 대신 말해 드릴게요~ 시간입니다. 오늘도 전화 주세요~!”
따르르릉.
“네~ 오늘은 어떤 친구가 전화 줬을지 받아 볼까요? 하나! 둘! 셋!”
김덕후는 왼손으로 전화받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여보세요? 네~ 친구 반가워요. 자기소개 부탁해요!”
정동희는 똥 씹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신화초등학교 정동희입니다.”
“아! 정동희 친구! 보뉘가 뭘 도와드릴까요?”
“아 네, 제가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도저히 못 하겠어서요…… 보뉘 형이 전해 주세요.”
지금부터는 김덕후의 대본에 없는 내용이다.
“네네~ 제가! 아주! 확실하게 전해 드릴게요.”
송사무엘은 김덕후의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짜식, 무뚝뚝해 보이더만 생각보다 잘하는데?’
정동희는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꼭 전해 주셔야 해요.”
“알겠어요~”
“아빠한테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거든요?”
“…….”
김덕후는 쎄한 기분에 입꼬리가 내려가고 있었다.
“아빠, 사랑해요!”
“뭐어? 씨바.”
송사무엘은 손을 들고 외쳤다.
“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