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내가 널 대표한다(2)
“대표?”
의미심장한 말을 들은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하지만 정동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래, 아침마당놀이 때 내가 방울형제 대표한 거 아니었냐? 내가 스케줄 잡고, 연락 취하고, 컨셉 잡고.”
아, 그때 얘기를 한 거구나.
그렇지. 정동희가 우리를 대표해서 이끌었었지.
“난 뭔 소리인가 했네. 형, 나 약간 당황했잖아.”
정동희는 살짝 정색하고는 물었다.
“왜? 내가 대표로서 못 미덥니?”
“아,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라, 형이 갑자기 비즈니스적으로 말하니까 당황했다는 거지.”
“비즈니스? 하여간 초등학생이 말하는 거 하고는, 하하!”
“요즘 애들은 이 정도 단어는 다 써. 그리고 난 초등학생이지만 6학년이라고. 중학생이나 진배없지.”
간혹 흥분하면 내 나이를 잊어먹는다. 이번에도…….
“그런가?”
정동희는 내 말에 갸우뚱했고, 난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형한테 연락이 많이 와서 어떻게 했는데?”
“뭘 어떻게 하니? 생각해 보고 전화한다고 했지.”
정동희는 날 보고 물었다.
“먼저 너랑 상의를 해 봐야 하잖아. 변성기 때문에 목 상태가 좀 우려되기도 하고, 앞으로 네 계획을 모르니까.”
그리고 그는 좀 더 자세히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 그 얘기 하려고 보자고 한 거였구나?”
이해는 되지만, 약간 실망스러웠다.
난 또 노래자랑 얘기를 하려고 보자는 줄 알았다. 정동희와 내 활약에 대해서 수다 떨면서 놀고 싶었는데.
“왜?”
정동희는 내 표정을 살피며 물었고.
“아니~ 난 전국노래자랑 끝나고 형이 바로 전화했길래. 내 무대가 어땠나 하고 얘기할 줄 알았지.”
그는 내 표정을 찬찬히 살피더니,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애는 애네. 야~ 김 가수, 칭찬 듣고 싶냐?”
“…….”
정동희는 킥킥대며 말했다.
밥도 사는데 이 정도 칭찬은 국룰 아닌가?
“아니, 현장에서도 난리였고 최우수상까지 탔으면서 나한테까지도 평가를 받고 싶었어? 게다가 지금 가족들과 함께 시청하고 온 거 아니야?”
역시 잘 알고 있다. 정동희 또한 나와 가족이니까.
그래도 내가 입을 삐죽이자, 그는 내 볼을 꼬집고서는 말했다.
“아이고~ 알겠습니다. 제가 마음이 급해서 순서가 틀렸네요, 김 가수님. 하하!”
나 또한 빙그레 웃었다.
“우리 김덕후 군 활약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요?”
“뭐…… 활약까지는 아니고, TV 본 소감 좀 얘기해 줘 봐~”
정동희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꿈꾸듯 말했다.
“방송이 끝나갈 무렵, 핑크빛 파도가 덮쳐 오더라고? 난 처음에 그게 사람인가 요정인가 했어~ TV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니깐?”
난 생글거리며 그의 말을 들었다.
묘사하는 수준이 아주 딱 내 스타일이다.
* * *
30분 경과.
정동희는 내 무대를 정말 열심히, 그리고 재밌게 묘사해 주었고.
난 중간중간 맞장구를 치며 그의 얘기를 들었다.
아주 신이 났다.
“하하. 형이 마지막에 장미꽃 건네준 건 진짜 신의 한 수였다니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그냥~ 노래 제목이 ‘꽃을 문 남자’이기도 하고, 너랑 잘 어울릴 거 같아서~”
“형, 나 1차 예선 때 모습 보고 그런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형은 너 1차 예선할 때 한국에 없었는걸?”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난 당연히 1차 예선 내용을 알고 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럼 그게 100% 센스였다는 거잖아?
역시 동희 형, 무대 꾸밀 줄 아는구나? 그리고 나와 취향이 착착 맞는다.
“형, 나 지금 약간 소름 돋았어. 대박~ 나 1차 예선 때 꽃 물고 시작했었거든.”
“뭐? 진짜? 완전 대박이네? 하하!”
아~ 기분 좋아졌다.
30분 동안 내 활약에 대해 수다를 떠니, 수유역에서 청담역까지 먼 길 오며 쌓인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내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고는 정동희가 웃으며 얘기했다.
“이제 그만해도 되니? 형 말 많이 하니까 배고파지려 하잖아.”
더 먹고 싶다는 뜻이군.
“형, 뭐 하나 더 시킬래?”
“돈 있냐?”
정동희가 이렇게 뻔뻔했나?
빈말이라도 사양을 하지 않네?
“응, 좀 있어. 하나 더 시켜.”
그간 정동희의 사정을 들었으니, 그러려니 하고 이해했다.
집에서 멀리까지 왔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돈을 좀 많이 들고 왔었다. 무려 2만 원.
“여기 오므라이스 주세요~!”
처음에 치즈라면에 김밥. 그리고 지금 오므라이스까지 계산해도 집에 돌아갈 차비는 충분하다.
“덕후야, 넌 안 먹니?”
내 것까지 시키기에는 차비가 간당간당하다.
“난 됐어, 형 많이 먹어.”
“고맙다, 이 은혜 잊지 않을게.”
꿀꺽.
정동희가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군침이 돌았지만 참았다.
배고프다고 거지가 먹는 걸 뺏어 먹어서는 안 되는 거니까.
우걱. 우걱.
정동희는 한참을 먹다가 지나가듯 말했다.
“덕후야, 어떤 프로그램 제안 왔는지 들어 볼래?”
“…….”
그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전국민노래자랑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활동해 보려고 마음먹었는데.
변성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그래도…… 궁금하긴 하다.
“너의 화제성 때문에 의뢰 온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라서 음악 프로는 없어. 인터뷰 혹은 예능 프로에서 섭외가 많이 왔는데.”
하긴…… 전국민노래자랑 우승자라고 해서 음악뱅크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나마 네가 노래 부를 만한 곳이 ‘아침마당놀이’야.”
“응? 또? 혹시 피디님이 바뀌셨나?”
또 ‘아침마당놀이’에서 연락이 왔다기에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같은 피디님인 거 같더라고. 작가님도 같고.”
“와…… 5년이 지났는데.”
정동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프로그램 자체가 거의 변화가 없잖아. 뭐, 프로그램 성격이 그러니까.”
성진승 피디와 김태섭 작가.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인 내게 참 잘해 줬었다.
정진과 함께 좋은 추억도 만들었고.
“어쨌든 나인 걸 알고 연락했다는 거네?”
“맞아, 제일 적극적이었어. 5년 전에 아침마당놀이에 출연했던 모습과 비교하며 프로그램을 짜 보고 싶나 봐, 성장 느낌으로. 무슨 말인지 알지?”
“…….”
난 잠시 고민했다.
5년 전에 나와 지금의 나.
스스로 많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목 상태가…….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좋은데,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나가는 건 좀 꺼려졌다.
나를 방송에 처음으로 출연시킨 두 분이 섭외 요청을 했다니, 마음이 흔들리기는 하지만…….
“동희 형, 형 생각은 어때?”
“방송 출연 말하는 거야?”
“응.”
정동희는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글쎄…… 네 생각이 중요하지 않을까?”
난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형도 잘 알잖아, 난 완전무결한 최고의 트롯 가수가 되고 싶어 한다는 걸. 지금이 시기라고 생각했는데, 변성기를 생각 못 했었어.”
정동희는 날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럼, 다시 칩거를 한다는 거니?”
“고민 중이긴 한데…… 이렇게 목소리가 안 나오는 상태로 대중들 앞에 서기는 싫어.”
정동희는 생각에 잠겼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정동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이번 전국민노래자랑 말이야.”
“…….”
“노래 부르는 것만 좋았니? 오로지 네 노래 실력이 좋다는 점 때문에만 관중들이 환호했을까?”
정동희의 말투가 진지했다.
“그리고 지난 5년간은 준비 기간이었고. 이번에 전국민노래자랑에 나온 것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는 거잖아? 전국민노래자랑 우승까지 한 마당에 단순히 변성기 때문에 다시 칩거에 들어간다?”
“…….”
“덕후야, 세상 그렇게 쉽지 않더라. 기회 쉽게 오는 거 아니야, 좀 더 크게 생각해 봐.”
전국민노래자자랑, 스태프들, 관중들, 환호…….
3주 전의 꿈같았던 일들을 생각해 봤다.
“형, 그럼 어떡해? 목소리가 안 나오는걸?”
“방송 활동은 하되, 노래는 안 부르면 되지.”
정동희는 그윽한 눈길로 날 바라봤다.
“이제 방송 활동은 이어 가야 해.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말 들어 봤지? 방송 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할 시기야. 정진이 하는 것처럼.”
“…….”
“이것도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돼. 노래를 불러야만 무대에 서는 건 아니니까. 머지않은 미래를 위한 포석이야.”
난 가만히 정동희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기 일처럼 이렇게까지 내 미래를 생각해 주는 게 고마웠다.
그의 말을 곱씹어 보니,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었나 싶다.
“알았어, 노래가 아니더라도 방송 활동을 이어 가자는 말이지? 그럼 뭘 하면 좋을까?”
정동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한번 고민해 보자. 일단, 아침마당놀이에는 미안하다고 할게.”
* * *
“아, 그리고 연습생 같은 건 관심 없니?”
이 말은 정동희가 매우 조심스럽게 했다.
“연습생?”
“응, 기획사에서는 연락 진짜 많이 왔다니까? 대형 기획사에서도 연락 왔어. 트롯이랑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
연습생이라…….
난 트롯 할 건데, 대형 기획사 들어가서 얻을 게 있을까? 그게 나한테 의미가 있나?
그보다는 재원예중에서 학교생활에 집중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아니야, 형. 아직은 어디에 소속될 생각은 없어.”
“…….”
“가수로서 가치가 있다면, 언제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오히려 몸값 올려서 들어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정동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여간 조그만 게 말하는 거 하고는……. 그래도 대형 기획사에 있으면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겠냐?”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거기 말고도 배울 곳은 많아. 괜히 일찍부터 얽매이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배우고 싶어. 아, 내가 형한테 재원예중 입시 노린다고 얘기했었나?”
“재원예중?”
“응.”
재원예중에 왜 들어가려 하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일정 등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해 주었다.
“야~ 형이랑 상의하지. 형 나온 선와예중도 좋은데.”
“아~ 거기?”
그 학교 좋은 거 안다. 다만 등록금이 너무 비싸고, 서양악 위주라 나와 안 맞아서 제쳤다.
“그래~ 거기 커리큘럼이 괜찮거든. 다양하게 배울 수 있고.”
“재원예중도 좋대~”
정동희는 잠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형 친구들 떠올려 보니까, 그랬던 거 같다. 들어가기도 엄청 어렵고.”
난 빙그레 웃었다.
정동희는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대화를 나눈 지 시간이 꽤 지났다.
여기서 월계수동은 멀다.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한다.
정동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자~ 그럼 형은 기획사에는 거절 연락 넣을게. 그리고 너 방송 출연할 곳은 고민해 보고.”
난 그의 말에 씩 웃었다.
그리고 새삼…… 참 고마웠다.
“형, 고맙고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번거롭게.”
“에이~ 아니야.”
“거절 연락 넣을 때 앞으로는 내 일 관련해서 형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해.”
“뭐?”
갑자기 정동희의 표정이 확 굳었다.
난 약간 당혹스러워서 말했다.
“아, 아니. 형 번거롭게 하는 게 미안해서. 형도 할 일이 있는데. 오늘 전화기 불났었다며?”
“……그럼 누구한테 연락하라고 해야 해?”
그러게?
누구한테 하라고 하지? 난 아직 핸드폰도 없고…….
으음, 김 부장밖에 없나?
그런데 김 부장이 통화하면 왠지 일 꼬일 것 같은데.
“우리 집 전화번호 알려 줘~ 아무나 받겠지.”
정동희는 날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형이 널 대신해서 연락받는 게 싫은 건 아니지?”
“에이~ 그럴 리가. 너무 고맙게 생각하는데? 미안해서 그래.”
정동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 형이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좋아서?
“그리고 얼마 안 남았어. 이제 곧 10월이니까.”
“왜? 형 어디 가? 다시 이태리로 가는 거야?”
이 말에 정동희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 줄게.”
“…….”
“형 한국 왔으니까, 다음 주 토요일부터 우리 다시 기타 연습할까? 이제 잘 치니?”
“완전 잘 치지!”
“그럼 피아노 알려 줘야겠네? 피아노는 형이 전공이니까.”
“좋아~!”
이태리에 유학까지 다녀온 서울 음대생에게 1:1 피아노 레슨을 공짜로 배울 수 있는 기회.
이번 생의 나 김덕후는 참 복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2주가 지나서…….
재원예술중학교 예비소집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