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오랜만이야(2)
“하하, 덕후야~!”
우리는 한참을 껴안고 현관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형~ 형~!”
진짜 보고 싶었다.
친누나가 있지만, 정동희를 더 내 친형제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실제로도 형이 없어서 그런가?
“쳇.”
거실을 지나가던 지아 누나가 이런 우리를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어~ 지아야, 잘 지냈니?”
정동희가 아는 척을 하자 누나는 살짝 손을 들며 말했다.
“응, 오빠 왔어?”
“넌 어째 4년 만에 만나는 오빠인데도, 별로 감응이 없어 보이는구나?”
“뭐, 4년 전에는 자주 봤었나. 어차피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사이였는데.”
“…….”
누나는 김 부장 닮아서 말을 아주 직설적으로 한다. 정동희는 할 말을 잃었다.
“오빠, 좀 멋있어졌네?”
누나는 정동희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고, 그제야 정동희는 씩 웃었다.
“그래~ 고맙다. 지아도 많이 이뻐졌구나?”
“뭐래? 원래 이뻤거든?”
누나는 새침한 표정으로 도도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정동희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쟤, 화난 거니?”
“누나 요즘 사춘기야.”
“아…… 그래?”
사춘기는 무슨, 원래 저런데.
그래도 지아 누나가 속은 따뜻하니까. 근데 자주 보는 사람 아니라면 그걸 알아차리기 어렵다.
난 정동희를 올려다봤다가.
다시 그의 팔에 볼을 비비며 말했다.
“아우~ 형. 너무 좋아~ 왜 이제 온 거야?”
“하하, 그래~ 덕후야. 나도 너 보고 싶어서 혼났다.”
올해 29살이 된 정동희.
내가 2학년이던 2006년에 그는 이태리로 떠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정동희의 25살 때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때는 약간 소년의 풋풋함이 느껴졌다면, 지금의 정동희는…… 진짜 청년.
겉모습도 많이 변했다.
특이할 것 없는 외모와 마른 체형, 그저 학교만 열심히 다니던 범생이 정동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말총머리에 피부는 구릿빛으로 바뀌었고, 몸도 두꺼워졌다.
이목구비야 당연히 같지만 체격과 표정이 달라지니 생김새도 달라져 보이는 착시현상이 있었다.
“형…… 왜 이렇게 멋있어졌어?”
나도 모르게 정동희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고.
그는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근데 너, 내일 중요한 일 있다며?”
“엇, 어떻게 알았어?”
“소식 듣고 급하게 왔지. 우리 엄마는 내가 한국에 도착한 거 아직 몰라.”
“헐~!”
난 황당해서 정동희를 바라봤다.
“큰 고모한테 안 알리고 한국에 온 거야?”
“응? 으응.”
정동희는 어색한 미소로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왜? 무슨 일 있어?”
“…….”
정동희는 잠시 생각하더니.
전혀 아닐 것 같은…… 뻔한 거짓말을 했다.
“서프라이즈 하려고.”
* * *
“아…….”
말도 안 되는 드립에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서프라이즈 하려고 이태리에서 말도 없이 한국에 왔다고?
두 번 서프라이즈 했다가는 큰 고모가 자빠지실 것 같다.
형이 이태리에서 맷집을 많이 키웠나? 큰 고모 많이 무섭던데…….
“큰 고모한테는 비밀이다? 서프라이즈니깐.”
정동희는 윙크를 하며 말했고.
난 남의 집 일에 간섭하고 싶지는 않다.
“응…… 모른 척할게.”
부엌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언제까지 현관에서 그러고 있을 거니?”
정동희는 정신이 번뜩 든 듯 큰소리로 웃으며 인사했다.
“하하, 시차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네요. 숙모~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어요. 잘 지내셨어요?”
“그래~ 어서 와라, 동희는 더 멋있어졌구나?”
“하핫! 감사합니다, 숙모는 나이를 거꾸로 드신 거 같으신데요?”
“호호,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에요~ 아름다우세요.”
그러면서 정동희는 윙크를 했고.
어머니는 이 모습을 멀뚱멀뚱 보다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형, 왜 이래? 혹시 이게 이태리 스타일이야?”
“응? 뭐가?”
“이전에는 하지도 않던 칭찬을 하니까.”
애들 키우고, 대가족 살림하느라 누가 봐도 어머니는 주름이 늘었다.
나이를 거꾸로 먹었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얀마, 여성에게는 무조건 칭찬하는 거야, 무조건 칭찬. 엄마는 여성 아니냐?”
“…….”
“우리나라 남자들은 이태리 유학 한번 갔다 와야 해. 무뚝뚝하기는…….”
정동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고, 마침 그때 김 부장도 들어왔다.
저녁 식사로 온 가족이 모였다.
대화의 주제는 당연히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동희였고.
그 덕분에 ‘전국민노래자랑’ 생각을 좀 덜 할 수 있었다.
부담 갖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오후부터는 조금씩 긴장되었다.
갑작스레 정동희를 만나고, 그와 얘기를 나누면서 긴장감을 덜어 낼 수 있었다.
“큰삼촌.”
“응?”
정동희는 김 부장을 다정히 불렀다.
“저,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돼요?”
“뭐어?”
난 이 말에 기뻐서 눈이 번쩍 떠졌다.
“네가 웬일이냐? 잠은 무조건 집에 서 자야 한다던 놈이. 지 침대 아니면 잠 안 온다고.”
옆에서 막냇삼촌이 웃으며 말했다.
“쟤 어릴 때는 자기 집 변기 아니면 변도 못 봤어.”
“에이~ 삼촌! 밥 먹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하하!”
우리 가족은 다 함께 웃었고.
김 부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엄마한테는 말씀드렸니?”
“네? 아 네, 이제 서른이 다 되어가는데요, 뭐.”
“…….”
정동희는 대답을 좀 이상하게 했다.
김 부장은 잠시 바라봤지만, 더 묻지 않았다.
“내일 덕후가 전국민노래자랑 하는 거 보러 갈 건데 집이 너무 멀잖아요. 삼촌 집에서는 바로 코 앞인데. 덕후야, 형 자고 가면 방해될까?”
난 세차게 도리질을 하고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도움 돼. 형 오고 나서 마음이 편안해졌어.”
“하하, 그래?”
정동희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김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럼 여기서 자도록 해라. 거실에서 자야 하는데 괜찮지?”
“하하, 물론이죠.”
난 재빨리 손을 들고 소리쳤다.
“어머니! 저도 오늘 거실에서 동희 형이랑 잘래요!”
어머니는 흐뭇한 얼굴로 대답하셨다.
“호호, 그러렴.”
* * *
드디어 결전의 날.
오늘 ‘전국민노래자랑’ 본선을 치른다.
여느 때처럼 난 5시에 일어나서 복식호흡과 발성 연습을 했다.
정동희와는 어젯밤 누워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지만, 그도 시차 때문에 피곤해했고.
나도 그 전날 예선심사로 잠을 몇 시간 못 자서 많이 피곤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밤 10시 전에 잠이 들었고.
난 개운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 너무 피곤한 하루를 보내서일까.
잠을 푹 잔 것만으로도 컨디션이 아주 좋게 느껴진다.
느낌 좋다.
평소의 루틴대로 아침을 보내고, 난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본선 경연은 오후 1시부터지만 출연자들은 리허설 때문에 9시까지 가야 한다.
급하게 현관문을 향해 가는데.
정동희가 헐레벌떡 따라 나왔다.
“어? 형 어디 가게?”
“어디 가긴? 나도 리허설 가지.”
“형이 거길 왜 가?”
“얀마, 너랑 시간 보내려고 왔는데. 그리고 형이 같이 가면 뭐라도 도움 되겠지. 안 그러냐?”
문득 5년 전 아침마당놀이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 당시 정동희는 ‘방울형제’의 프로듀서이자 매니저였다.
“형 실력 알지? 그리고 업그레이드됐다구, 이태리 4년 유학파야.”
“하하!”
난 재밌어서 큰 소리로 웃었다. 이태리 4년 유학 경력과 전국민노래자랑은 어울리지는 않는데.
“형, 근데 관계자들이 못 들어오게 할지도 몰라.”
“그건 형이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
아…… 확실히 달라졌다.
젊은 신바람이 된 것 같다. 정동희가 이런 무데뽀 성향은 아니었는데.
뭐, 일단 가 보고 못 들어오게 하면 밖에서 좀 기다렸다가 들어오라고 하면 되겠지.
난 나갈 채비를 끝내고, 현관문에 서서 큰소리로 인사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이른 시간이고, 아직 누워 있던 가족들도 모두 현관 앞으로 나왔다.
―오냐~ 우리 손주 화이팅이다~!
―1시라고 했지? 이따 보자~!
―우리 아들~ 엄마 일찍 갈게~!
김 부장은 현관과 가까운 쪽 거실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는 신문을 살짝 내리고서는 말했다.
“잘해라.”
* * *
광훈대학교 체육관.
“안녕하세요~!”
난 체육관에 들어서며, 이틀 전에 본 낯익은 스태프들을 향해 인사했다.
모두 날 기억하고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특히…….
“어머~ 덕후 왔니?”
30대 중반의 여성분이셨는데.
작가라고 들었다.
“잘 지냈어?”
내 손을 잡더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다정하게 물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이 정도로 친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너무 다정하게 구니까 부담스럽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고맙게.”
“네? 아…… 네. 그냥 조금 빨리 온 건데…….”
정동희가 옆에서 지켜보다가 씩 웃으며 물었다.
“누구야? 팬이야?”
“팬? 아니야~ 팬은 무슨. 작가님이셔.”
“아~ 반갑습니다, 덕후 친척 형이에요.”
훤칠하고 건장한 청년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자, 여작가는 얼굴이 붉어졌다.
“이 집 유전자가 좋은가 봐…….”
“네?”
“아, 아니에요. 혼잣말!”
그리고 이것도 이태리 스타일인지…… 정동희는 갑자기 되도 않는 칭찬을 했다.
“JBS는 작가님들 얼굴 보고 뽑나 봐요? 출연자들 눈부셔서 어떻게 공연해요? 하핫.”
“어머…….”
여작가는 완전 홍당무가 되어 버렸고.
정동희는 그저 사람 좋게 웃고 있을 뿐이다.
난 정동희의 옷깃을 당기며 말했다.
“형,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가자.”
정동희는 여작가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따 또 봐요~ 우리 덕후 잘 부탁해요~”
“아…… 네,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스태프들이 이런 우리를 지켜봤고. 정동희와 리허설을 할 무대로 들어가는데,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곧이어 ‘땅꾼과 뱀돌이’, ‘카우보이 아저씨’, ‘태권하리’, ‘이찬우’ 등 출연자들을 모두 만났고.
리허설은 공연 순서대로 진행했다.
출연자들은 예선 때 부족했던 부분을 집중 연습했는지.
확실히 예선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땅꾼과 뱀돌이’는 박자를 크게 놓치지 않았고, ‘편부모’ 팀 참가 번호 1번 아줌마도 훨씬 좋아졌다.
본선 때 많이 떨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이찬우의 무대도 유심히 봤는데…….
그는 2차 예선의 선곡 ‘신토불이’를 본선 참가곡으로 했다.
예선 때처럼 신나는 분위기로 리허설을 잘 마무리했다. 게다가 별로 떨지도 않았다.
“쟤는 전문 가수니?”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정동희가 물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어릴 적부터 꾸준히 실력을 닦아 온 거 같더라고.”
“하하, 너처럼?”
“나보다 1년 빠른 거 같던데.”
“이야~ 김덕후 같은 놈이 또 있다니, 세상 무섭네…….”
더군다나 나는 2회차다. 이찬우는 아마도 1회차일 거고. 그래서 더 무섭다.
―김덕후 군, 리허설 준비하세요.
정동희는 웃으며 말했다.
“네가 마지막 차례구나? 역시 덕후가 주인공이구만~”
“하하. 형, 갔다 올게.”
“그래~ 화이팅!”
난 무대 위에서 평소처럼 불렀다. 리허설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오매불망 장미’는 이미 숱하게 연습했던 곡이라서 거꾸로 매달려서 불러도 잘 부를 자신 있다.
곡을 부르는 동안 정동희를 보았는데, 그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날 지켜봤다.
곧 노래는 끝이 났고.
짝짝짝.
박수갈채 속에 난 무대에서 내려왔다.
“형, 어땠어?”
정동희에게 다가와 묻자, 그는 바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말해 뭐 해? 역시 덕후답다. 형이 네 팬인 거 알지? 4년 동안 네 라이브 너무 듣고 싶었어!”
“하하!”
나 멋쩍게 웃었다.
근데 그때.
정동희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근데 덕후야.”
“응?”
“너, 목 괜찮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