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1차 예선전(3)
후우― 후우―!
일석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앞에 나와서 줄을 서긴 했지만, 아직 300번 대 참가자들이 꽤 남아 있었고.
일석이 앞에 줄 서 있는 대기자는 15명.
하지만 1차 예선은 빠르게 진행되기에 대기자가 빠지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일석이는 대기자 숫자가 줄어 갈수록 똥줄이 타는 기분이었다.
“하아~ 미치겠다.”
옆에 기덕이와 종권이도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일석이는 무대는 처음이지만, 어쨌든 ‘땅꾼과 뱀돌이’의 리더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뱀돌이들을 챙기려 했다.
“얘들아, 너무 긴장하지 마.”
기덕이가 일석이의 말에 대꾸했다.
“야,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지 마, 더 긴장돼.”
가만히 있던 종권이가 말했다.
“아씨, 사람들이 자꾸 쳐다본다.”
아라비아 복장의 일석이.
은색 알루미늄포일로 덕지덕지 바른 광나는 뱀 옷을 입고 있는 기덕이.
쳐다봐 달라고 이렇게 하고 나온 거긴 하지만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관심을 받으니 좀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줄 서 있는 사람들은 ‘땅꾼과 뱀돌이’를 보며 웃었다.
―꼬맹이들이 준비 열심히 했네.
―정성이 대단하다.
―근데 옷이 좀 불안해 보이는걸? 춤추다가 다 떨어지는 거 아니야?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자, 긴장감이 다시 훅 올라왔다.
후우―!
바로 앞선 사람이 이제 막 무대에 올라가고 있었다.
“흡!”
‘땅꾼과 뱀돌이’. 세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고, 파들파들 떨었다.
‘하아…… 드디어.’
앞사람의 무대를 지켜보며, 일석이는 생각했다.
‘힘내자, 그래도 우리는 세 사람이잖아? 무대에 혼자 올라와야 하는 덕후에 비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때 멀리서, 체육관 전체를 울리는 큰 외침 소리가 들렸는데.
―땅꾼과 뱀돌이, 화이팅―!!
김덕후의 목소리였다.
그는 입 앞에 손을 모으고 크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세 사람이 그를 바라보자, 김덕후는 힘차게 양손을 흔들며 외쳤다.
―얘들아~! 떨지 말고 잘해! 천천히 심호흡하고!
일석이는 김덕후의 외침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얘들아, 우리 다 같이 심호흡 한번 하자.”
“그래.”
일석이에 구령에 맞춰, 세 사람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흐읍~ 휴우~
“참가 번호 322번. 무대로 올라오세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렸고.
일석이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무대 위로 향했다.
* * *
저벅. 저벅.
앞장서서 성큼성큼 올라오는 아라비아 상인.
그 뒤에 뒤뚱거리며 힘겹게 올라오는 뱀들.
은박지로 온통 둘러싸서 뱀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요상했다. 분명 모양은 뱀이지만.
“시작하세요.”
세 사람은 일렬로 섰다.
가운데에 선 일석이는 대열을 점검한 뒤, 크게 구령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일석이는 양손을 쫙 펼치고.
기덕이와 종권이는 일석이의 양옆 뒤에서 당랑권 포즈를 취하며 소리쳤다.
“땅꾼과 뱀돌이! 돌이~ 돌이~ 돌이~!”
세 남자의 우렁찬 목소리로 ‘돌이’가 체육관에 메아리쳤다.
“입니다!”
마치 기획한 것처럼, 메아리가 끝날 때쯤에 ‘입니다’를 붙였다.
체육관 안에 격려의 박수가 쏟아졌다.
―휘이익~!
―패기 좋고~
―학생들 화이팅!
일석이는 잔뜩 얼어붙은 표정으로 부동자세로 서 있었고.
기덕이와 종권이도 마찬가지였다.
“…….”
그러다가 힐끔 눈치를 살폈는데, 담당 피디는 계속 진행하라고 손짓을 보고 말했다.
“아, 네! 저희는 신화초등학교 6학년 이일석, 박기덕, 김종권입니다. 전국민노래자랑이 저희 동네에 온다고 하여, 친구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일석이는 준비한 멘트를 마치 로봇처럼 말했다.
너무 경직되어 있긴 했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다. 패기가 넘쳐 보였기 때문이다.
“저희의 목표는 인기상입니다. 반드시 본선 진출하여, 인기상을 타고 싶습니다!”
‘인기상’이 목표라는 말에 사람들은 왁자지껄 웃었다.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하품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참가자들도 허리를 곧추세우고 강단 위에 집중했다.
“저희가 부를 곡은…….”
“잠깐만요!”
보통은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뒤, 제목 말하고 바로 노래를 시작한다.
근데 웬일인지 최 피디가 마이크를 잡았다.
“팀 컨셉을 설명해 줄래요? 의상이 아주 독특해 보이는데.”
최 피디의 눈이 빛났다.
뭔가 촉이 온 것이다. 그의 목표는 시청률을 올리는 것.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참가자가 필요하다.
‘땅꾼과 뱀돌이’가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인 것이다.
1차 예선에서 최 피디가 질문을 던진 건 ‘땅꾼과 뱀돌이’가 처음이었다.
체육관 안의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석이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혹스러울 뿐이었고.
“아, 네! 저는 뱀을 잡는 땅꾼이고요, 뒤에 두 친구는 뱀입니다.”
“아~ 난 갈치인 줄 알았네. 은색 뱀도 있나요?”
‘갈치’라는 말에 체육관에 웃음이 터졌다.
―크하하! 맞어, 맞어, 나도 갈치인 줄 알았어.
―팀 이름 보고 뱀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갈치에 더 가까워 보이긴 해~
―아~ 피디님 재밌네.
일석이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시뻘개졌다.
“뱀입니다. 그래서 팀명도 땅꾼과 뱀돌이인데…….”
“근데 왜 은색 뱀이에요?”
“저희는 진남 선생님의 ‘똬리’를 부를 겁니다. 노래 가사에 충실하고자 팀 컨셉을 이렇게 잡은 건데요.”
체육관 안의 모든 이들은 일석이의 말에 집중했다.
“사랑의 순수함을 찬란한 은빛으로 표현하는 게 좋겠다고…… 게다가 눈에 띄기도 좋겠다고 해서요.”
최 피디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말하는 거로 봤을 때는 누군가 가이드를 해 줬나 보죠?”
이 말에 일석이는 얼굴이 환해지며 말했다.
“네! 제 친구 김덕후가 해 줬습니다. 선곡만 제가 하고요. 컨셉, 의상, 안무 등 모두 덕후가 했습니다. 제 가장 친한 친구인데, 걔 천재거든요.”
관중들이 웅성거렸다.
―오~ 우정~ 보기 좋다.
―천재라고? 덕후라는 아이 누굴까? 궁금한데?
―근데, 본명일까?
멀리서 김덕후가 일석이를 향해 두 손으로 크게 하트 표시를 보냈고.
일석이는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최 피디는 일석이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김덕후? 왜 이렇게 이름이 낯익지?’
“재주가 좋은 친구인가 보네요. 그 친구도 ‘전국민노래자랑’에 참가했나요?”
“하하, 지금 대기 중입니다. 참가 번호 500번 대예요.”
“그렇군요!”
최 피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걸 다 기획했다는 친구도 왠지 보통이 아닐 거 같은데? 이름도 어딘가 모르게 낯익고. 뭐, 참가자라니 이따가 보면 알겠지.’
“그럼, 이제 시작하세요.”
흐읍~ 휴우~
일석이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뱀돌이와 함께 대형을 점검했다.
“얘들아, 준비됐지?”
앞에 선 일석이의 물음에 뒤에서 대답했다.
“오케이, 박자 넣으면 바로 달린다.”
일석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꿈치로 박자를 밟았다.
‘원, 투. 원 투. 원 투.’
속으로 시동을 건 뒤, 입으로 크게 뱉었다.
“둘~ 셋!”
세 사람은 동시에 마이크를 갖다 댔다.
* * *
밤바바밤~ 바바바바밤~
밤바바밤~ 바바바바밤~
빰빰! 빰빰!
땅꾼과 뱀돌이는 입으로 반주를 넣었다.
어설프지만 정확하게 맞았다.
음정과 박자가 틀리는 부분까지도 똑같아 얼마나 합을 맞춰 연습했는지 느껴졌다.
왼발과 오른발을 왔다 갔다 하며 박자를 맞추다가.
전주가 끝날 무렵 은색 뱀들이 꿀렁이기 시작했다.
미끈한 너는 뱀 같은 여자.
수차례 허물을 벗은 파충류야.
일석이의 노래가 시작됐다.
개판이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예상했던 개판이라 별로 놀라진 않았다.
아픔이 생길 때마다 벗어 버렸지.
넌 내 품에서 다시 태어났어.
이들은 가사에 충실한 춤사위를 보여 주었는데.
‘다시 태어났어’ 부분에서 종권이는 알을 까고 있었다.
분명 가사의 의미는 이게 아닐 텐데…….
너는 더 이상 땅을 기지 마.
비벼 대지 마.
여기 똬리를 틀어.
기덕이와 종권이는 뱀처럼 무대 위를 열심히 기어 다녔다.
내일은 없다는 듯, 2차 예선도 없다는 듯.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서 기어다녔다.
움직이지 마. 자세 잡지 마.
그냥 가만히 있어. 편하게 쉬어.
다 내가 알아서 할게. 우~!
이 부분은 약간은 성인 가요다운 가사인데.
‘우~’에서 일석이는 진남 선생님처럼 격렬하게 허리를 튕겼다.
흥미롭게 구경하던 참가자들은 이 부분에서는 고개를 돌렸다.
일석이로서는 의미도 모르면서 그저 가수를 따라 한 거였다.
싸~ 싸~ 내 안에 똬리를 틀어 봐~
현실일까 아닐까 사실일까 아닐까~ 헷갈리지 마! 우!
다소 곧이 앉아서 똬리 튼 형상을 하고 있던 기덕이와 종권이.
그 사이를 휘저으며 노래를 부르는 일석이.
노래는 의심할 여지 없이 형편없었지만.
하지만 사람들은 이들의 무대를 즐기면서 봤다.
비웃음도 손가락질도 없었다.
여기 똬리를 틀어!
여기 똬리를 틀어 봐~
후렴에서 세 사람의 합은 더 자연스러워졌다.
이제 완전히 물 만난 고기처럼 무대 위에서 뛰어놀았고.
1분이 훌쩍 넘었지만, 심사 위원들은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 똬리를 틀어 봐아~!
1절이 끝났을 무렵에야 심사 위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합격!”
“우와아~!”
멀리서 응원하고 있던 김덕후의 환호성이 가장 먼저 터졌고.
이를 시작으로 체육관이 들썩였다.
―우와아~!
짝짝짝.
얼얼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던 ‘땅꾼과 뱀돌이’
“우와악~!”
“해냈어! 해냈어!”
“대박! 대애박!”
세 아이는 서로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일석이는 심지어 눈물도 찔끔 흘렸다.
―잘했다!
―아~ 잠이 확 깨네!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 낫다!
무대를 지켜본 다른 참가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일석이는 스태프로부터 ‘2차 예선 참가 신청서’를 받은 후, 자리로 올라가려다가.
“얘들아, 잠깐만!”
심사 위원이 이들을 향해 손짓했다.
“네? 저희요?”
일석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심사 위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희들. 잠깐 이리 와 봐.”
세 아이는 심사 위원 앞으로 다가갔다.
아이들은 당연히 이 심사 위원을 모르지만, 꽤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너희들 참 잘하더라.”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심사 위원은 갑자기 조언을 해 주기 시작했다.
“2차 예선에서는 지금처럼 하면 되는데, 목소리를 좀 더 크게 내 봐. 그리고 음정은 좀 불안해도 괜찮은데, 박자는 좀 신경을 써야 해. 박자가 안 맞으면 듣는 사람이 불안하거든.”
“아…… 네.”
그리고 심사 위원은 손과 발로 박자 맞추는 법을 알려 주었다.
“알겠지? 2차 예선까지 시간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연습을 좀 해.”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지금처럼만 하면 돼.”
심사 위원 앞에서 한참 얘기를 듣는 ‘땅꾼과 뱀돌이’.
난 관중석에서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있었다.
―심사 위원에게 조언을 받는 거면…….
―대박, 수상권인가 봐!
―눈에 확 띄긴 했어. 몰입감도 좋고.
카우보이 아저씨도 중얼거렸다.
“애들이 준비 잘했네. 본선 진출은 둘째 치고 잘하면 상 타겠는데?”
“…….”
그리고 날 힐끔 보며 물었다.
“같이 온 친구들이 너무 잘해 버리면 좀 그럴 텐데…… 덕후라고 했지? 너, 괜찮냐?”
내 친구들이 환호를 받고, 좋은 평가를 받으니 난 그냥 너무 좋다.
그리고…….
지금까지 예선을 지켜본 결과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대략 감이 온다.
괜찮냐고?
이 물음에 대한 대답. 난 확신 있게 할 수 있다.
“완전 괜찮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