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현수막(1)
두근. 두근.
심장이 방망이질을 쳤다.
‘전국민노래자랑’
트롯 가수들의 등용문이 되기도 하는 이 엄청난 행사는, 누구에게나 참가 자격이 주어지는 무대가 아니다.
노원구 편이라면 노원구에 거주하는 구민들만 참가할 자격이 주어지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기회가 와야만 참가할 수 있는 그런 행사다.
내가 노래를 시작한 8살 이후로 우리 동네에서 전국민노래자랑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근. 두근.
현수막을 보고 있는데,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어머~ 나도 저기 참가해 볼까?
한 여성분이 라틴 댄스를 추듯 엉덩이를 살짝 실룩이며 말했다.
―호호~ 좋지. 나도 나갈래~ 넌 라틴으로 나가, 난 테크노 할 테니까. 영역 침범하지 마라?
우이천에 함께 조깅 나온 친구 사이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부자간의 대화도 들렸는데, 아이는 4학년쯤 되어 보였다.
“엄마~ 나 저기 나갈래!”
“응?”
“송회 할아버지 만나보고 싶어~!”
“호호, 저기 노래 부르러 나가는 거지, 할아버지 만나러 가는 곳이 아니야.”
“뭐 어때? 테레비 보니까, 할아버지한테 이것저것 가져다주던데? 노래는 그냥 아무거나 하나 부르면 되잖아!”
출연 결심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는데 행복해 보였다.
[JBS 전국민노래자랑 : 노원구 편]
2010. 9. 4(토) 오후 1시~3시30분
광운대학교 운동장
― 사회 : 송회 ―
초대 가수
정성, 양상두, 박구성, 정진. 홍지영
1) 예심
일시 : 2010. 9. 2(목) 13:00~
장소 : 광운대학교 체육관
2) 참가 신청 접수
기간 : 2010. 8. 19(목) ~ 8. 25(수)
자격 : 노원구 구민 / 노원구 소재 직장인 학생 등
접수 : 노원구 문화체육관 또는 관내 동주민센터
문의 : 02―21xxx
“나도 나갈래.”
난 말이 들리는 곳으로 물끄러미 고개를 돌렸다. 일석이였다.
“네가?”
“응, 나도 전국민노래자랑 나갈래.”
내가 알기로는 일석이는 확실한 음치다.
“하하, 그래.”
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국민노래자랑은 꼭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만 나갈 수 있는 무대가 아니다.
즐기러 나온 사람들. 관객들과 함께 놀 수 있는 축제의 장.
그게 수십 년을 이어져 온 ‘전국민노래자랑’이다.
“덕후야, 우리 듀엣 할래?”
“뭐?”
일석이는 해 맑은 표정으로 날 보며 물었다.
“어때? 재밌겠지? 우리 듀엣으로 나가 보자.”
흠…….
“사양할게.”
* * *
“야아~ 왜에~ 같이 나가자~!”
우이천을 걷는 내내 졸랐다.
“아우~ 싫어! 혼자 나가!”
“어우야아~ 혼자 나가기 부끄럽단 말이야.”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석이를 바라봤다.
“뭐? 네가 부끄러운 것도 아냐?”
일석이는 뻔뻔함의 최강자다.
1학년 때는 좀 어리바리하더니, 아주 뻔뻔한 남자로 성장했다.
“관객이 많잖아~ 난 무대에도 안 서 봤고. 넌 그래도 경험이 있잖아?”
경험…….
그래, 난 경험이 있지.
왕년에…… 1학년 때는 정말 날아다녔었지.
“그럼 너 혼자 나가려고?”
“…….”
일석이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나가야 한다. 나가고 싶다.
내 마음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쉽게 결심이 서지 않았다.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안 나가?”
일석이는 날 이상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근데, 표정이 왜 그러냐?”
내 자신과 약속을 했었다. 초등학교 때는 방송에 출연하지 않기로.
김 부장이 정해 준 것이긴 했지만,
내가 원하지만 어린 마음에 쉽게 결정하지 못하던 걸 김 부장이 대신 입 밖으로 내줬을 뿐이었다.
기다림과 참음은 성공하는 사람의 가장 큰 덕목이다.
이제 몇 개월만 더 있으면 중학생이 된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방송 출연 안 하겠다는 다짐 때문에 그래?”
“그냥 뭐…….”
일석이는 내 베스트 프랜드이며, 나에 대한 건 2회차 인생인 것만 제외하고 모든 걸 알고 있다.
왜 나는 방송 활동을 안 하냐고 물어봐서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덕후야~ 쓸데없는 고집 부리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이건 진짜 종류가 완전 다른 건데?”
“…….”
“방송 출연 목적이 아니잖아. 그냥 전국민노래자랑에 참가하는 거잖아?”
엇?
그렇네?
일석이는 덧붙여 말했다.
“너, 만약 중학생 되고 전국민노래자랑이 방송에 안 나오면 참가 안 할 거야?”
“아니지.”
“거봐~!”
이 녀석, 천잰데……?
“하여간 김덕후. 공부만 잘하지, 나한텐 안 된다니까? 하하!”
일석이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참가 결정한 거지? 나랑 같이 나가는 거지?”
집요한 녀석.
난 내 머리에 얹은 일석이의 손을 내리며 말했다.
“응~ 손절.”
그리고 곧바로 집으로 뛰어갔다.
미안하지만 내 진짜 짝궁은 따로 있다.
정진에게 빨리 전화해 봐야지.
* * *
집에 들어오자마자, 난 거실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드르륵―
덜컥.
[여보세요?]
“형~ 나야!”
정진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덕후야, 오랜만이다? 왜 요즘 연락 안 했어?]
“무슨 소리야? 형이 전화 안 받아 놓고는.”
[하하! 얀마, 안 받은 게 아니라 못 받은 거지.]
우리는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얘기를 나누었고.
그러다가 정진은 문득 내게 물었다.
[그냥 전화한 거 아니지? 할 말 있으면 어서 먼저 해~ 나 곧 있으면 스케줄 가야 하거든.]
하여간 정진도 눈치가 빠르다.
하긴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이 6년인데.
“형, 나 전국민노래자랑 나가려고 하는데…….”
[뭐어?!]
이 말에 정진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소리쳤다.
[드디어 방송 출연하려는 거야?]
“아…… 뭐 결론은 그렇게 되겠지만, 방송 출연이 아니라 전국민노래자랑에 나가겠다는 건데?”
난 일석이가 해 줬던 말을 그대로 했다.
[야~ 그게 무슨 말장난이야? 그냥 방송 출연 결심한 거지.]
그렇게 말하지 말아 줘…….
“흠, 어쨌든 내 의도는 그게 아닌 거고~ 형도 나갈래?”
정진은 3년 전에 중계동으로 이사 왔다. 그 또한 노원구민이기에 참가 자격이 있다.
[하하, 진짜 대박이다.]
정진은 큰 소리로 한참을 웃었다.
[내가 덕후랑 무대에 설 날만을 기다렸었는데 일이 이렇게 꼬이네?]
“왜 그러는데?”
방송 출연은 쉬기로 결심하면서, 복귀 시에는 방울형제로 나오겠다고 정진과 약속했었다.
[야~ 초대 가수가 어떻게 출연자로 나가냐? 그게 말이 되냐?]
“어? 초대 가수?!”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난 당황했다.
[현수막에 안 써 있어?]
아……?
그러고 보니 현수막에 초대 가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나오든 관심 없어서, 자세히 안 봤었다.
정진이 전국민노래자랑 초대 가수로 나오는구나?
“형, 노래도 해?”
[야, 장난하냐? 가수가 그러면 노래를 안 하냐?]
최근 정진이 TV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예능이나, 리포터, 서포터 등으로 별별 모습으로 나와서 가수를 그만둔 건 줄 알았다.
[나도 이제야 기회를 잡은 거야. 노원구민이라서 불러 준 거 같아. 도통 음악 방송에서는 안 불러 주더니.]
정진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야, 이럴 줄 알았으면 너랑 상의하고 결정할 걸 그랬다. 난 당연히 너 안 나올 줄 알았지.]
“…….”
나도 아쉽다.
5년 만의 복귀고, 방송에도 나올 텐데.
나 혼자 해낼 수 있을까?
일석이랑 나가야 하나?
아니야, 그건 아닌 거 같아.
[덕후야, 혼자라도 나갈 거니?]
“글쎄…….”
좀 고민된다.
나에겐 무대 울렁증이 있었고, 정진과 함께 무대에 오른 이후부터 울렁증은 사라졌었다.
최근에는 무대에도 서지 않아 잊고 살았지만, 그게 극복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덕후야, 모처럼 결심한 거 같은데.]
“…….”
[꼭 나가 봐. 전국민노래자랑 따라서 이사를 가지 않는 한……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잖아. 노원구 편을 또 언제 찍을지 어떻게 아니?]
잘 오지 않는 기회이며, 전국민노래자랑이 가진 영향력.
우승해서 내 커리어에 꼭 넣고 싶다.
[너도 알지? 전국민노래자랑이 트롯 준비생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 기회, 절대 놓치면 안 된다.]
대한민국에 ‘전국민노래자랑’ 모르는 사람 없고, 전국 방방곡곡의 모든 이들이 시청하며 사랑하는 최장수 프로그램 중 하나다.
다시없는 기회.
내가 꼭 잡아야 하는 기회.
솔로로 나가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도전해야 한다.
내 입맛대로만 다가오는 세상이 아니니까.
* * *
그날 저녁.
난 김 부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제 진짜로 부장이 된 김 부장.
내 전생의 상사 직급으로 돌아온 아빠 김진하 부장을 생각하면, 문득 기분이 좀 묘하다.
“다녀왔습니다.”
여느 때처럼 그는 저녁 7시 정각에 들어왔고, 어머니는 나와서 김 부장의 서류 가방을 들어 주었다.
난 괜히 심술을 부렸다.
“어머니, 가방 들어 주지 말라니까요? 아빠가 뭐 손이 없어요? 왜 힘들게…….”
“얘야, 밖에서 고생하고 오셨잖니. 이거 잠깐 들어 주는 것도 인사인 거야.”
김 부장은 어머니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고생은 당신이 많지. 고마워.”
“어서 손 씻고 식사하세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면, 이상하게 배알이 꼬인다.
어머니는 부드럽지만 강하고.
김 부장은 그냥 강하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만은 완전 깨갱.
간혹 나 때문에 어머니가 김 부장에게 핀잔주는 거 말고는 두 분이 큰소리 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전생에 회사 생활할 때 결혼 생활을 후회하는 동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13년간 어머니와 김 부장을 지켜보면서, 염려되는 건 한 가지밖에 없다.
동생 생기는 것.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아빠, 밥 빨리 먹어.”
“왜?”
“할 얘기 있어.”
“네가?”
김 부장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김 부장에게 할 얘기 있다며 운을 띄운 게 과연 몇 년 만인가.
김 부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이거 긴장돼서 밥이 안 넘어가겠는데? 얘기 듣고 식사하면 안 될까?”
난 눈썹을 찡긋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뽀글뽀글.
부엌에서는 찌개 끓는 소리가 들렸고.
어머니는 식사 준비 중이며.
다른 가족들은 모두 방에 있었다.
거실에는 덩그러니 나와 김 부장만 있다.
소파의 내 옆에 앉아 있는 김 부장.
난 그를 보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무대에 서 보려 해.”
통보였다.
5년간 내 자신을 절제했다.
마음먹은 이상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아니, 말리게 두지 않을 것이다.
김 부장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래? 무슨 무대냐?”
“전국민노래자랑.”
“아…….”
그리고 김 부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내게 물었다.
“노원구에서 한다는 그거지?”
“응.”
“언제냐?”
“접수 기간은 내일부터고, 예심은 2주 후야.”
“흠……. 그래.”
꿀꺽.
난 김 부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혹시라도 반대를 한다거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면 골치 아파진다.
물론 이럴 경우에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만반의 준비는 했다.
촉각을 세우고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동안 잘 참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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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부장은 내게 악수를 건네며 말했다.
“잘해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