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시간이 흘렀다
할아버지의 칠순 잔치가 끝나고.
두 달이 지났다.
살아가는 건 여느 때와 같았지만, 방송의 영향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물론 막 방송이 나왔을 때에 비해서는 좀 분위기가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불편한 점이 많았고, 난 조금씩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난 아직 설익었는데, 대중 앞에 나올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일까?’
내가 몸이 8살이지, 정신까지 8살 어린아이가 아니다.
나의 놀라운 음악 재능.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확률적으로 김 부장 집안의 내력 때문인 걸로 추정된다.
하지만 재능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난 겨우 반년 연마했을 뿐이며 이제 8살이다.
이곳저곳에서 날 부르는 러브콜, 대중의 관심.
이 모든 것들을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었다. 대중이 부르는데 나가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도 기만 같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고민은 점점 더해져만 갔다.
버스킹 하다가 운 좋게 방송 출연 기회가 주어졌고, 그저 열심히 준비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던 건데.
방송…… 그 영향력이라는 게 정말 엄청났다.
하지만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오는 파도는 쓰나미일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파도를 탈 준비가 아직 안 됐다.
그러나 정진은 달랐다. 어느 날 우리 집으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덕후야~]
“어~ 형.”
[MBS 진짜 안 나갈 거야? 이번에 제안받은 프로 진짜 괜찮던데.]
정진은 한 번의 실패를 극복해서인지 어딘가 여유가 있었다.
방송 출연에 아주 적극적이었는데, 대중의 관심에 업되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만약 그런 거였다면 내가 말렸을 것이다.
그냥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악착같은 태도랄까.
“응~ 난 안 나갈래.”
[왜?]
“그냥…… 뭐.”
[너, 너무 신중한 거 아니냐? 도대체 몇 개 프로를 퇴짜 놓는 거야?]
“…….”
내가 방송을 출연하려면 김 부장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야 한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안 나가는 게 아니다. 지금은 내가 내키지 않으므로, 시도하고 싶지도 않았다.
“미안해, 형.”
[…….]
정진은 아무 말도 없다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나 혼자 출연해도 될까?]
……음?
[기왕이면 너와 함께 출연하고 싶지만, 난 더 이상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거든. 내가 원한다고 해서 오는 기회가 아니니까.]
“형, 물론이야. 혼자 출연해도 돼.”
나 전혀 서운하게 생각 안 해.
이해타산 문제가 아닌, 서로 가치관이 다른 것일 뿐이다. 도리어 물어봐 줘서 고마웠다.
“형, 근데…… 야외 행사 가는 건 꼭 나랑 같이 가야 해. 알겠지?”
[하하, 그건 괜찮니?]
“응~ 그냥 공중파 방송이 좀 꺼려질 뿐이야.”
[알았어~ 덕후야, 너가 무슨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제든 준비가 끝나면 얘기해 줘.]
“알았어, 형~”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 * *
“덕후야.”
정진과 전화를 끊고, 기타 연습을 하려는데.
어디선가 음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덕후야.”
난 못 들은 척하다가 대꾸했다.
“말해.”
김 부장은 코를 찡긋하고는 말했다.
“아빠가 부르면 대답을 해야지.”
“그냥 말해. 듣고 있어.”
김 부장은 날 슬쩍 보고는 물었다.
“아빠랑 외식할래?”
“뭐어?”
오늘은 토요일.
김 부장이 회사에 안 가는 날.
낮 동안 계속 집 안에 같이 있기 싫어서, 오후에 어디 갈까 생각 중이었는데.
나가서 함께 점심 외식을 하자고?
“…….”
내 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 양반이 왜 이러나 싶어서 난 대답 없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흠!”
김 부장은 내 눈빛을 피하고는 말했다.
“자장면 사 줄게.”
아…….
그렇다면 가야지.
중국집.
후루룩~!
자장면 곱빼기를 시켜서, 난 그릇에 얼굴을 박고 먹기 시작했다.
전생에도 자장면을 잘 먹긴 했지만 이게 이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은 몰랐었다.
애들 입맛에는 정말 천상의 맛.
탕수육, 깐풍기보다도 자장면이 더 맛있다.
“맛있냐?”
“먹고 있는데 말 시키지 마.”
“짜식, 하여간 까칠하기는.”
김 부장은 귀엽다는 듯 날 바라봤다.
그는 이유 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아들딸이 이쁘고 귀여워도 즉흥적인 기분만으로 중국집 데려오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분명 김 부장이 이곳에 날 데려온 건 뭔가 할 말이 있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경계하던 마음은 자장면 한 그릇에 사라졌고.
‘일단 먹고 생각하자.’
이 마음뿐이었다.
자장면 한 그릇을 금세 다 비웠고.
김 부장은 빼갈을 반주 삼아서 짬뽕을 천천히 먹고 있었다.
“근데 우리만 나와서 먹어도 돼? 어머니랑 누나는?”
미안하지만…… 다 먹고 나니 생각났다.
“나중에 두 번 사 주면 되지. 염려 마라, 엄마한테는 얘기해 놓고 나왔으니까.”
“흠…….”
난 휴지로 입가를 훔친 뒤, 새 휴지를 뽑아 물을 살짝 묻혔다.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가 팽팽하게 펼쳐서, 입가에 굳은 짜장 자국을 슥슥 문질렀다.
김 부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조그만 게 아재처럼 뭐 하는 거냐?”
난 닦은 휴지를 내려놓고,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이제 말해 봐, 왜 보자고 한 거야?”
“음원 수익이 200만 원 들어왔더라.”
아, 이제 들어왔구나?
익월 정산이라고 하더니.
“그게 한 달 수익이야?”
“그래, 아직 유통사에만 뿌리는 중인데도 그렇다더라.”
그럼 신바람, 정동희, 정진은 100만 원 정도 받았겠구나. 내가 작사와 노래를 맡아서 그 세 사람보다 정산 몫이 두 배 정도 된다.
김 부장은 약간 인상을 쓰며 말했다.
“솔직히 놀랐다. 생각보다 돈이 꽤 돼서. 조필승 사장 말로는 앞으로 반년 정도는 계속 높은 수익으로 들어올 거라고 하더라. 첫 달 정산액보다 많을 거라고.”
“…….”
“너가 어려서 돈 얘기 하고 싶지는 않다만. 그래도 네 돈이니까 알려는 줘야 할 것 같아서. 아빠는 뭐든 공정한 게 좋거든. 그리고 너, 다 알아듣잖아?”
김 부장은 굳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음원 수익이 얼마가 들어오든, 아빠는 네 돈 절대로 안 쓴다.”
그리고는 내 앞에 통장을 하나 내려놓았다.
“앞으로 네 돈은 다 여기에 넣어 둘 거고, 통장 내역은 매월 말에 정리할 테니까 잘 확인해라.”
“알았어.”
“이 돈은 아빠도 안 쓸 거고, 가족을 위해서도 안 쓸 거야. 오로지 널 위해서만 쓰는 돈이야.”
“…….”
“하지만 너도 마음대로 못 써. 알고 있지?”
그건 예상했던 바다.
지금 내 개인적으로 돈 쓸 일 없고, 관심도 없다.
“네 교육비로만 쓸 거야. 오로지 성장을 위해서만.”
“…….”
“장난감 같은 건 못 사. 그런 건 이전처럼 특별한 날에 말 잘 들으면 엄마 아빠가 사 주는 거야. 지금과 달라지는 거 없어.”
“아, 알겠다고.”
난 짜증스럽게 대답했고.
김 부장은 피식 웃고는 빼갈을 들이켰다.
식사 마치고 대화한 지 10분 지났다.
김 부장과 너무 오래 마주 앉아 있었다.
“이제 용건은 끝이지?”
내 말에 대한 대답 대신, 김 부장은 다른 말을 했다.
“너 통화하는 거 들었다.”
“엿들은 거야?”
“거실에서 집 전화로 통화하는데 안 들리는 게 이상하지 않냐?”
난 아직 핸드폰이 없다.
그래서 목소리 크게 안 내고 통화하려고 신경 썼는데. 젠장.
“안심했다.”
“어?”
뜬금없는 소리에 난 반문했다.
“네가 방송 출연한다고 했을 때, 좀 걱정했었는데…… 신 선생님 말이 맞았어.”
“…….”
“아빠는 네가 하는 고민이 맞다고 생각한다.”
김 부장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하지만 고민은 오래 하지 마라. 선을 그어. 에너지가 분산된다.”
내 머릿속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김 부장이 말했다.
“이럴 때는 딱 잡아 주는 사람이 필요한 거다. 아빠 같은 사람이.”
꿀꺽.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김 부장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매서운 듯하면서도 날 바라보는 눈빛이…… 정말 따뜻했다.
“중학생 되기 전까지 방송 출연하지 마라. 끝! 이제 됐지?”
그리고 날 향해 살며시 미소 짓는데, 나도 모르게 피식 따라 웃고 말았다.
이런 게 아버지의 힘인가?
전생에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었다. 그때도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그것과는 뭔가 좀 다른 게 있다.
김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이제 가자.”
난 눈을 흘기며 말했다.
“마음 바뀌면 얘기할 거야.”
“하하, 쉽지 않을 거다.”
정말 오랜만에 김 부장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 * *
5년이 흘러서 난 초등학생 6학년이 되었다.
초등학생을 파란만장하게 시작했지만, 방송 출연을 안 하는 것만으로도 나에 대한 관심도가 좀 줄어들기 시작했다.
간혹 실수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어린아이의 몸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게 아니다.
급하면 될 일도 안 되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한다.
전생에 35년을 살면서 얻은 깨달음이다.
지난 5년간 내 주변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정진은 ‘아침마당놀이’ 출연 이후로도 꾸준히 방송 활동을 했다. 특히 아주머니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곱상한 외모에 구수한 말투로 아주머니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부분을 혼자 활동하지만, 간간히 나와 지방 무대에 함께 서기도 했다.
정진과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신바람은 천지가 개벽했다.
‘흙장난’이 발매된 이후 후크송 형태의 트롯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고, 그는 곡 의뢰를 많이 받았다.
신바람이 트롯 작곡을 하는 데는 많이 에너지가 들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곡을 빨리 뽑아냈다.
몇십 년을 음지에서만 살던 양반이 이제야 눈을 뜬 건지, 그는 자신의 재능을 파악하여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기 시작했고.
말 그대로 ‘다작’을 했다.
‘흙장난’의 유명세 때문에 곡 의뢰는 꾸준히 들어왔고, 신바람은 물 들어올 때 노를 신나게 저었다.
의뢰받는 족족 다 승낙했으며, 매년 몇십 곡을 작곡했다.
낚시질하듯 그중 간간이 터지는 곡도 있었다.
이제는 트롯 가수가 아니라 트롯 작곡가로 더 유명해졌으며 5년 전의 그의 위상과는 완전 딴판이 되었다.
그래도 나와 김 부장에게는 한결같았다. 그는 내 개인 교습을 꾸준히 해 주고 있다.
정동희와 송사무엘은 내가 2학년 되던 해에 이태리 유학을 갔다.
서울 음대생의 필수 코스라고도 하고, 돈도 부족하지 않으니……. 뭐, 예정된 수순이었다.
친해진 두 형들과 오랫동안 볼 수 없는 건 많이 아쉬웠다.
간간이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는데, 내년쯤에 온다고 했다.
우리 가족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가장 큰 변화는 새 가족이 생긴 것이다.
큰삼촌은 내가 3학년 되던 해에 결혼에 골인했고, 그다음 해에 친척 동생이 태어났다.
덕분에 우리 집은 가족이 한 명 줄어서, 어머니 어깨가 좀 가벼워지셨다.
막냇삼촌은 여전히 함께 살고 있다. 삼촌도 빨리 장가를 가야 어머니가 좀 더 편해지실 텐데…….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건강하시다.
두 분은 꾸준히 야산에서 나무에 손바닥 치기, 뒷걸음 걷기 등을 하며 건강을 유지하신다.
내 누나 김지아도 무난하게 잘 지내고 있다. 핏줄은 어쩔 수 없는 건지…… 공부는 정말 안 하고 아이돌 가수들 쫓아다니는데, 이상하게 성적은 좋다.
올해 중3인데, 외고를 가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김 부장은…….
덜컹!
저녁 7시. 여느 때처럼 동일한 시간에 김 부장이 퇴근하여 집에 왔다.
근데, 오늘 참 표정이 밝다.
“여보!”
큰소리에 어머니가 놀라서 부엌에서 나왔는데, 김 부장은 주먹을 꽉 쥐고 소리쳤다.
“나, 승진했어!”
……김 부장이 진짜 김 부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