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끝난 후에
두구. 두구. 두구.
긴장되는 북소리.
나와 정진은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눈을 감았다.
아침마당놀이에서는 우승자와 준우승자만 발표한다.
3등은 없다.
여기서 호명되지 않으면 오늘 그냥 나가리인 것이다.
두구. 두구. 두구.
지난 10일간의 일들이 떠올랐다.
정동희는 학교도 거의 안 가고, 우리 연습에 함께해 주었다.
연습에 거의 함께하지 않았지만, 송사무엘의 역할도 컸다. 그의 대리출석이 없었다면 정동희가 이렇게 시간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바람 또한 진심으로 제자인 우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써 주었다.
정동희가 옆에 있으니, 자기 스타일대로 편하게 욕도 못 하고…… 나름 힘들었을 것이다.
“자! 호명하겠습니다. 지금 호명된 팀은 자동으로 준우승이 확정되는 겁니다.”
후우―후우―
남자 MC는 결과지를 본 뒤 멘트를 날렸다.
“하! 하! 하! 역대급이군요. 저도 이분들을 응원했지만, 심사 위원 평이 좋지 않아서 혹시나 했는데. 하하. 방청객 투표에서 뒤집혔군요?”
“…….”
두구. 두구. 두구.
남자 MC는 큰 소리로 외쳤다.
“방울형제 팀입니다!”
우왓!
나와 정진은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좋았어!”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덕후야! 축하해!
“형! 형도!”
짝짝짝.
다른 출연자들은 우리 주위에 서서 박수를 치며 축하해 주었다.
―얘들아~ 축하해.
―니들이 될 줄 알았어.
―참 잘하더라. 정말
“하하! 준우승 확정 축하드립니다. 자, 이제 앞으로 나오시죠?”
남자 MC의 안내에 따라서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누가 보면 우승한 줄 알겠어요. 너무 좋아하는데요?”
그러면서 내게 마이크를 넘겼다.
“아, 네. 다른 출연자분들도 그러셨겠지만…… 저희 열심히 준비했거든요. 발표하시기 전에 정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는데, 주변에서 고생해 주신 선생님과 동희 형을 생각하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아, 맞다. 그리고 난 호명되지 않은 출연자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지만…… 덕분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난 허리를 깊숙이 숙여서 인사했고, 정진도 얼떨결에 따라서 인사했다.
―휘이익~!
―생각해 줘서 고맙다~ 니들이 너무 잘한 거야~!
―방울형제~ 화이팅!
남자 MC는 흐뭇한 미소로 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방송할 때도 느꼈지만, 덕후 군은 참 의젓하군요.”
“고맙습니다.”
“정말 8살 맞죠? 도대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죠? 다음에 아버님도 만나 봐야겠어요. 하하.”
아버님이면…… 김 부장?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싹 굳어졌고.
남자 MC는 내 표정을 살피고는 다음 순서를 이어 갔다.
“흠! 자, 자, 그럼 오늘 우승자 발표하겠습니다!”
여자 MC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네~ 오늘 우승자에게는 김치냉장고와 여행 상품권을 드리고요, 준우승자에게는 여행 상품권만 드립니다!”
짝짝짝
방청석에서 박수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오늘 우승 팀은 전주 우승 팀과 바로 승부를 가리게 되고요, 승리한 팀은 다음 주에 출연하여 우승 팀과 승부를 벌이게 됩니다!”
“…….”
“또한 분기에 있을 왕중왕전에 우승 팀은 자동 출전이고요, 준우승 팀은 시청자분들이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일부 팀만 선정되어 출전합니다.”
남자 MC는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네~ 정말 선물이 어마어마하죠? 우승 팀이 되면 이런 선물을 매주 받아 갈 수 있다는 거죠. 하하.”
남자 MC는 우승 팀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참 능청스럽게 진행했다.
지금 내게 선물 얘기는 귀에 별로 들어오지 않는다.
결과가 궁금할 뿐. 그만 얘기하고 빨리 발표했으면 좋겠다.
“우리 정진 군은 여행 상품권으로 어디 가고 싶으신가요?”
아오!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정진의 얼굴은 잔뜩 얼어 있었다.
“네? 아 네, 집에 가고 싶습니다.”
“…….”
우문현답이었다.
긴장해서 ‘여행 상품권’ 부분을 못 듣고 한 대답 같은데.
타이밍이 절묘했다.
“흠! 네, 빨리 발표하라는 말씀이죠? 하하, 알겠습니다. 발표하겠습니다.”
두구. 두구. 두구.
“우승자는 김치냉장고와 여행 상품권이 수여되고, 다음 주 아침마당놀이 출연 자격을 얻게 됩니다.”
두구. 두구. 두구.
“지금 호명되지 못한 팀은 자연스럽게 준우승 팀이 됩니다.”
후우― 후우―
드디어 발표구나.
어쨌든 준우승은 확정되어서인지 아까보다 마음은 더 편하다.
“오늘의 우승 팀은!”
두구. 두구. 두구. 두구.
“바로오~~!”
우와아~!
남자 MC의 발표와 동시에.
다른 출연자들은 우승자를 축하해 주러 무대 중앙으로 모두 나왔고.
나와 정진은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서로를 토닥여 주었다.
* * *
무대가 모두 정리되고, 우리와 핫한 형제 팀은 뒤늦게 출연자 대기실로 향했다.
속이 후련하다.
“얘들아, 축하해. 수고 많았어.”
핫한 형제 팀의 교수가 말했다.
“하하, 축하드려요. 정말 노래 잘 부르시더라고요.”
“뭘~ 우리야 원래 노래 부르는 사람들이고. 너희 둘은 정말 대단하더라.”
교수는 웃으며 말했다.
“교육만 잘 받으면 대성할 수 있을 거야. 오늘 무대는 사실 재능으로만 펼친 무대 아니니?”
“하하, 뭐…….”
맞는 말이다. 솔직히 좀 엉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좀 민망해서 그냥 웃었다.
교수님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렴. 내가 대학교에 있으니까 뭔가 도울 수 있을지 모르잖니?”
교수는 그러면서 명함을 건네었다.
“난 재능 넘치는 제자들을 좋아하거든.”
“…….”
교수님 옆에 꼭 붙어 서 있는 젊은 제자를 보았다.
묘한 사제지간 때문일까.
순수한 의도로 말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조금 거리를 두고 싶어졌다.
난 정진 대신 명함을 받으며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그리고 명함을 주머니에 넣었고, 그들이 나갈 때 가까운 쓰레기통에 넣었다.
출연자 대기실.
“하하~ 어서 와라!”
정동희와 신바람은 우리를 보자마자 얼싸안으며 환대해 주었다.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들린다.
다른 출연자들은 모두 가고 없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이 출연자 대기실에 꽤 많이 있었다.
연신 우리를 향해 셔터를 눌러 대는데, 당혹스러워서 물었다.
“형, 저분들 뭐야?”
“응~ 여기 방송국 관계자분들이래. 오늘 우승 팀 찍으러 오셨다는데?”
“우승 팀을? 근데 왜 일로 와.”
난 방송 관계자들을 향해 말했다.
“못 보셨어요? 저희는 준우승인데요? 우승 팀은 핫한 형제 팀인데.”
내 말에도 아랑곳 않고,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우리 방울형제 주변을 돌아다니며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핫한 형제 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얘들아, 너희 혹시 트롯 말고 댄스곡에는 관심 없니?
―노래는 언제부터 했니?
―가사는 진짜 덕후가 쓴 거 맞니?
―예능 출연 어때?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지?
기자 같지는 않은데…….
확!
그때 나와 정진을 잡아끄는 강한 팔 힘이 느껴졌는데, 김태섭 작가였다.
“다른 프로그램 관계자들이야. 될 거 같은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 사람들이거든.”
“아…….”
김 작가는 방송 관계자들을 향해 말했다.
“자자, 그만하고 가세요. 우리 상도덕은 좀 지킵시다. 궁금한 건 ‘아침마당놀이’에 정식으로 요청해 주시고. 지금 막 공연 끝났는데 뭐 하시는 거예요? 저~ 기 우승자한테 가 보세요.”
방송 관계자들은 볼멘소리로 말했다.
―에이~ 김 작가, 너무 그런다.
―같이 좀 합시다!
―김 작가~ 나랑 잠깐 얘기 좀 해.
김 작가는 무시하고 말했다.
“얘기는 저희 성 피님이랑 하세요.”
“…….”
성 피디라는 단어에 분위기는 갑자기 싸해졌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피디님이 좀 보자고 하셔서요. 덕후야.”
“네.”
“옷 갈아입고, 잠깐 좀 볼 수 있을까? 아침마당놀이 담당 피디님이 만나고 싶어 하는데.”
난 대답했다.
“지금요?”
“집 가기 전에. 그리고 어차피 지금 바로 나가면 정신없을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요?”
“내가 방청객에 앉아 있던 아줌마들 눈빛을 봤거든.”
“…….”
“지금 나가면 난리 난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일단 보자고 하니 뭐…… 난 정진을 향해 물었다.
“형, 갔다 오자.”
“그래.”
“아니.”
김 작가는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덕후랑 동희 씨만.”
“네?”
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정진과 신바람을 바라보았다.
정진은 입을 살짝 삐죽였고.
신바람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회의실.
방송국에 이런 회의실도 있구나.
전생에 방송국은 와 본 적이 없으니…… 그냥 일반 회의실과 똑같았다.
똑똑. 덜컹.
김 작가는 문을 열고 말했다.
“피디님, 김덕후 데리고 왔어요.”
“어, 그래.”
우리는 정동희와 함께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왜 나와 정동희만 불렀을까?
성 피디는 웃으며 말했다.
“어서 와. 여기 앉어.”
그리고는 정동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친척 형이군요? 맞죠?”
“아, 네. 어떻게 아십니까?”
“김 작가한테 얘기 들었어요. 앉으세요.”
우리는 성 피디 맞은편에 어색하게 앉았다.
“…….”
사람 불렀으면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런 말이 없다.
그냥 잠자코 편안한 자세로 커피만 마셨다.
지금 시간이 밤 9시가 넘었는데.
무슨 이 시간에 커피를…….
“차 들어요.”
“…….”
내 앞에는 깜찍이 소다가 하나 놓여 있고, 정동희 앞에는 커피가 놓여 있다.
말없이 홀짝이던 성 피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덕후가 재능이 아주 출중하던데요. 어릴 적에 뭘 했나요?”
정동희에게 묻는 말이었다.
“아니요, 특별히 뭔가를 한 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치?”
“응, 맞아.”
“그냥 덕후는 원래부터 잘했습니다. 악기 잘 다루고, 노래도 잘하고. 저도 그런 덕후를 옆에서 지켜보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어서 따라 다니고 있는 거구요. 하하.”
정동희는 막상 내 얘기가 시작되니, 신나서 말했고.
성 피디는 잠자코 듣다가 말했다.
“그래요? 저도 방송 경력이 꽤 되는데, 이런 어린 친구는 처음이거든요. 그냥 노래 좀 하고, 악기 잘 다루는 친구는 많죠. 그런데 그것 말고 덕후가 좀 특별한 게 있더라고요?”
“…….”
성 피디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존재감.”
“…….”
“춤, 노래 실력. 뭐 그런 것도 괜찮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날 보는 성 피디의 눈에 불길이 보였다.
“그냥 눈이 가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무대에 내가 나왔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사람. 눈, 노래, 몸짓, 표정으로…….”
난 얼떨떨한 표정으로 성 피디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게 존재감입니다. 덕후는 존재감이 있어요. 그런 아이는 타고나는 겁니다. 업계에서는 그걸 바로 …….”
성 피디는 커피를 한잔 마시고는 힘주어 말했다.
“스타성이라고 하죠.”
“…….”
이 정도면 극찬인 거 같은데?
생각지도 못한 좋은 말에 나와 정동희는 멍해졌다.
“가, 감사합니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그래, 덕후야.”
성 피디는 날 바라보았다.
눈빛이 따뜻해 보이면서도 탐욕이 느껴지는 듯한 묘한 느낌이었다.
“오늘 수고 많았고. 조만간 또 보자.”
“…….”
“내가 너 부를 거야. 알겠지?”